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탑 아래 중앙 명부실의 공기가 단번에 차가워졌다.
없던 의자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자라나 도현의 무릎을 향해 기어왔다. 그의 발목에는 아무도 묶지 않은 흰 실이 걸렸다. 사라진 요리사들의 증언이 놓인 원형 탁자 위에서 검은 먹물이 작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도현은 그 풍경을 보며 제2저장고의 문을 떠올렸다. 이름을 요구하는 문, 그리고 이름을 내놓는 순간 사람을 빚의 주인으로 만드는 함정이었다.
“손대지 마.” 에스텔이 속삭였다. “이건 주문으로 태운다고 없어질 저주가 아니야.”
“알아요.” 도현이 대답했다. “여기에 앉는 사람이 누군지 정하는 규칙부터 봐야죠.”
하엘이 구리 열쇠로 바닥의 홈을 짚었다. 여섯 개의 선이 원형 탁자로 이어졌고 마지막 하나는 빈 의자로 이어졌다. 열쇠의 홈과 정확히 같았다. 하엘이 그중 다섯 번째 선을 손으로 가리키자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여섯 번째 확인: 제공 여부.] [제7응답: 수령인의 자발적 의사.]
“이 부분은 손상되지 않았군요.” 오르델이 말했다.
“그런데 왜 빈자리를 사람으로 기록했지?” 아일린이 물었다.
도현은 식탁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오래된 칼자국처럼 보였던 흔적은 글씨였다. 글씨 위에 다른 글씨를 덧씌우고, 돌을 갈아 흔적을 없앤 것이었다. 그는 등잔을 낮추어 그림자를 비췄다. 문장 두 개가 서로 겹쳐졌다.
[왕실은 첫 빵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왕은 첫 빵을 수령하지 않았다.]
그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가 있었다.
[지급하지 않은 몫은 채무로 남긴다.]
그러나 나중에 덧새긴 문장은 달랐다.
[수령인이 없을 경우, 제7의자가 대신 수령한 것으로 간주한다.]
도현은 한동안 두 문장을 바라보았다. 왕이 먹지 않았던 빵은 단순히 왕의 식사가 아니었다. 왕실이 누군가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던 식량의 첫 몫이었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그 부족분을 기록해야 했다. 그런데 후대의 누군가가 '미지급'을 '대리 수령'으로 바꾼 것이다.
“빚을 진 사람과 빚을 받을 사람을 뒤집어 놓았어요.” 아일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능성은 높습니다. 다만 최초 계약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남았죠.” 오르델이 말했다.
오르델은 발견한 두 문장을 서로 다른 색의 잉크로 베껴 적었다. 원본 글씨를 그대로 따라 쓰되 마모된 부분은 빈칸으로 남겼다. 왕실 공문에서는 이름이 비어 있으면 늘 누군가를 배정하라는 지시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빈칸을 빈칸으로 남겼다.
“왕이 먹지 않은 건 분명한데 왜 모두가 먹었다고 적혔을까요?” 아일린이 물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약속했는지부터 봐야죠.” 도현이 말했다.
아일린은 손등의 왕관 문양을 억누르며 종이의 가장자리를 읽었다. 장부에는 '첫 빵'이라는 말이 되풀이되었지만 빵을 받을 사람의 신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어쩌면 원래부터 특정한 한 사람을 뜻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왕이 먼저 먹지 않는 동안 밥을 받지 못한 사람의 몫을 남겨 두겠다는 약속이라면, 그 자리를 왕실이 마음대로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걸 공개하면 왕실이 오래전부터 약속을 어겼다는 주장이 되겠죠.” 아일린이 낮게 말했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공개해야죠. 왕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고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대관식 리허설을 할 때 들었던 음성이 떠올랐다. '공주님이 첫 빵을 드시면 왕국은 굶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는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이제 와 돌아보니 누가 굶주리지 않는다는 건지, 정말 모두가 빵을 받았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던 말이었다.
“제가 왕위에 올라 첫 빵을 먹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때는 공주님이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에스텔이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른다고 말할 수 없어요. 적어도 지금부터는요.”
아일린은 왕실 인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기 이름이 적힌 문서라 해도 전부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도현을 향해 말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백성들이 모두 동의한 것으로 기록하지 마세요.”
도현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그 순간 브론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런데 여기 기록이 하나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접시 모양 홈 사이에서 아주 얇은 가죽 조각을 찾아냈다. 그것에는 아이의 손바닥이 눌린 흔적과 낡은 밀가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르델은 만지지 말라고 했다. 아직 나이와 출처도 모르는 흔적이었다. 도현은 그것을 바라보며 하나가 그려 주었던 어머니의 손을 떠올렸다. 그 연결이 우연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그들이 손을 떼는 순간 가죽 조각 위의 글씨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받고 싶다고 말한 아이가 없음. 제공자는 다시 묻는다.]
발테르가 만든 규칙은 그 문장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수령자가 없으면 누군가 대신 받았다고 적는 방식. 누군가 '아니요'라고 말한 순간에도 왕실이 마음대로 '예'라고 바꾸는 방식이었다.
도현은 가죽 조각의 위치를 기록하며 그 차이를 마음속에 새겼다. 아직 최초 계약의 전모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어떤 질문을 회복해야 하는지는 점점 또렷해졌다.
그들은 원형 탁자 아래를 살폈다. 손바닥을 받쳐 주는 세 갈래 매듭 문양이 있었다. 하나가 그려 주었던 어머니의 손과 같은 모양이었다. 에스텔은 그림을 꺼냈다. 매듭의 방향은 원본과 같았지만 마지막 한 가닥이 끊어져 있었다.
“이걸 만든 사람은 묶어 두려고 한 게 아니야.” 에스텔이 말했다.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뜻이었지.”
그 말에 도현은 제1화덕의 세른을 떠올렸다. 자신이 제공하지 못한 건 제공하지 못했다고 적으라는 사람. 왕실의 식탁을 처음 만든 이들이라면 그들이 가장 먼저 지키려 한 것은 누군가의 거절할 권리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종이 울리자 바닥이 흔들렸다. 빈 의자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대신 도현의 앞치마를 당겼다. 기억 저주가 그의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꺼냈다. “도현아, 뜨거우니까 조금 식혀 먹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맛과 함께 점점 흐려졌던 목소리였다.
도현은 순간 숨을 멈췄다. 목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자신이 부엌에 서 있던 작은 시절이 손끝에 닿는 듯했다. 그는 그 기억을 잡고 싶었다. 멀리서 에스텔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순간 늦게 닿았다.
[보존 기억을 반환할 수 있습니다.] [반환 대가: 제7수령자로 등록.]
“주방장님!” 브론의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 섰다. “안 됩니다. 제 기억을 핑계로 다른 사람 말을 바꿀 수는 없어요.”
기억 속 목소리가 멎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가 너무 쉽게 사라진다는 사실이 슬펐다. 여전히 어머니가 끓여 준 국의 맛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기억하려 애썼다는 사실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에스텔이 그의 팔을 받쳤다. “너 혼자 버텨야 하는 일이 아니야.”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행에게 있는 그대로 말했다. 방금 들은 목소리가 진짜 어머니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고, 자신의 기억을 돌려주겠다는 제안에 흔들렸다고. 그러자 아일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도 그 자리를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왕위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값을 넘기고 싶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공주는 빈 의자의 그림자 앞에 서서 손등의 검은 왕관을 드러냈다.
“왕위가 진 채무라면 왕위가 책임을 밝혀야 합니다. 그 책임을 새 요리사에게 옮기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원형 탁자가 울렸다. [제7수령자 자동 지정에 대한 이의 제기 접수.]
그러나 동시에 천장 위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이의 제기만으로는 늦습니다.”
발테르였다. 그는 종탑 계단의 비밀 문을 열고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에는 은색 인장을 들고 있었다.
“일곱 번째 종이 울리면 정정되지 않은 기록은 모두 현재 수령인에게 넘어갑니다.”
도현은 빈 의자 대신 발테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을 멈추면 되겠군요. 원본을 지키는 방법도 함께 찾아야겠지만.”
발테르는 인장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종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왕궁 지상에서 종이 한 번 더 울렸다. 명부실의 벽에 물결처럼 긴 균열이 생겼다.
제14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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