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칸의 문장은 짧았지만 방향을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제2저장고에서 찾아낸 기록은 진짜 목소리와 가공된 목소리가 섞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누군가 왕실에서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것인지, 후대의 관리가 자기 편의대로 기록을 바꾼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을 덧씌우는 원본이 왕궁 종탑 아래에 있다는 단서는 구체적이었다.
도현은 곧장 출발하지 않았다. 폐광의 배수 상태를 확인해야 했고, 브론의 팔도 쉬게 해야 했다. 제1화덕에서 유르다가 보내 준 의원이 산을 내려와 상처를 살폈다. 카르노는 자신의 이의 신청 사본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며 허락을 구했다. 도현은 신분을 가릴 필요가 있는 다른 증언자들의 부분을 제외하고 자기 기록을 공유하도록 도왔다.
“그래도 왕궁에 가면 다시 뺏길지 모르잖아요.” 테온이 말을 건넸다. 유르다와 함께 초소에 올라온 소년이었다.
“그래서 한 군데만 두지 않는 겁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누가 원본을 보관하고 누가 사본을 확인했는지 서로 알면 함부로 고치기 어려워져요.”
유르다는 제1화덕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식사 기록을 보여 주었다. 누가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보다, 준비한 음식의 양과 받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지를 먼저 적었다. 부족한 날은 부족했다고 남겼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그런 기록이 낯설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남은 음식을 어떻게 나눌지 함께 결정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제는 아침 수프가 모자랐어요.” 유르다가 말했다. “그래서 점심에 더 끓이기로 했지. 누구에게 빚을 씌우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음 끼니를 기다릴 수 있더라고.”
“그게 당연한 일인 것 같은데.” 브론이 중얼거렸다.
“당연한 일을 지키기 어려워진 세상이라서.” 에스텔이 대답했다.
도현은 북부의 장부를 닫으며 남겨 두고 온 미라를 떠올렸다. 그녀가 여전히 제2저장고 안에 있는지, 기록의 일부가 소실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당장 없었다. 수문은 안전을 위해 닫혀 있었고, 열람 선반에는 다음 방문자를 위한 경고를 남겼다. 필요하면 현지 광부들이 원상 복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배수도도 맡겨 두었다.
“미라는 살아 있습니까?” 테온이 물었다.
도현은 소년에게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난 건 그녀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어떤 존재였어. 사람이었다는 흔적은 있지만, 지금 살아 있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지.”
“그럼 그냥 두고 온 거예요?”
“지금 데려올 방법을 몰라서. 그렇다고 잊어버리지는 않을 거야.”
테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이 모든 질문의 답을 알고 있지 않다는 말을 처음 듣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튿날 일행은 북부를 떠나기 전에 제1화덕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유르다가 준비한 말린 사과와 보리를 도현이 받아 따뜻한 죽을 끓였다. 사과를 먼저 볶아 향을 내고 보리를 천천히 넣자 고소하고 달큰한 향기가 부엌을 채웠다. 밀로는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낮은 화덕 앞에 앉았다.
“다음에 오시면 더 맛있는 걸 해 주세요.”
“지금 것도 맛있어야 할 텐데.” 도현이 말했다.
“맛있어요. 그런데 다음엔 더 맛있으면 좋잖아요.”
브론이 웃었다. “정말 무서운 손님입니다. 한 번 칭찬하고 바로 다음 주문을 하시다니.”
사람들이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도현은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한 끼 식사가 모든 불행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알았다.
도현은 유르다에게 자신이 적어 둔 조리법도 건넸다. 검은 밀이나 특별한 마법 재료가 아니라 보통 보리와 말린 채소로 만드는 수프였다. 재료가 부족하면 어느 부분을 줄여도 되는지, 어떤 때는 반드시 끓여야 하는지 간단한 표시를 남겼다.
“저는 손맛이 좋지 않아서 같은 맛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유르다가 말했다.
“똑같을 필요 없습니다. 여기 사람들 입맛에 맞게 바꾸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준을 알려 드리는 정도죠.”
테온이 옆에서 귀를 기울였다. “왕국에서 유명한 요리사가 됐는데 비밀 조리법을 그냥 알려 주는 거예요?”
“유명한지는 모르겠고, 굶주린 사람이 있는데 비밀이라서 안 알려 주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
“그럼 저도 배울래요.”
“좋아요. 우선 칼을 안전하게 잡는 것부터요.”
브론이 웃음을 터뜨렸다. “테온 군, 조심하세요. 나중에 양파만 열 자루 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조리법만이 아니었다. 재료가 없을 때 없다고 말하고, 받아야 할 돈이 있으면 실제 값만 받는 방법도 필요했다. 도현은 식당에서 처음 메뉴판을 만들며 했던 실수를 떠올렸다. 이곳에서는 그 작은 메뉴판 하나가 오래된 계약에 저항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밀로의 어머니는 도현에게 작은 천주머니를 건넸다. 안에는 말린 사과 몇 조각이 있었다. 그가 가격을 묻자 여자는 웃었다.
“선물이에요. 계산할 필요는 없어요.”
“정말 주셔도 됩니까?”
“네. 제가 주고 싶어서 드리는 거예요.”
도현은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누구에게도 외상으로 남지 않는 선물이라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수첩에 적으려다가 멈췄다. 기록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빚으로 바꿔 적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 말이 식당에서 일하던 그에게는 오히려 더 어려운 약속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될까. 그는 지금 대답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장부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떠나기 직전 도르센이 나타났다. 그는 왕실 제복 대신 소박한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집행관 표식은 가방 속에 넣어 둔 상태였다.
“왕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보고서를 제출하실 건가요?”
“그럴 생각입니다. 중앙 명부실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곳의 인장과 제2저장고의 갱신 명령이 같은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도르센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을 위해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내렸던 명령이 누구를 굶겼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는 각 증거의 봉인 상태를 마지막으로 함께 확인하고 떠났다. 도현은 그가 갑자기 믿을 만한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잘못을 감춘 사람이 사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는 정도는 인정할 수 있었다.
왕도로 가는 마차에 짐을 싣는 동안 에스텔이 도현을 불렀다.
“세른의 이름을 아직 못 찾았어.”
“그러네요.”
“내가 그 사람을 죽게 만든 건 아닐까, 가끔 생각해.”
도현은 잠시 멈췄다. 그녀가 진심으로 두려워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오래전 사건의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대신 판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분이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찾아봅시다. 그다음은 실제로 확인한 걸 가지고 이야기해요.”
“너는 참 잔인하게 친절하구나.”
“무슨 뜻입니까?”
“괜찮다고 쉽게 말해 주지 않잖아. 그래서 믿을 수 있어.”
마차는 산길을 내려갔다. 하르벤의 검은 돌이 점점 멀어지고, 눈 대신 젖은 흙길이 이어졌다. 브론은 졸다가 깼고, 도현은 왕궁 종탑 아래를 그린 지도를 펼쳤다. 제0식탁에서 나온 자료와 제2저장고의 목록을 나란히 놓자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왕궁 중앙 명부실의 위치는 종탑의 바로 아래가 아니었다. 종탑의 그림자가 정오에 닿는 자리였다. 건물 도면에는 그냥 '빈 부지'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지하 배수관은 그곳을 향해 모여 있었다.
“빈 부지 아래에 원본이 있다는 겁니까?” 브론이 물었다.
“위치가 겹치네요. 확인은 해야죠.”
그날 밤, 왕도에 앞서 도착한 전령이 아일린 공주의 편지를 가져왔다. 공주는 도현이 보낸 증거 목록을 읽고 중앙 명부실의 열람을 신청했지만, 의전국은 그런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회신했다. 대신 왕실 종탑의 정오 점검이 갑자기 앞당겨졌다는 소문을 전했다.
편지 끝에는 공주의 직접 쓴 문장이 있었다.
[왕위가 처음 저주를 지게 된 날, 왕실 일지에는 왕이 식사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종탑 관리 일지에는 한 사람이 대신 식사했다고 남아 있습니다. 두 기록의 날짜는 같습니다.]
도현은 편지를 읽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왕이 먹지 않은 식사를 누군가 대신 먹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하면 최초의 대가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에스텔 씨.”
“왜?”
“세른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 기억하십니까?”
에스텔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못 준 건 못 줬다고 말하라고 했어.”
“그런데 왕궁은 누가 대신 먹었다고 적었군요.”
도현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회색 석화 반점은 여전했고, 잃어버린 어머니의 미역국 맛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해결한 것은 북부에서 강요되던 채무 한 건의 징수를 임시로 멈춘 일과, 조작된 기록의 흔적을 건져낸 일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음에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는 분명해졌다.
왕이 먹지 않았던 첫 빵을, 누가 먹었다고 기록했는가.
새벽 무렵 마차가 왕도의 외곽에 도착했다. 멀리 왕궁의 종탑이 보였다. 아직 종이 울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탑의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먼저 길게 뻗어 나왔다.
도현의 손목에 새겨진 두 저주가 동시에 뜨거워졌다.
그리고 마차 문 안쪽에 익숙한 글씨가 나타났다.
[중앙 명부실 접근 감지.]
[최초 대리 식사자 조회를 시작합니다.]
[조회 대상의 이름은 이미 제출되어 있습니다.]
제14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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