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의 왼손은 아침까지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구부리면 안쪽에서 돌이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상처가 난 것도 아니고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훨씬 무서운 증상이었다. 손을 쓸 수 없으면 요리를 할 수 없었다. 요리를 할 수 없으면 자신에게 남은 저주를 풀 방법을 찾는 일도 어려워진다.
에스텔은 작은 약병을 놓고 손목을 살폈다. “새 저주가 들어온 건 아니야. 원래 있던 석화가 반응한 거야.”
“왜요?”
“네 이름을 다른 사람이 강제로 쓰려고 해서일 수도 있어. 이전 요리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모르겠어.”
그 대답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에스텔의 눈 밑에는 밤새 잠들지 못한 흔적이 있었다. 도현은 그녀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동시에 모른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브론은 따뜻한 물을 담은 대야를 가져왔다. “손을 담그시면 조금 낫지 않을까요?”
“물 온도가 너무 높으면 안 됩니다.” 도현이 말했다.
브론이 얼른 손을 넣었다가 펄쩍 뛰었다. “앗, 뜨거워!”
“직원이 먼저 손을 넣어 봐서 다행이군요.”
“저는 실험용 직원입니까?”
“설거지 담당이기도 하고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도현은 웃음이 오래 가지 않았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둔했다. 마음속에서는 문득 어머니가 끓이던 미역국 생각이 났다. 정확히는 생각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맛의 빈자리였다. 기억 저주가 처음 들어왔을 때 잃었던 부분이었다.
그날 낮, 의전국에서 새 봉투가 도착했다.
봉투를 열기 전 도현은 자신의 기억을 수첩에 적었다.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면 누군가 멋대로 돌려주겠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그는 한국에서 일한 레스토랑의 이름과 처음 만들었던 요리, 도마의 무게, 바닷가에서 조개를 씻던 날의 추위를 하나씩 적었다. 기억나는 것은 적지 않았던 작은 실수들까지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미역국에 이르자 펜이 멈췄다. 젖은 미역을 볶는 소리, 밥솥의 김, 작은 주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 장면은 있었다. 하지만 맛을 묻는 칸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혀를 움직였다. 짠맛이라는 말은 알았지만, 그때의 국물이 얼마나 짰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맛은 모를 수 있죠.” 브론이 옆에서 말했다. “저도 태어나서 처음 먹은 고기 맛은 기억 못 합니다.”
“그런데 몇 살 때 먹었는지는 기억하세요?”
“전부는 아니지만 할머니가 주셨다는 건 알아요.”
도현은 펜을 내려놓았다. 저주가 빼앗은 것이 비단 감각 하나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떠올리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그 상실을 정확히 느낄 수 있다는 게 괴로웠다.
“그래서 저는 요리를 계속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잊지 않으려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누가 밥을 해 줬는지는 기억 안 나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밥을 해 줄 수는 있으니까요.”
브론은 그 말을 이해하려는 듯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컵에 물을 따라 도현 앞에 놓았다. “그럼 오늘 제가 준 물도 적어 주세요.”
“그것까지요?”
“네. 주방장님이 자꾸 기록하니까, 저도 오늘 한 일은 남기고 싶습니다.”
도현은 수첩 가장자리에 '브론이 물 한 잔을 건넸다'고 적었다. 그 순간에야 손끝이 조금 덜 떨렸다. 기록이 모든 기억을 지켜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거짓 기억과 진짜 있었던 일을 구분하는 표지는 될 수 있었다.
문 밖으로 검은 봉투를 든 전령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도현은 무슨 제안을 들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무엇을 잃었다고 느끼는지는 자기가 직접 적어 두었다. 봉투에는 검은 장갑을 낀 남자의 서명이 없었다. 대신 냄비 그림과 함께 '시식만으로 복구 가능한 기억'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백도현의 상실 기억 일부 보존.]
[제0식탁의 마지막 조리 참여 시 복구 가능.]
도현은 봉투를 한참 바라봤다. 종이를 찢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사실과 비슷해야 사람을 흔든다. 누군가 자신에게 남아 있는 가장 깊은 결핍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보여 달라고 한 적 없는 기억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에스텔이 봉투를 가져갔다. “발테르가 네 머릿속을 들여다봤을까?”
“저주 기록을 읽었겠죠. 제가 모르는 맛이 무엇인지도 알 테니까.”
그때 봉투에서 작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젖은 미역, 참기름, 쇠고기를 볶을 때 나는 구수한 향. 도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한국의 좁은 부엌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오래된 냄비가 끓고, 누군가 밥을 퍼 놓았다.
“도현!”
에스텔의 외침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손이 이미 봉투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검은 종이가 손가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그는 황급히 손을 빼고 봉투를 바닥에 던졌다.
“괜찮아?”
“조금만 더 있으면… 기억날 것 같았어요.”
도현은 거친 숨을 쉬었다. 자신이 얼마나 그 기억을 원했는지 새삼 알았다. 이세계에 떨어진 뒤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맛을 잃은 것은 한 가지 추억이 사라진 것 이상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 붙잡을 끈 하나가 끊긴 기분이었다.
에스텔은 봉투를 불태우려다 멈췄다. “증거로 남겨 두자. 다만 냄새가 퍼지지 않게 봉인할게.”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인지 확인할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또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일이어서는 안 됐다.
그날 오후 아일린이 찾아왔다. 그녀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발테르가 왕실 회의에 올린 제안서였다.
[최후 조리자는 개인적 상실분을 지급받을 수 있다.] [대가: 왕위 채무의 임시 수령 동의.]
“이건 보상처럼 보이게 만든 계약이군요.” 도현이 말했다.
“네. 그리고 저를 선택하게 할 방법도 비슷할 거예요. 제 저주를 풀어 주겠다는 대가로 왕실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넘기게 하겠죠.”
아일린은 창밖을 봤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손등에 있던 검은 왕관은 아직 살아 있었다. 왕위와 개인의 운명을 분리할 수 없다고 믿어 온 시간이 길었다.
“저는 왕위에서 물러날 수도 있습니다.”
도현은 곧바로 고개를 젓지 않았다. 공주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선택의 결과를 확인하지 않은 채 선언하면 발테르가 그 말을 이용할 수 있었다.
“물러나는 게 해결인지 먼저 봐야겠습니다. 계약에는 빈자리도 자동 승계한다고 적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때 손목이 다시 굳었다. 도현은 통증을 견디며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에스텔이 조심스럽게 손을 쓸어 내렸다.
“네가 손을 못 쓰면 내가 불을 피울게.”
“저는요?” 브론이 물었다.
“넌 설거지.”
“왜 항상 저입니까?”
도현은 웃으려다가 목이 메었다. 그들이 자신을 돕겠다는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는 아직 다음 요리를 해야 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저주가 옮겨가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저녁이 되자 그는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양파를 한 개 썰었다. 속도는 느렸고 모양도 고르지 않았다. 대신 에스텔이 옆에서 칼의 각도를 잡아 주었고, 브론이 도마를 붙들었다.
양파를 볶아 나온 향은 미역국과 전혀 달랐다.
도현은 맛을 확인하려고 작은 숟가락을 들었다. 양파의 단맛은 느껴졌지만 뒤따르는 향이 평소보다 약했다. 기억 저주 때문인지, 손목의 통증 탓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에스텔에게 같은 국물을 한 숟가락 건넸다.
“조금 탔어.” 그녀가 말했다.
“그렇군요. 저는 단맛만 느껴지는데.”
“그럼 양파를 다시 볶자. 아직 늦지 않았어.”
도현은 냄비를 비우며 잠깐 자존심이 상했다. 한국에서라면 누구보다 정확하게 불 조절을 하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료의 혀를 믿는 편이 옳았다. 그는 이번에는 불을 낮추고 팬을 조금 자주 흔들었다. 버릴 양파는 소량이었지만, 제대로 된 맛을 내고 싶다는 마음은 작지 않았다.
브론이 거들었다. “이번 것은 제가 먼저 냄새 맡아 볼게요.”
“냄새만 맡고 다 먹어 버리진 마세요.”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어제요.”
브론은 반박하지 못했다. 에스텔이 웃었고 도현도 따라 웃었다. 저주 때문에 할 수 없게 된 일이 늘어도, 그 빈자리를 메워 주는 사람들의 얼굴은 아직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도현을 조금 안심시켰다. 잃어버린 맛 하나가 자신을 전부 설명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 함께 만든 음식의 기억도 새롭게 쌓이고 있었다.
그 순간 서랍에 봉인해 둔 검은 봉투에서 또렷한 글자가 떠올랐다.
[보존 기억 반환 시한: 마지막 종.]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미수령 시, 원소유자의 현재 미각을 대신 징수.]
도현은 조용히 손을 멈췄다. 이 계약은 애초부터 선택이 아니었다. 받아도 잃고, 받지 않아도 잃게 만든 덫이었다.
제11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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