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냄비의 금은 아침까지 닫히지 않았다.
그 틈에서 희미한 향기가 새어 나왔다. 버터를 녹인 냄새였다가 된장 같은 구수함으로 바뀌고, 마지막에는 어린 시절 주방에 걸어 둔 마른 미역 냄새가 났다. 도현은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이세계에 온 뒤 잃어버린 기억이 냄비 안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뭐가 보이니?” 에스텔이 물었다.
“어릴 때 먹던 국의 향이 납니다.”
“여기서는 그런 재료를 쓴 적이 없는데.”
“그래서 더 이상해요.”
미라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냄비는 증언뿐 아니라 사람이 가장 믿고 싶은 감각도 불러내. 기록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미끼야.”
도현은 눈을 감았다. 기억 저주가 처음 옮겨 왔던 날, 꿀이 든 빵을 먹은 소녀는 어머니의 이름을 떠올렸다. 대신 도현은 자기 어머니가 끓여 주던 미역국의 맛을 잃었다. 얼마 전 검은 시럽을 보았을 때도 그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는 유혹이 있었다. 이제는 냄비가 같은 틈을 노리는 것이었다.
“제 기억을 돌려줄 수 있습니까?”
미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떤 기억처럼 느끼게 할 수는 있어. 네가 잃어버린 바로 그것인지는 몰라.”
“그건 다른 얘기죠.”
“그래. 아주 다른 얘기지.”
브론은 억지로 밝게 웃었다. “주방장님, 기억이 없어도 저는 냄새를 맡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수프를 매번 맛보라는 건 좀 곤란한데.”
“왜요?”
“자꾸 먹다 보니 저도 가끔 손님처럼 계산서를 받을 것 같아서요.”
도현은 작게 웃었다. 그러나 냄비에서 피어오른 향기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골동품 주방 문을 열기 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먹었던 식사의 장면이 아주 잠깐 떠올랐다. 어머니가 등을 보이며 무언가를 젓고 있었다. 도현은 그 기억이 진짜인지, 냄비가 만든 그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에스텔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고 조리대에서 두 걸음 물러났다. 눈앞의 향기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멈추어야 했다. 자신이 먼저 믿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장치가 파고드는 틈일 수 있었다.
“지금 저 냄비를 열면 어떤 기록이 생깁니까?”
미라가 대답했다. “보통은 이런 식이야. '방문자가 보존된 기억을 수령했다.' 그러면 그 대가로 다른 감각이 청구돼.”
“수령하지 않았다면요?”
“그것도 제대로 기록된 적은 거의 없어.”
도현은 작은 나무판에 두 문장을 써 보였다.
[냄비에서 기억으로 추정되는 감각을 제시함.]
[방문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며 수령에 동의하지 않음.]
“이대로 기록할 수 있습니까?”
미라는 나무판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 보자.”
그들이 증언 조리대에 나무판을 넣자 검은 냄비가 끓는 소리를 냈다. 불도 물도 없었는데 뚜껑이 들썩였다. 벽에 걸린 병들이 잇달아 떨렸다. 누군가가 오래전 남긴 반대 의견이 소리 없이 공중에 퍼지는 듯했다.
[수령 불인정. 대가 청구 보류.]
에스텔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현의 손목에서는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수령을 거부한다고 기존의 기억 저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픈 손을 앞치마 안으로 감추려다 멈추고 브론에게 보여 주었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다음부터 손이 이렇게 굳으면 칼은 제가 잡겠습니다.” 브론이 말했다.
“칼을 맡기기 전에 도마에서 양파 써는 연습부터 하셔야죠.”
“아니, 또 교육입니까?”
미라의 희미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 모습에 에스텔이 오래전 기억 하나를 끌어올렸다. 세른의 주방에서 미라는 도마를 씻을 때마다 늘 같은 노래를 불렀다. 주방을 정리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그릇을 세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사람이 일을 시작할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이라는 노래였다.
에스텔은 조심스럽게 그 노래 첫 구절을 불렀다. 미라는 두 번째 구절을 받았다. 둘의 목소리가 잠깐 겹치자 병 하나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 노래를 언제 배웠어?” 미라가 물었다.
“네가 가르쳐 줬어.”
“기억하는구나.”
“다 기억하진 못해. 하지만 이건 남았어.”
도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눈앞의 미라가 사람이 아닌 흔적일지라도, 에스텔에게 이 만남이 진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 기록을 부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도현은 낮 동안 자신의 기억을 확인할 작은 시험을 했다. 방금 끓였던 콩수프의 재료를 수첩에 적고, 잠시 뒤 같은 질문에 기억만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양파, 콩, 소금, 물. 처음에는 쉽게 기억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어떤 순서로 넣었는지 확신이 없어졌다.
“이건 저주 때문일까요, 제가 지쳐서일까요?” 그가 물었다.
에스텔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둘 다 가능해. 지금은 구분할 수 없어.”
“그럼 수첩에 남겨야겠네요.”
브론이 작은 줄을 그으며 말했다. “저는 콩을 두 번 더 먹었다는 것도 기록해 주십시오. 자꾸 맛을 보라고 하셔서요.”
“자발적 시식으로 하죠.”
“아니, 적어도 그 부분은 업무였습니다.”
짧은 웃음이 지나갔다. 도현은 같은 기록을 에스텔에게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이 각각 기억하는 조리 순서를 비교하니 자신이 착각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자신은 예전에 들었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더 자주 멈칫했다.
그는 마음속에서 미역국의 향을 좇았다. 한국의 부엌은 좁았고 겨울이면 창문에 김이 맺혔다. 자신이 들고 있던 그릇의 색은 기억났지만 어머니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는 흐렸다. 지금 나타나는 장면이 정말 있었던 순간인지 상상으로 채운 부분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돌아가면 제가 만든 음식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누구에게?”
“어머니요. 요리를 배우고 나서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가서 밥을 먹기만 했어요. 제 음식을 제대로 만들어 드린 적이 드뭅니다.”
에스텔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찾아보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찾아보자는 거야. 없다고 정해 놓는 것보다는 낫지.”
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스텔은 자신의 과거와 세른의 행방 때문에 더 큰 두려움을 품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그리움을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수첩의 빈 칸에 짧게 적었다.
[잃어버린 맛을 찾기 위해, 누군가의 증언을 대신 수령하지 않는다.]
그때 손끝에 남았던 냄비의 향기가 희미해졌다. 도현은 아쉬웠지만 미련을 따라 손을 뻗지는 않았다.
오후에는 카르노가 광산의 오래된 지급 방식을 설명했다. 광부들은 교대를 마치면 작업량을 적은 납판을 받아 나왔다. 음식은 그날 준비된 분량만큼만 나누었고, 부족한 날에는 서로 부족분을 확인했다. 어느 날부터 왕실 서기관들이 그 빈칸을 '미래 수령'이라 불렀다.
“그 사람들은 종이를 들고 와서 내 아내가 내일 받을 빵을 오늘 미리 계산했소.” 카르노가 말했다. “아내는 이미 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도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기록을 간단히 고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 한 명의 채무 뒤에는 누군가가 굶었던 하루가 남아 있었다. 그날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빵을 실제로 받았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날 밤 미라는 도현에게 가장 깊은 선반의 작은 병을 보여 주었다. 붉은 실로 세 번 묶인 병이었다. '왕이 먹지 않은 첫 빵'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이 병을 보면 네가 잃은 맛도 다시 떠오를 수 있어.” 미라가 말했다.
도현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대답했다.
“제 기억부터 찾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증언을 대가로 받아서도 안 되죠.”
그는 병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자 병 아래쪽에서 작게 긁힌 글자가 드러났다.
[최초 거절자의 원음은 별도 보관. 제2저장고에는 복제본만 있음.]
복제본. 누군가가 진짜 목소리와 가공된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에스텔은 병 바닥을 살폈다.
“세른이라면 원음을 함부로 여기 두지 않았을 거야.”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는 진실을 꺼내는 대신, 거짓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부터 밝혀야겠네요.”
제1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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