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은 생각보다 빨리 차올랐다.
처음에는 작업화 밑창이 젖는 정도였다. 그러나 물소리가 굵어지자 발목에서 종아리까지 순식간에 올라왔다. 브론은 카르노를 부축했고, 에스텔은 방 안에서 약하게 빛나는 병들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선반에 보호막을 쳤다. 미라는 선반 사이를 오가며 오래된 표식을 찾아냈다.
“수문을 열면 이 방의 병이 전부 쓸려 나갑니다.”
“그럼 지금 모두 들고 가면 되나요?” 브론이 외쳤다.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떤 병은 사람이 남긴 진짜 말이고, 어떤 병은 나중에 조작된 기록일 수 있어요. 섞어서 가져가면 구분을 못 합니다.”
“지금 물이 차는데 그걸 다 구분하자는 겁니까?”
“아니요. 구분할 수 없다는 상태 그대로 봉인합시다.”
그는 도르센에게 왕실 기록 봉인지가 있는지 물었다. 도르센은 방수 마법이 걸린 서류 봉투 여섯 장을 내놓았다. 카르노에게는 납판의 날짜가 남아 있는 면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고, 미라에게는 증언 조리대의 작동 순서를 그림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이걸 전부 옮기지는 못해도, 어떤 위치에 어떤 기록이 있었는지는 남길 수 있습니다.”
에스텔이 작은 마법 빛을 띄웠다. 선반의 배열이 벽면에 그림자로 찍혔다. 도현은 그림자와 실제 위치를 대조하며 번호를 적었다. 브론이 높은 선반에 손을 뻗었고, 도르센은 막혀 있던 배수관의 위치를 찾아냈다.
물속에서는 돌가루가 떠올랐다. 화덕에서 묻혀 온 밀가루 가루가 도현의 앞치마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오래전 제1화덕에서 쓰던 열감응 잉크는 단순히 불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낮은 열과 습기가 함께 있을 때 아래층의 문자가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병에 적힌 글씨가 여러 겹일 수 있습니다.”
“지금 또 요리할 생각이야?” 에스텔이 물었다.
“아뇨. 이번에는 기록을 상하게 하지 않을 온도만 찾을 겁니다.”
도현은 작은 냄비에 데운 물을 담았다. 증기가 아주 조금 올라왔다. 도르센이 제공한 보호유리 위에 병 하나를 놓고, 직접 열이 닿지 않게 부드러운 김만 쐬었다. 에스텔은 마력으로 유리가 흔들리지 않게 붙잡았다.
병 바닥에는 처음에 한 줄의 글만 있었다.
[배급 수령 확인.]
잠시 뒤 그 아래로 더 오래된 글씨가 나타났다.
[식사 미수령. 대체 서명 거부.]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이걸 덮어쓴 거군요!”
“그렇게 보입니다. 다만 누가 덮었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해요.”
도르센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보호유리의 표면을 살피더니 왕실에서 쓰는 덧씌우기 인장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접 사용한 적은 없지만 교육받을 때 배운 표식과 같다는 것이었다. 도현은 그의 진술도 기록했다.
증기를 받은 병은 곧 다시 원래의 글자만 보여 주었다. 그러나 에스텔이 만든 기록 그림에는 두 겹의 문장이 각각 남았다. 같은 병을 손대지 않고 확인할 수 있도록 순서를 적었고, 도르센은 그 옆에 자기 직위와 날짜를 기재했다.
수조에서 두 번째 충격이 울렸다. 벽이 흔들리며 선반 하나가 무너졌다. 브론이 뛰어들어 병을 받았지만 오른팔에 긴 상처가 났다. 피가 물에 섞였다.
“브론 씨!”
“병은 안 깨졌습니다!”
“그 얘기를 묻는 게 아니잖아요!” 도현이 소리쳤다.
그는 붕대를 꺼냈다. 에스텔이 상처를 씻고 압박한 뒤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했다. 브론은 아픈 팔을 감추려 했지만 도현이 먼저 알아챘다.
“여기서 더 다치면 병이 아니라 사람을 옮겨야 합니다. 그게 우선입니다.”
브론이 코를 찡긋했다. “이럴 때는 제가 혼나도 말대꾸를 못 하겠네요.”
“말대꾸는 돌아가서 하세요.”
도현은 병 하나를 고른 뒤 모든 사람에게 같은 실험을 보여 주었다. 병을 두 손으로 만지지 않고 집게로 옮긴 뒤, 차가운 유리와 따뜻한 유리 위에서 글씨가 다르게 보이는지 비교했다. 에스텔은 두 유리의 온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도록 마법으로 조절했고, 도르센은 자신의 기록실에서 사용하던 작은 온도계를 꺼냈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도현이 그릇에 담긴 물을 천천히 식히자 글자의 가장자리에 옅은 그림자가 생겼다. 그 그림자는 이전에 확인한 '미수령' 문장을 따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본래 문장을 벽지처럼 덮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아래층이 비쳐 나온 것 같았다.
“사진을 남길 수 있는 마법은 없습니까?” 브론이 물었다.
“그림자를 베끼는 마법이라면 있어.” 에스텔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아무나 원하는 말을 만들어 넣었다고 우길 수 있어.”
“그럼 제가 입회하겠습니다.” 도르센이 대답했다. “저는 방금 같은 병을 옮겨 다른 유리 위에 놓는 걸 봤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병이 바뀌지 않았다는 건 말할 수 있습니다.”
카르노는 자신의 납판을 가리켰다. “병에 적힌 말이 내 것인지 모르겠지만, 납판 날짜와 맞는 부분은 직접 증언하겠소.”
도현은 서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을 억지로 메우지 않았다. 도르센은 병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카르노는 자신의 출입을, 에스텔은 마법으로 복제한 그림자의 상태를 각각 적었다. 그 기록을 한 장으로 합치더라도 각 사람이 직접 본 범위만 남게 했다.
“이렇게 하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브론이 말했다.
“그래도 나중에 누가 의심하면 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죠.”
그들이 기록하는 사이 미라는 옛날 왕실 조사관들이 하던 말을 기억해 냈다. '시간이 없으니 우선 결론부터 적자.' 그 말 뒤에는 늘 누군가의 빈 그릇과 빈칸이 남았다. 오늘은 물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이 사람들이 먼저 결론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미라는 그 모습을 보며 오래전 자신이 포기했던 일을 누군가 다시 시작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우선 여섯 개 봉투에 출입 증거, 조작 흔적이 확인된 병의 사본, 왕실 명령서를 나누어 넣었다. 열여섯 칸의 전체 목록도 별도로 적었다. 미라는 자신이 접촉한 병을 순서대로 말했다. 그것이 진짜 인간의 증언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까지 함께 남겼다.
카르노가 문으로 이동하는 동안 브론이 뒤쪽의 밧줄을 다시 확인했다. 그는 한쪽 팔이 아팠지만 다친 부위로 무리하게 힘을 주지 않고 다른 손으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도현은 길이 미끄러운 곳에 물에 젖지 않은 천을 깔았다. 에스텔은 물길을 완전히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좁은 통로에서 물을 한꺼번에 밀어내면 반대편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
“미라 씨, 원래 출입 선반은 물속에서도 작동합니까?” 도현이 물었다.
“작동할 거야. 다만 문이 닫히면 나한테 말을 걸려는 사람은 오래 기다려야 해.”
“그럼 우리가 남기는 경고문도 그 선반에 붙이죠. 다음 사람은 문에 이름을 말하지 않도록요.”
그들은 입구 쪽에 나무판을 고정하고, 강제로 출입을 요구하는 장치가 있다는 설명을 적었다. 브론은 글을 모르는 사람도 알아볼 수 있도록 입 모양과 금지 표시를 그렸다. 카르노는 광산 안에서 물이 차올랐을 때 빠져나올 수 있는 높은 통로를 손으로 표시했다.
마지막으로 도르센이 확인했다. “이 길은 관리 도면에서 폐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직접 통행했습니다.”
“그렇게 적어 주세요. 다음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미라의 윤곽이 조금 짙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군가 다시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도현은 그녀에게 반드시 구해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바깥으로 나가면 오늘 확인한 위치와 상태를 정확히 기록하겠다고 약속했다.
도르센은 수문 손잡이에 다가갔다. 물이 허리 아래까지 차오르기 직전이었다.
“지금 열면 입구 쪽은 살지만 안쪽은 닫힙니다.”
“당신은 나갈 수 있습니까?” 도현이 미라에게 물었다.
미라는 문 너머를 잠시 바라보았다. “나는 이 방과 함께 남는 기록이야. 지금까지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은 없어.”
“그렇다고 영원히 못 나간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미라가 웃었다.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구나.”
도현은 미라의 동의를 확인하고 계량 그릇을 서랍에 돌려놓았다. 다음에 누군가 돌아와 기록을 검증할 수 있도록 원래 위치와 임시 봉인 방법을 함께 남겼다. 그릇은 세른의 유품일 수 있었지만 도현이 자기 것처럼 들고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줄기가 쏟아졌다. 도르센이 수문을 돌렸고 브론은 카르노를 등에 업은 채 먼저 입구로 향했다. 에스텔과 도현이 뒤를 따르자 무거운 쇠문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검은 냄비가 저절로 움직였다. 벽에서 뻗은 빛줄기가 도현의 손목을 향했다.
[확인되지 않은 수령 기록을 증언자에게 일괄 이전합니다.]
도현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들이 막으려던 것과 같은 방식이 마지막에 다시 작동한 것이다.
“지금 이름을 댈 필요 없습니다!” 그가 소리쳤다. “저는 기록을 받겠다고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빛줄기는 멈칫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문밖으로 나가는 길은 얼마 남지 않았다. 에스텔이 도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말로 막을 시간이 없어!”
도현은 마지막으로 미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선반 앞에서 한 손을 들고 있었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해.”
그녀의 목소리가 물소리를 뚫고 울렸다.
“나는 이곳의 문지기였지만, 누구의 대리 수령인도 아니었다!”
냄비가 크게 울렸다. 문틈의 흰 실들이 일제히 느슨해졌다. 일행은 닫히는 문 아래로 몸을 낮추어 빠져나왔다.
쇠문이 닫힌 뒤에도, 안쪽에서 미라가 불렀던 짧은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 희미하게 들렸다.
제13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