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틀 무렵에도 만찬장은 텅 비지 않았다.
붕괴된 기둥은 토렘의 지시로 임시 지지대를 세워 두었다. 부상자는 왕궁 의원이 살폈고, 목격자들은 서로 다른 방에 나뉘어 자신이 본 사실을 적었다. 조리실에서는 식은 수프를 버릴지 다시 데울지 확인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거대한 비밀이 드러난 밤이어도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을 먹어야 했다.
도현은 왕궁 주방의 낮은 의자에 앉아 왼손을 살폈다. 손목부터 손가락 둘째 마디까지 회색이 퍼졌다. 어젯밤의 충격 이후 잠깐 손을 펴는 일조차 어렵다. 에스텔이 피부 위에 작은 보호 마법을 펼쳤지만, 새로운 저주가 더해진 것은 아니라는 설명 말고는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늘은 칼 잡지 마.” 그녀가 말했다.
“어차피 손이 말을 안 듣네요.”
“억지로 쓰면 그날의 기억도 흔들릴 수 있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잊어버린 맛을 되찾겠다는 충동이 갑자기 밀려오면 얼마나 판단이 흐려지는지 알고 있었다. 리데아가 저주를 보존고로 옮겨 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도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어디로 옮기는지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왕궁의 의원은 차가운 천으로 손을 감싸 주고 쉬라고 했다. 도현은 이상하게도 그 지극히 평범한 말이 반가웠다. 모든 일을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일린이 작은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밤새 왕위 보존관 리데아와 문서관 오르델, 각 영지에서 온 참관인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가에는 피로가 짙었지만 손등의 왕관 무늬는 숨기지 않았다.
“대관식이 연기됐어요.”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취소된 건 아니고요?”
“아직 아닙니다. 만찬의 마지막 제공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의 필수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됐어요. 대신 왕국의 배식과 임금 지급은 임시 예산으로 유지하기로 했어요. 모두가 굶게 될 거라는 소문부터 막아야 하니까요.”
“그건 다행이네요.”
아일린은 테이블에 새 문서를 올려놓았다. 만찬장 유리판에 나타난 ‘첫 번째 포기’의 전체 문장이었다. 어젯밤에는 글자 아래쪽이 검게 가려져 있었다. 리데아가 왕실 숟가락의 인장을 풀자 감춰진 나머지 문장이 드러났다고 했다.
[제0봉인 원문 열람 조건: 계승 예정자가 왕실의 전면 제공 완료라는 허위 주장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미수령 기록을 미수령 상태로 보존할 것.]
“왕위를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군요.” 도현이 말했다.
“그렇죠. 모든 백성이 이미 배불리 먹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라는 거예요.” 아일린이 대답했다. “그동안 왕실은 그런 선언이 통치의 힘이라고 믿어 왔겠지요.”
에스텔이 문서를 읽고 한숨을 쉬었다. “당연한 걸 약속하려면 이렇게 오래 걸리나 봐.”
“당연한 걸 지켰다는 증거가 없었으니까요.” 도현은 말했다.
아일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그 대신 왕실은 부족한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조사해야 해요. 그 책임을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무섭겠죠.” 도현이 말했다. “그래도 혼자 하실 일은 아니에요. 확인할 사람도, 실제로 곡식을 기르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요.”
아일린은 그 말을 듣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왕궁의 작은 회의실에는 전날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 일부가 모였다. 헥터와 타니아는 세척실의 미수령 기록을 증빙할 준비를 했고, 니아는 자신이 쓴 원문을 직접 읽었다. 리데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왕궁의 질서를 위해 기존 제도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검은 빵을 실제로 누가 만들었는지 묻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에게도 대관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는 이유가 있겠지요.” 아일린이 말했다. “하지만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종료할 권한을 계속 가지려면, 그 권한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리데아는 한참 침묵했다. “왕국에는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먹지 못했다고 기록하면 왕의 약속은 실패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왕의 약속을 실패하지 않은 것으로 보존해 왔습니다.”
“약속이 실패했는데 실패하지 않았다고 적어서,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죠.” 도현이 말했다.
“당신은 한 끼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리데아가 쏘아붙였다. “왕국 전체를 책임지는 일은 다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왕국 전체의 식사를 했다고 적지 말라는 겁니다.”
그 대답 이후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오르델은 만찬장에서 확보한 원본 조각과 중앙 명부실 기록을 대조했다. 구왕력 117년의 원래 문장은 이랬다.
[왕이 먹지 않은 첫 빵은 아직 식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남긴다. 왕실은 그 몫이 실제로 전달되기 전까지 제공을 끝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문장 끝에는 세른의 세 갈래 매듭이 있었다. 그 밑에는 왕의 서명란이 비어 있었다. 왕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역사 기록, 제1화덕에 남은 빵, 세척실의 미완료 기록이 조금씩 이어졌다.
그러나 도현은 그 문장만으로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왕이 서명하지 않았는지, 언제부터 '완료 선언'이 곧 식사 지급으로 바뀌었는지, 누구에게 이 변경의 이익이 돌아갔는지는 더 확인해야 했다.
“최초의 빈 의자는 특정 사람 이름이 아니었네요.” 아일린이 말했다.
“아직 먹지 못한 사람의 몫이었죠. 누군가 그 의자에 이름을 써 넣고 마음대로 먹었다고 처리한 겁니다.”
리데아는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한참 뒤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왕궁의 보존고에 있는 식량과 마력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맞아요.” 도현이 말했다. “실제로 있는 것은 조사해야죠. 누구에게서 왔고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아일린은 아직 저주받은 손을 들어 서명을 준비했다. 오르델이 그녀에게 일반 펜을 건넸다. 왕실 숟가락이나 피로 쓰는 인장이 아니라, 누구든 쓸 수 있는 잉크였다.
“저는 왕국의 미수령 식사를 모두 완료했다고 선언할 권리를 포기하겠습니다.”
그녀는 직접 서명했다. 누구도 대신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왕관 표식이 잠시 뜨거워졌다가 조용해졌다. 저주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표식 아래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제0봉인 원문 열람 조건 1건 충족.] [왕국의 미수령 기록 보존.] [왕실의 일괄 제공 완료 선언 권한 정지.]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내쉬었다. 왕국의 183,442명에게 연결된 저주가 한꺼번에 풀리지 않았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실종된 요리사 열여섯 명의 생사 역시 여전히 미확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먹지 않은 음식을 먹었다고 선언하는 첫 번째 힘은 공식적으로 제한됐다.
아일린이 도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제0봉인의 원본을 볼 수 있겠어요.”
“그렇겠죠. 대신 거기에 뭘 써 놨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오르델은 원본 열람의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려고 왕위 보존고의 지도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지도에서 오래된 청색 선이 나타났다. 왕궁 아래, 종탑보다도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끝에는 작은 화덕과 닮은 기호가 있었다.
[제0봉인 보관 위치: 첫 겨울의 부엌.] [열람 대상 기록: 왕위의 첫 굶주림.] [미확인 조리자 16명 관련 추가 기록 존재.]
도현의 숨이 멎었다. 열여섯 명의 요리사와 최초 계약의 비밀이 다시 연결된 것이다.
그때 왕궁 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시장의 사람들이 늦은 대관 소식을 듣고 불안해하며 몰려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오늘도 배급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고, 누군가는 세금이 오르지 않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도현은 회의실을 나가려다가 헥터에게 말을 걸었다.
“주방에 남은 재료가 있습니까?”
“보리와 양파가 조금 있소. 수프를 끓이려면 충분하겠지.”
“그럼 사람 수부터 확인하시죠. 저도 돕겠습니다. 손은 지금 이래서 칼을 못 잡지만 맛을 봐 줄 수는 있어요.”
헥터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끓이지. 자네는 그릇 수를 세어 주게.”
브론은 빈 그릇을 나르기 시작했다. 니아는 누가 수프를 원하는지 직접 물었다. 아일린은 신분을 밝히고 광장에 나가 오늘의 배식이 중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안도의 소리가 일었다.
도현은 주방 창문을 통해 왕궁 정원을 바라보았다. 한밤의 화려한 잔치는 끝났지만 오늘의 점심은 이제 준비 중이었다. 누군가를 구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 한 사람에게 온전한 식사를 주는 일은 여전히 할 수 있었다.
그가 빈 그릇 하나를 따로 남기자 헥터가 물었다.
“저건 누구 겁니까?”
“아직 안 오신 손님이요. 오지 않으시면 안 먹었다고 적겠습니다.”
헥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한편 깊은 지하의 어두운 방에서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화덕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안쪽의 돌에는 새 글자가 떠올랐다.
[첫 겨울의 부엌: 재점화 준비.] [원본 증언 대상 중 하나가 응답했습니다.]
그 아래에 낯익은 이름 한 줄이 나타났다.
[조리자 세른.]
그러나 곧 새 문장이 덧붙었다.
[생존 여부: 불명. 기록 대조 전까지 실체 판정 금지.]
마지막 한 숟갈의 주방에서 시작된 질문은 이제 왕국의 가장 오래된 부엌을 향하고 있었다.
제16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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