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량 그릇 안쪽에는 숟가락으로 긁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굵은 선 둘, 가는 선 하나. 에스텔은 그 모양을 보고 오래된 조리대 앞에서 세른에게 혼나던 날을 떠올렸다. 눈대중으로 밀가루를 덜어 썼다가 반죽이 망하자, 세른은 정확한 양을 재지 않았다고 혼내지 않았다. 무엇을 넣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면 다음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른은 수치를 속이지 말라고 했어.” 에스텔이 중얼거렸다. “정확하지 않으면 정확하지 않다고 적으라고.”
도현은 금속 그릇을 문 앞에 내밀었다.
“안에 계신 분, 이름은 묻지 않겠습니다. 혹시 나가고 싶으십니까?”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나.”
“그렇다면 당신이 돌아올 때 써야 할 길도 확인하겠습니다.”
브론은 폐광 입구까지 밧줄을 다시 살폈다. 카르노는 자신의 납판 사본을 꺼내 퇴출 날짜가 아직 보이는지 확인했다. 에스텔은 바닥과 벽면에 남은 마법의 흔적을 읽었다. 여러 사람이 각자 준비하는 동안 도현은 식판 선반을 닦았다. 오래된 기름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쇠를 부드럽게 미는 데 쓰던 기름이었다. 누군가 문을 닫아도 음식을 건네는 길만은 남겨 두려 했던 흔적이었다.
“문을 부수면 안 됩니까?” 브론이 물었다.
“안에 사람이 있다면 다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갱도 지지대를 건드릴지도 몰라요.”
“그럼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요?”
“문을 만든 사람의 규칙을 찾아보죠.”
도현은 계량 그릇 바닥과 식판 홈의 모양이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릇을 홈에 끼우자 금속이 정확히 맞물렸다. 문에 있던 [이름 제출] 문구가 잠시 흔들렸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새로 나타났다.
[방문자가 출입을 원하지 않을 경우, 증언 열람만 허용한다.]
“이게 원래 있었던 조항인가?” 에스텔이 물었다.
“지워지지 않게 아래에 새겨 놓았네요.”
도현은 브론에게 거절 의사를 직접 말하게 했다. 브론은 숨을 고른 뒤 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여기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제 이름을 다른 사람의 빚에 쓰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문이 즉시 대답했다.
[후보명 브론. 방문 철회 확인.]
그의 발목에서 흰 실이 끊어졌다. 늑대인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이름이 이렇게 귀한 건 줄 처음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장난으로라도 문에 대고 말하지 마요.” 도현이 말했다.
“방금 배웠습니다. 대신 입구에 이름 부르기 금지라고 적겠습니다.”
방문 철회가 가능한 길이 확인되자 문이 반쯤 열렸다. 안쪽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저장고라고 부르기엔 빈 곳이었다. 천장에는 누렇게 변한 그물망이 걸려 있었고 벽마다 선반이 촘촘했다. 선반에는 곡식 자루 대신 뚜껑이 닫힌 도자기병들이 놓여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의자 하나가 있었다. 의자 위에 회색 앞치마를 두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새하얗고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했다. 몸의 윤곽이 유리등의 빛에 따라 흐려졌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움직여야 했지만 그 여자의 가슴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입니까?” 브론이 아주 작게 물었다.
“지금은 그렇게 부르기 어렵겠네.” 여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사람이었던 적은 있어.”
그녀의 이름은 미라였다. 세른이 맡겨 두었던 제2저장고의 마지막 문지기. 처음 이곳에서 일할 때는 부엌 일을 하던 평범한 조력자였다고 했다. 어느 겨울 왕실 관리들이 출입 기록을 식사 채무 명부로 바꾸면서 문 안에 남겨졌다. 몸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마지막으로 열고 닫았던 문과 연결된 증언만 남았다.
도현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수첩에 적었다. 미라 자신이 그렇게 주장한다는 사실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구분했다. 아직 몸이 어디로 갔는지, 언제 죽었는지, 누가 기록을 유지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서 뭘 지키셨습니까?”
“이름이야. 아니, 원래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으로 증언했다는 사실을 지켰지.”
미라의 의자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나려 하면 다리 아래 그림자가 늘어나 의자를 다시 붙잡았다. 에스텔은 한때 주방에서 쓰던 고정 마법과 비슷하다고 했다. 뜨거운 솥이 넘어지지 않도록 조리대를 붙드는 주문이었다.
“그 주문을 사람한테 썼다고?” 에스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에는 내가 원했어.” 미라가 말했다. “누군가 오는 동안 문을 지키겠다고 했거든. 다만 내가 떠날 수 없을 만큼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
“그건 떠나지 않겠다고 동의한 것이 아니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미라는 입술을 움직였다. “너희 시대에는 그런 차이를 말할 수 있나 보구나.”
벽 옆에는 접시 세 장이 쌓여 있었다. 하나는 유약이 반짝였고 다른 하나는 거칠었으며 마지막 접시에는 금이 가 있었다. 미라는 그것들이 어느 겨울 아이들에게 음식을 내던 접시라고 설명했다. 접시마다 다른 식감을 느끼게 하려는 배려가 아니라, 가진 물건을 모아 함께 사용하던 흔적이라고 했다.
에스텔은 금이 간 접시를 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내가 떨어뜨렸던 거야.”
“알아. 네가 울면서 숨기려고 했지.”
에스텔은 잠시 말을 잊었다. 기억 속에서 세른은 깨진 접시를 보고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금이 간 접시는 뜨거운 수프를 담으면 더 깨질 수 있으니 차가운 과일만 담자고 말했다. 그 기억은 수십 년 동안 다른 수많은 사건 사이에 묻혀 있었다.
“그날 내가 접시를 버리지 않았구나.”
“왜 버리겠어? 쓸 수 있는 게 남았는데.”
에스텔은 웃었다가 금세 표정을 가라앉혔다. 작은 물건 하나가 오래된 말을 되살릴 수 있다면, 저 병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적어 줘. 미라가 기억하는 것과 내가 기억하는 게 같은 접시의 일이라고.”
“정말 같은 날인지는 나중에 확인해야겠지만, 두 분이 그렇게 말한 건 남기겠습니다.”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을 없애기보다 나란히 두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듯했다.
미라는 도자기병 하나를 가리켰다. 병 바닥에는 납판처럼 작은 표식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서는 누군가 수프를 달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병에서는 기침 소리가 났고, 또 다른 병에서는 '받은 적 없다'는 외침이 들렸다.
“이것들이 실종된 요리사들인가요?” 브론이 물었다.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 남은 건 목소리니까.”
도현은 그 말을 다시 한번 적었다. **목소리와 사람의 생사는 별개다.** 누군가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고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할 수도 없고, 오늘 날짜가 찍혔다고 지금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도현은 방 입구의 낡은 경첩도 눈여겨보았다. 경첩에는 누군가 안쪽에서 손톱으로 긁은 흔적이 있었다. 문이 닫힌 다음 손을 뻗을 수 있는 위치였다. 미라는 다른 사람이 남긴 흔적이라고 했지만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한 사람의 행방을 알아내기에는 부족한 증거였다.
“그래도 이런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중요하겠죠.” 브론이 말했다.
도현은 경첩의 높이와 손톱 자국이 난 방향을 수첩에 그렸다. 선반의 목소리가 어디서 재생되든, 이 흔적은 실제 물건에 남아 있었다. 그 둘을 함부로 하나의 사건으로 묶지 않기로 했다.
“그때 누가 이 문을 잡았는지, 언젠가 알 수 있을까요?”
“알아보려는 사람이 있으니 가능성은 남아 있지.” 미라가 대답했다. 그녀의 어조에는 오래된 기다림과,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시간의 외로움이 함께 묻어났다.
미라는 선반 아래의 작은 탁자를 가리켰다.
“세른이 여길 떠나기 전에 한 병을 따로 감췄어. 왕의 것이 아니라, 첫 빵을 거절한 사람의 증언이라고 했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못 열게 했어.”
“왜요?”
미라의 흐릿한 얼굴이 처음으로 슬퍼졌다.
“열면 그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말한 것으로 기록되거든.”
도현은 앞치마 끝을 쥐었다. 이 세계의 기록은 늘 누군가 말하지 않은 말을 대신 쓰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먹지 않은 식사를 먹었다고 적고, 원하지 않은 채무에 동의했다고 만들었다.
“그 병을 그대로 두고 진짜 증언만 분리해 낼 수 있겠습니까?”
미라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병 하나를 가리켰다.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려면 여기서 가장 위험한 물건을 먼저 열어야 해.”
선반 밑에 놓인 것은 자물쇠가 달린 상자가 아니었다.
낡은 조리대, 그리고 단 한 번도 불을 붙이지 않은 빈 냄비였다.
냄비 바깥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증언 조리대. 말하지 않은 말을 끓여 내는 곳.]
제13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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