왕궁 한복판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도현은 처음 알았다.
왕궁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분명 지도에 있었다. 연회장 뒤 물품 보관실의 벽을 따라 열두 칸을 내려가면 세 번째 문이 나와야 했다. 그런데 일행이 지나온 문은 벌써 네 개였고, 계단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주방장님, 계단을 세는 데에도 저주가 있나요?”
브론이 어둠 속에서 물었다. 늑대인간의 귀는 아래쪽에서 울리는 바람 소리에 쫑긋 서 있었다.
“제가 셀 수 있는 건 그릇 수까지입니다.”
“그런데 아까 열두 칸이라고 하셨잖아요.”
“열두 칸이어야 한다고 했죠.”
도현은 왼손을 외투 속에 넣었다. 굳은 손가락이 계단 난간의 냉기에 닿자 손목의 회색 무늬가 욱신거렸다. 왕궁 만찬장에서 악화된 석화 저주는 쉬었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오른손으로는 짧은 등불을 들었다.
함께 내려온 사람은 에스텔과 브론, 아일린, 왕실 문서관 오르델, 왕궁 수석 요리사 헥터였다. 호위대장 토렘은 계단 입구에 병력을 남겨 두었다. 부서진 만찬장 기둥을 수리하는 사람들과 시장 배식이 아직 위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오래된 비밀을 찾는다는 이유로 오늘의 일꾼을 비울 수는 없었다.
“여기에는 눈이 내려요.”
아일린이 말했다.
그녀의 말이 농담 같지 않았던 것은 계단 모서리에 희고 고운 것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도현이 무릎을 굽혀 살펴보자 소금이었다. 손끝으로 조금 찍어 혀에 대려다가 멈췄다.
“먹지 마.” 에스텔이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는 제0봉인의 내부야. 맛을 본다는 행위도 수령 확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도현은 가루를 종이에 싸서 오르델에게 맡겼다. 오르델은 채취한 장소와 시간을 기록했다. 그가 새로 마련한 기록장은 왕실 마법 장부가 아니라 보통 종이였다.
“제0봉인의 원문 열람 조건은 충족한 것 아니었습니까?” 헥터가 물었다.
“열람을 허락한다는 것과 무사히 지나가게 해 준다는 건 다른 일인 모양입니다.”
아일린은 검은 왕관 무늬가 새겨진 손을 옷소매 밖으로 드러냈다. 얼마 전 그녀가 포기한 것은 왕국의 모든 식사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왕실의 권한이었다. 왕위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하에서는 왕관 모양 저주가 새까만 재처럼 식어 있었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좁은 현관이 나왔다. 벽에는 오래된 구왕력 글씨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문은 먹지 못한 사람을 세기 위해 만든다.]
그 아래에는 최근에 덧댄 얇은 은판이 붙어 있었다.
[열람자 일괄 수령 동의 후 통과.]
브론이 은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들어가려면 여기서도 다 먹었다고 해야 한다는 거군요.”
“원래 문구와 정반대네요.” 도현이 말했다.
헥터는 화덕의 문짝을 검사하던 습관으로 은판의 고정 못을 살폈다. 새 못이었다. 오래된 돌벽과 달리 금속에는 녹이 없었다.
“최근에 덧붙였다는 뜻입니다.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일린이 왕위 계승자 인장을 꺼냈다.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 문을 열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에 동의하는지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왕실 인장으로 서명하지 않으려 해요.”
아일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은판 대신 그 옆의 원래 문장 아래에 일반 펜으로 적었다.
[열람을 요청한다. 수령을 확인하지 않는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브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문을 밀어 볼까요?”
에스텔은 벽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온기를 느꼈다. “아니. 기다려.”
돌문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쇠문이 아니라 화덕 속 장작이 쓰러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윽고 문 아래에서 회색 먼지가 흘러나왔다. 은판은 그대로였지만, 문 옆의 작은 급수구가 열렸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통로였다. 안쪽에는 낡은 나무통 세 개가 놓였고, 두 번째 통 바닥에는 남은 밀가루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뒷문 같습니다.” 오르델이 말했다.
“부엌에는 원래 뒷문이 있어야죠.” 헥터가 대답했다. “장작 들여오고 쓰레기 내보내는 문이니까.”
브론은 한참 벽을 킁킁거리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안에서 눈 냄새가 나요. 그리고…… 탄 빵 냄새도요.”
문을 넘자 커다란 지하 공간이 펼쳐졌다. 천장은 둥근 석조 돔으로 되어 있었고, 벽을 따라 열여섯 개의 작은 화덕이 줄지어 있었다. 중심에는 그보다 오래된, 검은 돌로 만든 하나의 큰 화덕이 자리했다. 굴뚝은 보이지 않았다.
좁은 문턱을 넘기 전 헥터가 허리를 숙여 바닥을 살폈다. 돌에 파인 바퀴 자국이 여러 겹이었다. 제법 무거운 수레가 오랫동안 드나든 흔적이었다. 위쪽 왕궁의 화려한 주방에는 금으로 장식한 식기와 희귀한 향신료가 있었지만, 지하의 문턱에는 바퀴가 닳아 만든 굴곡만 남았다.
“왕실이 전부 지어 줬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실용적이군요.” 도현이 말했다.
“처음부터 왕실 시설이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오르델이 대답했다. “옛 부엌에서는 왕궁 사람들이 오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장작을 나르기도 했으니까요.”
브론은 통로 한편에 쌓인 나무토막을 골라 들었다. 새것처럼 보이는 것과 썩은 것을 구분하자 나이테의 폭부터 달랐다. 한때는 산 위에서 자란 단단한 나무를 썼다가 어느 시기부터 습기가 많은 강가의 나무를 섞었다는 흔적이었다. 왕도가 커지면서 재료를 들여오는 곳도 달라졌을 것이다.
“여기까지 숨어 들어온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그가 말했다.
“숨어 들어왔다기보다는 일하러 왔겠죠.” 헥터가 수레 자국을 손으로 짚었다. “물건을 실은 수레는 돌아가야 하니까 문턱을 낮게 만들었습니다.”
아일린은 바퀴 자국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왕궁에서 자란 그녀는 한 끼 식사를 준비할 때 몇 사람이 새벽에 일어나고 몇 자루의 장작이 필요한지 배운 적이 없었다. 왕실 주방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곳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부엌보다 더 오래된 곳이 왕궁 아래에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여기로 곡식을 싣고 오던 사람들에게도 왕실의 이름이 붙었을까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도현은 대답했다. “누가 실제로 가져왔는지 아는 게 우리가 여기 내려온 이유니까요.”
그들은 문턱에 표식을 남겼다. 앞으로 문이 닫히더라도 바깥 사람이 통로의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토렘에게 알릴 작은 줄도 묶었다. 등불을 아예 마법에 맡기지 않고 기름 양을 확인한 다음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엌 안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먼지 위에 아주 오래전에 남은 것처럼 희미했지만, 그중 한 줄은 다른 것보다 또렷했다. 브론은 그것을 보고 귀를 내렸다.
“최근에 지나간 발자국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먼지 자체가 위에서 계속 떨어지는 것 같아요.”
도현은 발자국 옆에 자신의 신발을 놓아 크기와 모양만 비교했다. 발자국은 그보다 조금 작았다. 그는 누구의 것일지 짐작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흔적이지, 그 흔적을 남긴 사람의 생존 증명서가 아니었다.
지하인데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희고 가벼운 조각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화덕 위에 내려앉았다. 도현이 등불로 비추자 그것은 눈이 아니라 오래된 밀가루와 재가 섞인 가루였다. 누군가 수십 년 동안 닫아 둔 제분소에 들어온 듯한 광경이었다.
오르델은 커다란 화덕의 문 위에 새겨진 글자를 읽었다.
[첫 겨울의 부엌. 식사 완료를 선언하지 말 것.]
그 밑에 새로운 글씨가 천천히 떠올랐다.
[응답 기록: 조리자 세른.]
[실체 확인: 진행 중.]
에스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세른.”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가장 안쪽 화덕에서 세 번, 잠시 쉬고 두 번의 숟가락 소리가 들렸다.
헥터가 숨을 삼켰다. 자신의 아버지가 퇴근할 때 쓰던 신호와 같았다.
그러나 도현은 화덕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이름을 불렀다고 사람이 살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물었다.
“거기 계신 분. 저희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숟가락 소리가 멎었다. 잠시 뒤 화덕 속에서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먼저…… 불을 피우지 마.”
바로 그 순간, 중앙 화덕 아래에서 푸른 불꽃이 혼자 피어올랐다.
제16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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