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식탁의 지하실은 다시 조용해졌지만, 어느 누구도 곧장 떠나지 않았다.
의전국 관리가 사용한 황금 도장은 별도 봉인함에 들어갔다. 경비대장은 계단마다 사람을 배치했고, 루카스는 현장에서 본 것과 아직 추측에 불과한 것을 두 장으로 나누었다. 아일린은 토렘을 비롯해 별채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임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별도 공간을 마련하게 했다.
도현은 돌판의 모서리를 살폈다. 그릇에 검은 물이 차오르던 순간 돌판 아래에서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주방에서 불길이 이상하게 움직일 때는 기름이나 바람길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여기 아래가 비어 있습니다.”
브론이 몸을 낮추고 귀를 대 보았다. “물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소리 같기도 한데요. 아주 옛날 사람들 말소리도 섞여 있어요.”
도현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더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먼저 구조부터 확인해요.”
루카스가 계단 쪽의 공사 명세서를 찾아왔다. 오래전 제0식탁은 수해를 막기 위해 바닥을 이중으로 쌓았다고 했다. 아래 공간은 빗물과 연기를 동시에 빠뜨리는 통로로 쓰였다. 그런데 후대에 수로 일부를 막고 기록 보관용 벽돌을 덧붙였다.
“돌판을 들어 올리기 전에 어떤 기록이 나올지 모르겠군요.”
그들은 손상이 적은 끝부분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에스텔은 봉인 아래의 마력을 읽고 강제 복원 주문이 걸려 있지 않은 곳을 골랐다. 브론이 작은 지렛대를 밀어 넣자 틈에서 검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도현은 먼지 속에서 말린 보리 냄새를 맡았다. 젖은 지하실에서 어떻게 그런 냄새가 나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오래된 짚 단을 태워 남긴 가루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들의 첫 식사를 만들었던 화덕 재가 밑면에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는 금속 접시 일곱 장이 겹쳐져 있었다.
각 접시에는 음식 이름이 아닌 사람들의 상태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식사 후 사흘이 지난 사람', '아이에게 먼저 자기 몫을 내준 사람', '부상 때문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람'. 이름 대신 상황을 적은 오래된 분류였다.
“처음엔 사람을 골라 먹였다는 뜻인가요?” 아일린이 물었다.
“누구에게 먼저 도움을 줄지 정해야 했을 수도 있죠.” 도현이 말했다. “그 판단이 옳았는지는 기록을 더 봐야 합니다.”
일곱 접시 중 여섯 번째는 깨어져 있었다. 뒤쪽에는 선명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왕관은 마지막 그릇을 받는다.]
브론이 고개를 갸웃했다. “왕이 마지막으로 먹으란 뜻입니까?”
“그렇게 읽히네요.”
에스텔은 입술을 깨물었다. “구호 초기에는 그런 말이 있었어. 궁전이 먼저 먹지 않는다. 마지막 그릇이 남았을 때 왕에게 준다.”
“그럼 왕에게 먹을 게 없었다면?”
“그날은 왕도 굶는 거지.”
도현은 처음으로 이곳의 이름이 무서움이 아닌 약속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왕에게 마지막 식사를 남겨 놓는 규칙은 화려한 왕실 만찬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가 가장 늦게 먹으라는 결단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누가 그 결단을 바꾸어, 먼저 먹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왕실의 빚을 넘기도록 만든 것일까.
루카스는 접시와 함께 나온 작은 마모된 장부 조각을 펴 보았다. 기록에는 잉크가 아니라 불에 그을린 선이 남아 있었다. 한 문장은 읽을 수 있었다.
[선지급된 식량의 마지막 보증은 왕좌가 아니라 왕의 자리를 차지한 자가 진다.]
아일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왕의 자리.”
“왕 개인일 수도 있고 왕위의 권한일 수도 있습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이 장부가 전체 원본의 일부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보이네요.” 도현이 말했다.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준 건 왕실의 선심이 아니었어요. 누군가가 굶주리는 사람들 앞에서 마지막 책임을 지겠다고 맹세한 것이었죠.”
그들은 조각을 보관하며 손상된 부분을 사진처럼 복제하는 마법으로 기록했다. 에스텔은 복제본에 원본과 동일한 효력이 생기지 않도록 주문을 제한했다. 과거에 복제된 목소리 하나가 사람의 실제 증언처럼 취급됐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그때 도현의 손목이 찌릿했다. 기억 저주의 검은 선이 손가락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부서진 접시에서 아주 짧게 미역국 냄새가 났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냄비를 저을 때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려 했다.
도현은 접시를 놓았다. 대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기억이 돌아온다는 희망에 무턱대고 손을 대면, 또 다른 계약이 몸 안으로 옮겨 올 수 있었다.
“괜찮습니까?” 에스텔이 물었다.
“조금 아팠어요. 그런데 아직 제가 누군지는 알아요.”
그가 웃으려 하자 에스텔은 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는 레온이 처음 저주를 옮겨 받았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걸 농담으로 하지 마.”
도현은 웃음을 멈췄다. “네. 죄송합니다.”
브론은 둘 사이를 보다가 조용히 물병을 건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이 작은 떨림을 보였다. 도현은 그 물을 받아 마셨다. 거창한 위로보다 그런 손길이 더 고마운 순간이었다.
도현은 금속 접시에 남은 음식 찌꺼기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오래된 보리와 말린 콩의 흔적이었다. 그 시대에 어떤 요리를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기근 때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따뜻한 음식을 주려고 물과 잡곡을 섞었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는 낡은 부엌의 풍경을 상상했다. 바깥에는 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고, 작은 화덕은 하루 종일 쉬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릇을 놓칠까 봐 두 손으로 꼭 잡고, 어른들은 자기 몫을 받을 때마다 뒤쪽 사람의 빈 그릇을 돌아본다. 주방 안에서는 누군가 양파를 썰고, 그보다 오래 일한 사람은 물을 아껴 쓰라고 외친다. 그 풍경은 마법보다도 현실적인 피로와 소음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무서운 사람들이 만든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도현이 말했다.
에스텔이 대답했다. “무서운 일이 여기서 시작됐다는 것과 이곳을 만든 모두가 나쁜 사람이었다는 건 다르지.”
“그래서 더 어렵군요.”
그는 식당에서 일할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비싼 코스 요리를 준비하던 날, 재료가 조금 부족하면 누가 덜 받을지 몰래 계산하던 주방 분위기가 기억났다. 그때 중요한 것은 접시의 모양이 아니라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음식이 나가느냐였다. 그런데 왕궁의 장부는 이름을 먼저 적고 그릇은 나중에 만들었다.
브론은 일곱 접시를 크기별로 닦으면서 불평했다. “왜 이렇게 오래된 걸 아직도 쓰는 겁니까? 찌그러진 접시는 바꿔야죠.”
“증거니까 못 버리죠.” 루카스가 말했다.
“먹을 때 쓰라는 게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이건 제 혀가 닿아도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도현은 웃음을 참았다. 고대의 마법 장치 앞에서도 브론에게는 그것이 결국 그릇이었다. 그 시선이 때로는 큰 도움이 됐다. 기록의 권위 때문에 놓치기 쉬운 균열을 발견하게 해 주었으니까.
그때 오래된 돌벽의 수로가 한 차례 떨렸다. 아래에서부터 차가운 물방울 몇 개가 솟아 벽의 홈을 따라 흘렀다. 도현은 물의 흐름을 주의 깊게 보았다. 수로 한쪽은 말라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가끔 물이 나왔다. 분명 바깥의 어떤 설비가 여전히 이곳과 연결되어 있었다.
“제0식탁은 완전히 봉인된 장소가 아니군요.”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최근에도 기록을 옮겨 왔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도현은 그 물길의 끝에 놓인 작은 검은 조각을 찾아냈다. 벨로스의 제3창고에서 보았던 운송 봉인과 비슷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그는 모양을 베껴 그렸다. 북부의 검은 밀, 서쪽 항구, 동부의 온실을 이어 온 경로가 이제 왕궁 지하까지 들어온 듯했다.
실종된 요리사 열여섯 명이 이곳에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을 기록하던 장치의 복제 자료가 제0식탁에 닿았을 가능성은 더 커졌다. 레온의 흔적을 쫓는 에스텔은 그것만으로도 손가락 끝이 떨렸다.
“확정된 사실은 아직 없어요.” 도현이 말했다.
“알아.” 그녀가 작게 대답했다. “그래도 앞으로 어디를 봐야 할지는 알겠어.”
아일린은 접시의 문장을 한참 보았다. 그녀는 왕위가 자신의 저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제야 조금 짐작했다. 공주로 태어난 순간부터 손등에 따라붙던 검은 왕관은 권력의 증표일 수도, 책임을 남에게 넘기지 못하도록 붙인 흔적일 수도 있었다.
“만약 왕위가 대가를 지기로 약속했다면,” 그녀가 말했다. “그 약속을 없애려면 왕위 자체를 없애야 합니까?”
“모르겠습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오래된 식당에서도 보증금을 돌려받는 법과 문을 닫는 법은 다르잖아요. 먼저 무엇을 갚아야 하는지부터 알아야겠죠.”
그 순간 가장 아래에 놓인 일곱 번째 접시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지급 원본 확인 조건: 원제공자의 표시를 찾을 것.]
[표시는 식탁 위가 아니라 아래에 남아 있다.]
도현이 고개를 숙였다. 돌판 밑면의 한구석에 누군가 새긴 작은 그림이 보였다.
밀 이삭이 아니었다. 어른의 손바닥 안에 조그마한 아이의 손이 놓인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세 개의 비뚤어진 매듭이 있었다.
제10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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