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이었다.
백도현은 식당 문에 걸린 ‘영업 중’ 팻말을 뒤집었다. 빗줄기는 처마를 두드리고, 왕도 수로에서는 검붉은 물이 낮은 계단 위까지 불어났다. 밤의 시장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라 조용했지만, 멀리 남쪽 제분소 쪽에서는 짐수레 바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부터 찾아야 해요.” 브론이 말했다.
“맞아요. 다만 우리가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 아이들을 도울 사람이 없어집니다. 에스텔 씨, 여기서 연락할 방법이 있습니까?”
에스텔은 계산대 밑에서 푸른 유리병 두 개를 꺼냈다. 마개를 열자 병 안의 작은 불꽃이 자리를 바꾸었다.
“한 병을 들고 가. 위험하면 병의 목을 세 번 두드려. 내가 들을 수 있어.”
“그렇게 좋은 물건이 있었으면 진작 주시죠.”
“세 번 두드리는 건 목숨이 걸렸을 때만이야. 계산 안 맞는다고 불러내지 마.”
브론이 머쓱하게 웃었다.
도현은 가게 창고에서 작은 푸대 두 개를 챙겼다. 하나에는 마른 빵과 소금, 다른 하나에는 손전등 대신 쓸 수 있는 마법 등불을 넣었다. 그가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자 에스텔이 다가왔다.
“도현. 네가 두 저주를 버틸 수 있는 건 우연일지도 몰라. 다른 사람의 저주를 받아서는 안 돼.”
“알고 있습니다.”
“아는 얼굴이 위험해져도?”
도현은 붕대를 묶던 손을 멈췄다. 리아가 어머니 이름을 되찾던 순간, 노인이 굳은 손가락을 움직이던 순간이 떠올랐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더 확실한 규칙이 필요했다.
“그때는 다른 방법부터 찾겠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것과 제 몸을 재료로 쓰는 건 같은 일이 아니니까요.”
에스텔은 대답 대신 붕대를 단단히 묶어 주었다.
왕도 남쪽으로 가는 길에는 낮 동안 장사하던 가게들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식은 숯냄새가 흘러나왔고, 작은 여관의 주방에서는 마지막 손님을 위한 수프가 끓었다. 도현은 이런 평범한 생활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점점 실감했다. 사람들은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 식사가 며칠 뒤 어떤 대가로 돌아올지 알지 못했다.
수로 옆에 줄지어 세운 목조 주택에는 같은 크기의 작은 발코니가 있었다. 집집마다 빨래가 비에 젖어 축 늘어졌고, 그 아래로 노동자들이 하루 일당을 세며 걷고 있었다. 어느 노인은 동전 세 닢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거듭 셌다. 도현은 문득 첫 번째 손님이던 석화 저주의 노인을 떠올렸다. 손가락을 움직이게 되었던 그날의 기쁨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방장님, 여기서는 왼쪽으로 돌아야 해요.” 브론이 말했다.
“왜요?”
“오늘 낮에 수레가 많이 지나갔어요. 바퀴 자국에 기름이 묻어 있고, 그 안에 제가 전에 맡았던 검은 밀가루 냄새가 있습니다.”
“발자국이 아니라 냄새로 길을 찾는군요.”
“그럼 길을 찾을 때마다 땅을 핥아야 할까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브론은 수로를 따라 흐르는 바람을 맡았다. 그는 늑대인간이라는 이유로 왕궁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이 순간 그 어떤 기사보다 능숙하게 길을 안내했다. 도현은 앞으로 식당이 커지더라도 브론을 단순한 종업원으로 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사람이 작은 다리 아래를 지나자 벽에 붉은 페인트로 적힌 문장이 나타났다. ‘왕국은 누구도 굶기지 않는다.’ 바로 그 아래에는 누군가 숯으로 써 놓은 대꾸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도현은 잠시 멈춰 두 문장을 읽었다. 오늘 벌어진 일을 한눈에 설명하는 풍경이었다.
남쪽 제분소는 수로가 갈라지는 지역에 있었다. 낮에는 밀가루를 나르는 상인과 인부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밤에는 창고 문이 닫히고 작은 등불만 남았다. 도현과 브론은 빵집 뒷골목을 돌아 배급소로 향했다. 파란 지붕의 긴 건물 앞에는 ‘공정한 왕실 식량 배급’이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문을 열자 안에서는 신 곡물 냄새가 났다.
“이상합니다.” 브론이 코를 찡그렸다. “사람이 많이 모여야 할 곳인데 발자국 냄새가 없어요.”
긴 탁자 위에는 빈 국그릇 일곱 개가 있었다. 각 그릇의 바닥에는 작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도현은 숫자를 기록했다. 그가 그릇 하나를 들어 올리자 밑에 있던 종이가 바람도 없이 펄럭였다.
[정산 대상: 미납 구호 수혜자 혈족.]
[수거 방식: 명단 폐기 후 실물 회수.]
“이 사람들은 기록에서 지워진 순간 보호도 잃어버린 거군요.” 도현이 중얼거렸다.
그때 건물 뒤에서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도현이 등불을 끄고 창고 선반 뒤에 몸을 숨겼다. 검은 비옷을 입은 남자 둘이 나무 상자를 끌고 들어왔다. 상자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틈이 있었다.
“일곱 건 중 다섯 건만 확보하면 된다.” 한 남자가 말했다.
“나머지 둘은?”
“왕실에서 직접 처리하겠지. 이름 없는 수혜자가 최종 만찬에 섞여 있으면 계산이 어긋난다.”
브론이 입술을 벌렸지만 도현이 손바닥으로 막았다.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는 무장한 남자 둘과 싸워야 했다. 남자들은 창고 구석의 가죽 끈을 확인한 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바퀴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둘은 움직였다.
“아이들이 이곳에 갇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아직 아닙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모아 올 계획일 수도 있어요.”
도현은 방금 들은 말을 장부에 적었다. ‘다섯 건만 확보’.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으로도 정산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일까. 숫자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작은 오차를 피하려 할 텐데, 왜 일부를 빠뜨려도 된다고 했을까.
브론이 수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토마 냄새가 납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두 골목.”
두 사람은 낮은 담을 넘어 옛 노동자 숙소로 갔다. 벽돌집들은 습기에 검게 물들어 있었고 창에는 헝겊이 매달려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토마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나왔다.
“아저씨?”
“쉿. 미나는?”
“자고 있어요. 왜 오셨어요?”
도현은 집 안의 사람들을 확인했다. 낮에 왔던 일곱 명이 모두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의 낡은 이불을 덮고 있었고 어른들은 돌난로 옆에서 상처 난 손을 말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끌려간 사람은 없었다. 그는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있으면 위험할 수 있어. 배급표를 누가 가져가려 한다든지, 왕실 사람이 밤중에 부르면 절대로 따라가지 마.”
한 어른이 물었다.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요? 우린 값을 낼 수 없소.”
도현은 그를 향해 낮게 답했다.
“오늘 먹은 밥값이 아니라, 잘못된 장부 때문에 누가 사라지는지 확인하러 온 겁니다.”
그들은 당장 식당으로 옮기기로 했다. 여덟 명이 지나는 것보다 일곱 명을 안전하게 데려가는 일이 더 어려웠다. 미나는 졸린 눈으로 도현의 앞치마를 잡고 걸었다. 골목이 꺾일 때마다 브론이 앞서 나가 냄새를 확인했다. 뒤쪽에서는 도현이 가장 늦게 걷는 노인의 팔을 받쳤다.
노동자 숙소를 나서기 전, 도현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라고 했다. 젖은 옷은 식당에서 말릴 수 있지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낡은 기록은 나중에 다시 구하기 어려웠다. 가족들은 작은 상자 하나에 그릇과 사진 대신 낡은 천 조각을 넣었다. 이 세계에서는 초상화를 남길 돈조차 없는 집이 많았다.
미나가 이불 사이에서 종이 조각 하나를 꺼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미나의 키’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아빠가 벽에 적어 준 건데 이사 가면 없어져요.”
“그럼 가져가자.” 도현이 말했다.
“이런 것도요?”
“네가 자랐다는 기록이잖아. 중요한 거지.”
토마는 여동생의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도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진도, 연락처도, 작은 지갑조차 없었다. 기억을 잃는 저주가 두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남이 증명해 줄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잃어버리기 쉬웠다.
어른들은 몸이 불편한 사람을 가운데 세웠다. 브론이 가장 앞에서 경로를 확인했고 도현은 뒤에서 모두의 발걸음이 따라오는지 살폈다. 남쪽 수로를 건너면 식당까지 오래 걷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사람 일곱을 이동시키는 동안 어두운 골목은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중간쯤 갔을 때 수로 위에서 종소리가 났다. 작은 배 한 척이 다리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돛이 없었지만 뱃머리의 빨간 천이 비에 젖어 선명했다. 브론은 곧바로 모두를 벽 뒤로 물렸다.
검은 비옷의 남자들이 배에서 내렸다. 한 명이 장부를 펼치자 일곱 사람의 이름이 붉은빛으로 떠올랐다.
“수거 대상이 이동하고 있다. 마지막 한 숟갈 쪽이다.”
도현은 등불을 가렸다. 어떻게 도망쳐도 추적하는 명단이 있다면 숨어도 소용없다. 그가 떠올린 것은 조금 전 식당에서 자신이 적은 장부였다. ‘추가 채권 없음’. 시스템이 인정한 기록이었다.
“토마, 낮에 보여 준 배급표 기억하지?”
“네.”
“그 종이를 다시 줄 수 있니?”
토마는 외투 안쪽에서 접힌 표를 꺼냈다. 도현은 그 위에 자신의 이름과 오늘 무료 식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한 줄을 덧붙였다.
[본 식사는 이전 배급 채무와 무관함.]
주변의 공기가 순간 차갑게 내려앉았다. 다리 위의 남자가 장부를 펴고 다시 확인했다.
“이상한데. 추적 표식이 두 개야.”
“어느 쪽을 따라가죠?”
“옛 배급 기록이랑 새로운 식사 기록이 겹쳤어. 누구 장부가 우선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들이 망설이는 동안 브론이 사람들을 뒤 골목으로 이끌었다. 도현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길을 돌아 나왔다. 간단한 한 줄로 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 분의 시간을 벌었다.
식당 문이 열리고 모두 안으로 들어왔을 때, 에스텔은 이미 큰 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마른 담요를 나눠 주고 가게 뒤편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브론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주방장님. 왜 그 사람들이 우리 장부를 보더니 멈춘 겁니까?”
“새로운 거래가 생겼으니 어느 기록이 유효한지 확인해야 했겠죠.”
“그럼 나중에는 다시 찾아오겠네요.”
“네. 그 전에 원본 장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도현은 작업대에 젖은 배급표를 펼쳤다. 붉은 도장 아래에 옅은 회색 글씨가 있었다. 낮에는 비가 묻어 보이지 않던 문장이었다.
[폐기 처리 승인자: 왕실 구호위원회 재정 대리인.]
[서명: 제7조리실 책임 요리사 레온.]
그는 그 서명을 한참 들여다봤다. 레온은 이미 오래전 갇힌 사람이었다. 그런데 글씨는 빗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새 잉크로 적혀 있었다.
“이건…”
에스텔이 도현의 손을 잡았다.
“그 이름을 믿지 마.”
“왜죠?”
마녀는 종이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떨었다.
“레온은 다른 사람의 배고픔을 장부에서 지우는 사람이 아니었어.”
도현은 다시 서명을 살폈다. 이름은 같았지만, 쇠숟가락에 새겨진 홈을 따라 나타난 글씨와 모양이 달랐다.
누군가 갇힌 요리사의 이름으로 지금도 사람들을 폐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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