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덕에서 가장 늦게 식은 것은 국물이 아니라 말이었다.
“안쪽 문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요구한다.”
브론은 제2저장고로 향하는 내내 그 문장을 입안에서 굴렸다. 어떤 이름을 요구하는지, 이름을 주면 무엇을 돌려주는지 알지 못했다. 정작 도현은 저장고가 있다는 옛 폐광보다 그 문구에 신경이 쓰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조사한 계약은 누군가의 이름을 기록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 먹지도 않은 식사의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르벤 관문을 지나자 눈길 대신 검은 자갈길이 시작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녹은 눈이 바퀴 자국을 따라 흘렀다. 길 양편에는 광부들이 한때 쓰던 침목이 썩어 가고 있었다. 낮은 곳의 눈은 더러웠고, 폐광의 굴뚝은 목이 잘린 돌기둥처럼 서 있었다.
유르다는 입구까지만 동행하겠다고 했다. 제1화덕에는 사람이 남아 있어야 했고, 식량을 배분하는 일도 끝나지 않았다. 도현은 그녀가 가져온 지도를 펼쳐 두 번 접었다. 위쪽에는 광산의 채굴 구역, 아래쪽에는 왕실이 지워 버린 배수 통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광산의 마지막 감독은 누구였습니까?”
“기록에는 세른이 닫았다고 적혀 있어요.” 유르다가 대답했다. “그런데 우리 조부는 다른 말을 했지. 세른은 문을 닫은 게 아니라 문 앞에 남아 있었다고.”
“그 차이가 크네요.”
“닫는 사람은 밖으로 나오지만, 남는 사람은 누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브론이 주둥이를 찡그렸다. “이야기를 꼭 이렇게 무섭게 하셔야겠습니까?”
“산에서는 무서워해야 살아남는 것도 있어요.”
동굴 어귀에는 나무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허가받은 자만 출입.] 그 아래에는 훨씬 오래된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들어간 사람을 세어라. 나온 사람도 세어라.] 도현은 나중 문구가 처음의 약속을 덮어쓴 것 같다고 느꼈다.
광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에는 음식을 파는 작은 가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기울어진 나무 지붕 아래 돌로 만든 계산대가 있었고, 그 뒤편에 빗물로 반쯤 지워진 가격표가 걸려 있었다. 죽 한 그릇에 동화 한 닢. 그 아래에는 사람이 급하게 긁어쓴 글자가 있었다. ‘값이 없으면 일을 마치고 주시오.’
“이때는 적어도 가격을 먼저 알려 줬군요.” 도현이 말했다.
카르노가 나중에 길을 안내하기 위해 남겨 둔 쪽지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광부들이 밥을 먹을 때마다 값을 직접 냈고, 얼마 뒤부터 임금에서 공제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일을 하지 않는 날에도 먹었다고 처리되었다. 가판을 운영하던 가족은 항의하다 쫓겨났다고 했다.
브론이 젖은 가격표를 조심스럽게 세웠다. “왜 이런 곳의 장부까지 남아 있을까요? 누구도 쓰지 않는 광산인데.”
“쓸모가 없어서 버려진 게 아니라, 누군가 다시 확인할 수 없도록 방치된 걸지도 모르죠.”
에스텔이 가판 뒤에서 오래된 통을 찾아냈다. 마른 소금과 돌처럼 굳은 보릿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도현은 뚜껑 안쪽을 만져 보았다. 소금에 젖은 나무에는 알 수 없는 손가락 자국들이 겹쳐 있었다. 물건은 사람의 대답을 대신하지 못했지만, 이곳에 실제로 식사를 만들던 부엌이 있었음을 알려 주었다.
“저 통은 가져갈까요?” 브론이 물었다.
“우선 위치만 남겨요. 누가 소유했는지 모르니까요.”
그들은 가판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고, 밖에 아직 남아 있는 바퀴 자국과 함께 기록했다. 도현은 이 일을 하며 자신이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다. 처음 식당에 왔을 때라면 오래된 재료를 보고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지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는 누가 재료를 준비하고, 누가 그 대가를 치렀는지부터 궁금했다.
브론이 낮게 웃었다. “예전엔 식당을 망하게 할 줄도 모르고 가격표도 없이 장사하신다고 소리치셨잖아요.”
“그때도 제가 옳았습니다.”
“지금은 가격표를 발견하니 더 심각해지시는군요.”
“숫자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리할 재료도 남지 않으니까요.”
유르다는 낡은 가판의 지붕을 다시 덮어 주었다. 굴에 들어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의 행동에 남아 있었다. 도현이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자신이 어릴 때 조부와 지났던 길이라 말했다. 산속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 하나쯤은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먼저 산소와 통풍을 확인했다. 브론은 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냄새를 맡았고, 에스텔은 불꽃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방향을 살폈다. 깊숙한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독한 기체의 냄새는 없었다. 그래도 도현은 일행을 한꺼번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안전하다고 단정하기 전에, 나갈 길부터 확보합시다.”
낡은 침목에 밧줄을 묶으려던 브론이 고개를 들었다.
“주방장님은 꼭 매번 제 할 일을 빼앗으시네요.”
“그럼 이번에는 브론 씨가 매듭을 확인해요. 저는 확인표를 적고요.”
에스텔은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사이 입구의 그림자를 살폈다. 검은 돌 표면에 왕궁의 인장과 같은 세 갈래 매듭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여기의 매듭은 묶여 있지 않았다. 한 가닥이 끝에서 풀려 있었다.
“이건 세른이 고친 표시야.” 에스텔이 말했다. “강제로 붙잡힌 사람도 풀려날 수 있어야 한다는 뜻.”
“그런 표시를 만들어 놓고 문은 왜 이름을 요구한 거죠?”
“그 문장을 세른이 썼다는 보장은 없어.”
굴 안쪽으로 서른 걸음쯤 들어갔을 때 쇠문이 나타났다. 문 한가운데에는 사람의 입만큼 작은 구멍이 있었다. 구멍 위에는 새것처럼 또렷한 글자가 박혀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제출하라.]
“여기가 제2저장고군요.” 브론이 중얼거렸다.
도현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문 아래쪽의 오래된 홈을 살폈다. 손바닥을 받치는 작은 선반이 달려 있었고, 그 위에는 식판을 밀어 넣을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광산 문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구조였다.
“처음에는 식사를 나르는 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사람 이름을 적은 뒤 식사를 줬겠지.” 에스텔이 낮게 대답했다.
브론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제 이름으로 열어 볼까요? 브론. 이 세계에서 흔하지 않은 이름인데.”
그 순간 입구에 놓은 쇠등에서 녹색 불꽃이 일었다. 에스텔이 늑대인간의 입을 급히 막았다.
문 표면에 문장이 떠올랐다.
[후보명 인식: 브론. 생존 확인 중.]
브론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도현은 그를 문 뒤로 끌어당겼다. 허공에서 가는 흰 실이 나타나 그의 그림자를 문까지 끌어가려 했다. 실은 발뒤꿈치에 닿았다가 팽팽해졌다.
“입으로 말한 것만으로?”
“등록될 가능성이 있어!” 에스텔이 외쳤다. “아무도 더는 이름 부르지 마!”
도현은 허리의 수첩을 꺼냈다. 남의 이름을 지우는 주문도, 문을 부수는 망치도 없었다. 그는 문 앞에 놓인 오래된 식판 하나를 들어 브론의 그림자와 흰 실 사이에 밀어 넣었다.
“이름을 말한 건 방문 의사를 표시한 게 아닙니다. 저 사람은 출입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흰 실이 잠시 멈췄다.
[방문 거절 사유 미기재.]
“사유는 없습니다. 그냥 원하지 않는 겁니다.”
도현이 식판에 손을 댔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왼손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석화 저주가 더 퍼진 듯 손끝이 뻣뻣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식판을 붙들었다.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로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잖아요.”
문 속에서 낮은 진동이 들렸다. 잠시 뒤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방문 불성립. 후보명 보류.]
흰 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브론의 발치에서 느슨해진 채 흔들렸다.
“보류라니요.” 브론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지운 게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문 앞에서부터 사실을 확인하자고 한 겁니다.”
에스텔이 오래된 선반을 쓸었다. 먼지 아래로 손톱으로 긁어 쓴 짧은 문구가 드러났다.
[들어올 사람에게 먼저 묻는다. 스스로 돌아갈 길을 아는가.]
도현은 그 글을 한참 바라보았다. 처음 만든 문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빼앗는 문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갈 사람이 무사히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질문의 순서를 바꿔 놓았다.
깊은 동굴에서 그릇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거칠게 숨을 내쉬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또 사람이 왔네.”
도현과 에스텔이 동시에 굳었다.
“여기서 이름을 주면 안 돼요.”
소리는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일수록 더더욱.”
제13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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