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봉투의 밀랍을 본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식당의 창가에 앉아 끈 세 가닥을 풀었다 묶기를 반복했다. 에스텔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도현은 봉투를 아이 앞에 들이밀지 않았다. 실물을 확인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먼저 그것을 보고 싶은지 물어야 했다.
“하나, 우리가 찾고 있는 표시하고 닮은 모양이 있어. 보고 싶니?”
아이는 손을 멈췄다. “그걸 보면 엄마 이름이 나와?”
“확실하지 않아.”
“그러면 조금만 보여 줘.”
도현은 봉투를 식탁에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하나는 금박이 거의 벗겨진 밀랍에 손가락을 대지 않고 눈으로만 보았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가 만든 거하고 다른데.”
“어떤 점이?”
“이 손바닥이 거꾸로야. 엄마는 작은 손을 받치려고 아래에 큰 손을 그렸어. 이건 큰 손이 작은 손을 덮어 버렸어.”
에스텔이 눈을 크게 떴다. 도현은 봉투를 다시 보았다. 한쪽은 보호를 뜻하는 모양, 다른 쪽은 붙잡아 두는 모양. 아주 작은 차이였다. 하지만 오래전 매듭의 방향이 하나의 기억을 바꾸지 못했듯, 그림의 방향에도 누군가의 선택이 남아 있었다.
“그걸 기록해도 될까?” 도현이 물었다.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본 건 그렇다고 적어 줘. 틀리면 나중에 고칠 수 있게.”
루카스는 아이의 표현 그대로 기록하고 그림 두 개를 따로 그렸다. 누구도 그 말만으로 원제공자를 찾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밀랍의 제작 연대와 사용처는 별도로 확인해야 했다.
그날 밤 아일린이 식당을 찾았다. 왕궁에서는 제0식탁의 봉인을 다음 종이 울리기 전에 다시 닫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왕실 의전국은 초대받은 도현이 원제공자의 인장을 제시하지 못하면 식사 의례를 강행하겠다고 통보했다.
“저는 시간을 더 얻고 싶어요.” 아일린이 말했다. “하지만 왕실이 저를 믿지 않습니다.”
도현은 가만히 국자를 닦았다. “시간을 얻기 위해 아무 손님이나 앉히는 건 안 됩니다.”
“알아요. 그렇다고 문이 닫히면 남은 기록도 잃을 수 있어요.”
에스텔이 부러진 주걱을 꺼냈다. “제0식탁의 접시에는 한 사람이 실제로 먹는 식사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건 강제 의례하고 다른 조건이야.”
“시험할 수 있을까요?” 도현이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가상 식사를 한 번이라도 정지시킨 적이 있으니 기록을 확인할 가능성은 있어.”
도현은 밤새 메뉴를 고민했다. 왕궁에서 지정한 일곱 음식은 만들 생각이 없었다. 제0식탁을 열기 위한 음식도 특별한 보물이 아니라 실제로 만들어진 한 그릇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없는 재료를 쓰지 않고, 저주를 옮길 위험을 최소화할 방법을 먼저 찾았다.
그는 보리를 씻고 양파와 무를 작게 썰었다. 소금은 벨로스에서 직접 값을 주고 산 것을 썼다. 끓는 물에는 볶은 양파를 천천히 넣었다. 화려한 마법 가루 대신 재료의 맛을 살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도현은 여러 번 맛을 보고 싶었지만, 기억 저주 때문에 감각이 불확실한 순간이 있었다. 에스텔에게 간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조금 싱거워.”
“그럼 소금을 더 넣을까요?”
“아주 조금. 그리고 오늘은 네가 못 느끼는 부분을 내가 확인할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뛰어난 요리사라는 자존심만 믿고 혼자 모든 걸 판단하는 대신, 확인되지 않는 맛은 동료에게 맡기는 것. 옛날에는 그런 일을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밤이 깊어 갈수록 도현은 화덕 앞을 떠나지 못했다. 수프 한 그릇으로 제0식탁의 기록이 열릴지 모른다는 기대보다, 음식이 다시 저주를 옮기는 통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그는 불을 줄이고 국자를 내려놓은 뒤 냄비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재료는 모두 실제 시장에서 값을 주고 산 것이었다. 보리의 알맹이는 골고루 익었고, 볶은 양파는 너무 짙어지지 않아 단맛을 남겼다. 무는 익으면 투명해지는 종류였다. 한국에서 먹던 무와 생김새는 달랐지만 뜨거운 국물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는 질감은 비슷했다.
“레온도 이런 걸 만들었을까?” 에스텔이 물었다.
“어떤 음식이었는지는 아직 모르죠.”
“그 사람은 가끔 맛보다 만드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 누가 불을 켜고 누가 껐는지, 국자를 건넨 사람이 누구인지까지 적었거든.”
도현은 냄비를 저으면서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레온의 세 번째 조리 원칙은 완성된 음식만 보지 말고 그것이 실제로 어떤 과정에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기적의 수프를 내놓았다고 주장할 때, 재료를 씻은 사람과 화덕에 불을 지핀 사람이 없다면 그 음식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럼 오늘은 각자 한 일을 적읍시다.” 도현이 말했다. “불은 제가 피웠고, 간은 에스텔 씨가 확인했죠. 소금은 브론이 시장에서 받아 왔고요.”
브론이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냈다. “그리고 제가 값을 더 많이 낼 뻔했습니다. 가게 주인이 저보고 늑대인간이라 소금을 더 먹을 것 같다고 했거든요.”
“그래서요?”
“제가 소금은 사람처럼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한 얼굴로 보더군요.”
에스텔이 작게 웃었다. 평소라면 짜증 났을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평범한 거래 하나가 얼마나 귀한지 모두 알았다. 왕궁의 주방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고도 요리했다고 적었지만, 이 작은 식당에서는 한 꼬집의 소금을 누가 샀는지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루카스는 밤늦게 들러 기록을 확인했다. 그는 실물과 문서의 차이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저주의 발동 조건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다만 실제로 식사를 제공한 사실이 어떤 계약을 무효화하는지는 아직 실험 전이었다.
“수프가 장부를 열더라도 그 한 그릇 이상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지 마세요.” 그가 경고했다.
도현은 웃었다. “그 말을 제가 먼저 하려고 했어요.”
그들은 수프를 담을 그릇도 따로 골랐다. 저주받은 그릇이나 왕실 문양이 붙은 접시는 피했다. 오래된 식당의 평범한 도자기 그릇을 끓는 물로 소독한 뒤 말렸다. 바닥에는 아무 문장도 없었고, 손으로 빚은 작은 흠집 하나만 남아 있었다.
에스텔이 그릇을 빛에 비춰 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그게 마음에 들어요.”
도현은 그릇에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다. 내일 누가 무엇을 증명할지는 그 음식이 스스로 말할 일이 아니었다. 식사하는 사람이 선택하고, 실제로 먹은 만큼만 남아야 했다.
아침이 되자 일행은 남쪽 별채로 내려갔다. 아일린은 왕실 경비대를 동행시켰지만 누구도 제0식탁에 서명하지 않도록 했다. 하나는 식당에 남았다. 아이가 원한다면 새로운 사실을 듣고 다시 판단할 수 있도록, 오늘의 실험 대상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결정이었다.
지하실 안에는 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전날 검은 물이 차올랐던 그릇은 안전하게 봉인된 채 옆으로 옮겨져 있었다. 도현은 직접 만든 보리 수프를 새 그릇에 담았다. 그는 기록 담당 루카스와 경비대장을 불러 식재료의 구입 내역과 실제 조리 과정을 확인받았다.
“이걸 먹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일린이 물었다.
도현은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이 식사는 제가 저 자신에게 내는 겁니다. 누구도 대신 먹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값도 청구하지 않습니다.”
에스텔이 표정을 굳혔다. “도현, 새 저주가 옮겨 올 수도 있어.”
“그래서 먼저 접시가 반응하는지만 확인합시다. 반응이 위험하면 먹지 않을 거예요.”
그는 손을 내려놓고 한참 기다렸다. 새 그릇의 표면에는 아무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검은 물도 없었다. 반면 돌판 아래의 오래된 장부가 조용히 떨리기 시작했다.
[식재료의 실물 확인 완료.]
[조리 완료 시각: 기록됨.]
[강제 대리 수령인: 없음.]
도현은 루카스에게 문장을 기록하게 하고 수프를 한 숟가락 떠 들었다. 아주 천천히 입에 넣었다. 따뜻한 보리의 향이 퍼졌다. 그는 잠깐 어린 시절의 어느 식탁을 떠올렸지만 자세한 모습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글펐으나 오늘은 이 맛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식탁의 돌판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숨겨진 장부의 첫 장이 저절로 펼쳐졌다. 먼지가 빛 속에 떠올랐다.
[실제 식사 한 건 확인.]
[미지급 왕위 채무와 무관한 사적 식사.]
[해당 식사에 대한 추가 청구 불가.]
브론이 숨을 내쉬었다. “저 한 그릇은 아무도 빚지지 않은 거죠?”
“그런 것 같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적어도 방금 이 그릇에 한해서는.”
아일린은 장부의 첫 장을 바라봤다. 원본 계약의 일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위에는 오래전에 지워진 문장이 있었다.
[식량의 최초 제공자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대가를 인수하는 자는 왕위를 내려놓을 각오로 마지막에 먹는다.]
아일린은 손을 떨었다. “왕위를 내려놓는다고요?”
루카스는 문장을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채무를 지는 방식에 관한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 왕위 양도가 있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도현은 다음 장을 넘기려다 멈췄다. 장부 아래에서 종소리가 일었다. 멀리 궁전 탑에서 여섯 번째 종이 울리고 있었다. 아직 마지막 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부의 두 번째 장에는 단 하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초 대가 이행 예정자: 초대에 불응한 왕.]
그리고 그 아래에는 현재 왕의 서명이 아니라, 오래전 왕의 자필처럼 보이는 희미한 선이 있었다. 누군가 그 위에 굵은 먹으로 새로운 이름을 덧쓰려 한 흔적도 보였다.
아일린이 물었다. “그 이름을 덮어쓰면 지금의 왕에게 채무가 옮겨옵니까?”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원본 계약의 나머지 조건을 보지 못했고, 덧쓴 이름이 실제로 누구의 것인지도 읽히지 않았다.
여전히 북부에서 돌아오지 못한 요리사 열여섯 명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들의 기록이 어떤 경로로 왕궁에 도착했는지도, 183,442명에게 연결된 저주를 어떻게 풀지도 몰랐다. 오늘 확인한 것은 그 모든 사람 대신 누군가 한 그릇을 먹었다고 적는 일이 옳지 않다는, 아주 작은 원칙이었다.
그때 지하실 위에서 누군가 천천히 박수를 쳤다.
“참 대단한 요리사로군.”
익숙하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계단 위에서 검은 장갑을 낀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왕실 의전국의 최종 책임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마지막 종이 울리면,” 그가 말했다. “왕의 몫은 그토록 천천히 차려지지 않을 걸세.”
도현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가 만든 수프는 아직 반 그릇 남아 있었다.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도현이 말했다. “다음 음식은 안 나갑니다.”
제11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