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문에서 나온 사람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아니었다.
두꺼운 서류가방을 가슴에 안은 중년 관리였다. 그는 지하실에 내려오자마자 식탁보다 아일린 공주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빛에는 놀람보다 불쾌함이 많았다.
“왕녀 전하, 이곳은 왕실 의전국의 보호 구역입니다.”
“제가 들어오면 안 된다는 명령을 누가 내렸습니까?” 아일린이 물었다.
“왕위 안정 대책위원회입니다.”
“위원회 명단을 보여 주세요.”
관리는 입을 다물었다. 도현은 그가 든 서류가방의 금속 잠금쇠를 보았다. 잠금쇠에는 검은 접시와 같은 문양이 있었다. 남쪽 주방에서 하급 관리 토렘이 들었던 그 접시였다.
“이곳에서 식사를 준비하러 오셨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대리 수령인 등록을 확인하러 왔다.”
“누가 대신 먹는다는 겁니까?”
관리는 가방을 열어 사람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문서를 내밀었다. 날짜별로 분류된 표에는 왕궁 하녀, 병사, 시장 상인, 거리의 고아들이 섞여 있었다. 대부분 자기 이름 옆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왕위 안정 임시 식사 참여 명부.]
[예비 대리 수령인: 327명.]
브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건 식사 명부가 아니라 잡아갈 사람 명단 같은데요.”
“참여자는 법정 절차로 선정했다.” 관리가 말했다. “왕실이 위험하면 국가 전체가 위험해진다.”
도현은 문서를 곧장 가져오지 않았다. “서명하신 분들에게 무엇을 먹고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설명했습니까?”
“국가의 안위를 앞에 두고 그런 사적인 질문이 필요한가?”
“식사라면 필요하죠. 내 입에 무엇이 들어오는지는 내가 알아야 하니까요.”
루카스는 명부의 등록 인장과 작성일을 확인했다. 날짜는 온실에서 첫 종이 울리기 사흘 전이었다. 하지만 참가자의 확인란은 모두 비어 있었다.
“이 사람들의 동의를 증명할 수 있는 문서가 있습니까?”
관리는 고개를 돌렸다. “위원회에서 일괄 승인을 받았다.”
“위원회는 손님이 아니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그 말에 관리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다시 가방 안쪽에서 작은 황금 도장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도장은 왕관이 아닌 빈 그릇 모양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불법 열람을 중단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대리 수령인을 즉시 지정하겠습니다.”
에스텔이 도현 앞에 섰다. “그 도장, 내려놔.”
“너는 입회인의 자격을 이미 잃었다.” 관리가 말했다.
에스텔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도현은 그녀에게 손짓해 조금 물러서 달라고 했다. 위협에 맞서 누군가의 자유를 지키는 일과, 자신이 대신 다칠 각오로 계약을 받아들이는 일은 달랐다.
“도장을 찍으면 어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도현이 물었다.
“왕국이 보호받는다.”
“그건 원하는 결과고요. 실제 과정은요?”
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도장을 돌판 위에 내리쳤다.
쾅.
방 안의 나무그릇에 검은 물이 차올랐다. 물 표면에 명부의 이름들이 떠올랐다. 계단에서 기다리던 경비병 하나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마치 뜨거운 음식을 삼킨 것처럼 기침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아일린이 외쳤다.
도현은 즉시 브론에게 명령했다. “계단 밖으로 사람들을 빼세요. 이곳의 공기가 저 기록하고 연결돼 있어요.”
브론은 경비병의 팔을 붙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루카스는 등록판 옆의 서명 기록을 붙들었다. 원래 계약에는 '실제 제공'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 작동하는 도장에는 '지정 즉시 제공 완료'로 표시되고 있었다.
“이건 식사가 아니라 식사했다고 우기는 선언입니다!” 루카스가 외쳤다.
도현은 돌판 가장자리를 더듬어 찬물 배출구를 찾았다. 주방에서는 뜨거운 재료가 넘칠 때 먼저 불을 줄이고 넘치는 곳을 비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릇을 손대지 않고 밑바닥의 물길을 확인했다.
“에스텔, 이 물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격리할 수 있어요?”
“잠깐은. 하지만 그릇 자체를 깨면 이름들이 흩어질 수도 있어.”
“깨지 맙시다. 계속 먹었다고 적을 수 있는 바닥부터 막아요.”
에스텔은 화덕을 봉하던 밀랍으로 그릇 둘레를 감쌌다. 아일린은 경비대장에게 의전국 관리의 도장을 분리 보관하게 했다. 관리는 왕실의 명령이라며 저항했지만, 아일린은 사용 중인 도장이 미서명 시민의 이름을 표시한 현장을 모든 사람이 보았다고 말했다.
흐르던 검은 물이 서서히 멈췄다. 바닥에 떨어진 한 방울에서는 잉크 자국이 부풀어 오르다 굳었다. 루카스는 안전을 확인한 뒤 현장 기록에 모든 증인을 서명시켰다. 관리의 서명은 받지 못했고, 거부 사실도 적었다.
“지금 멈춘 것뿐입니다.” 에스텔이 말했다. “명부가 밖에 더 있을 수 있어.”
관리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아일린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전하가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결국 누군가는 이 식사를 해야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겁니다.” 아일린이 답했다. “그때까지 사람을 대신 집어넣지 마세요.”
계단 쪽에서 구조된 경비병은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기가 먹지도 않은 음식 때문에 목이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고 했다. 도현은 그 진술을 들으면서 실제 질식과 마법적 감각이 같은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에스텔이 목 주변의 마력을 살폈지만 눈에 띄는 새 저주 표식은 없었다. 왕실 의전국의 도장이 잠시 반응한 흔적만 있었다.
“그럼 괜찮은 겁니까?” 경비병이 물었다.
“지금 당장 더 아프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했습니다.” 에스텔이 대답했다. “밖에 나가서 몸 상태를 다시 살펴보세요.”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오늘 아침 경비에 배치되며 '왕실 의례의 명예로운 증인'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의례가 무엇인지 묻자 담당자가 충성만 있으면 된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아일린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어릴 때부터 충성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사용해 왔다. 왕을 향한 충성이 어떤 질문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바뀌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험에 빠지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충성한다고 해서 목숨을 설명도 없이 맡길 필요는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루카스가 명부를 넘겨 보다가 섬뜩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름이 올라간 327명 가운데 상당수는 왕실 건물에서 일하지 않았다. 한 어머니는 시장에서 채소를 팔았고, 어떤 노인은 왕궁에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왕실에서 나눠 준 저렴한 배급 식사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식사 한 번 받은 걸 동의로 해석한 겁니다.”
“그것도 본인이 실제로 먹었는지 확인이 안 된 이름들이 있군요.” 도현이 말했다.
루카스는 명부의 날짜와 식당들이 제출한 실제 판매 기록을 나란히 비교했다. 한 줄에는 4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표기된 사람 이름이 있었다. 다른 줄에는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서명이 있었다. 누군가 대신 적은 것이 분명했지만 그 이름의 당사자에게 허락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관리의 손이 떨렸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 명부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상부에서 내려온 완성된 자료를 집행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도현은 그 말을 듣고도 그를 곧장 악인이나 무고한 사람으로 나누지 않았다.
“어디에서 내려왔는지 알면 알려 주세요.”
“나는 그저 명령을…”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과 누구에게 대가가 갔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둘 다 확인해야 해요.”
한참 뒤 관리는 명부가 의전국 지하 복사실에서 여러 번 재작성됐다고 털어놓았다. 원래 이름 옆에는 개인의 동의 유무가 표시되어 있었지만, 최종 인쇄본에서는 그 칸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차이를 알고도 수정 요청을 하지 않았다.
아일린은 그 진술을 서면으로 받을 것을 명령했다. 관리는 당장 서명할 자신이 없다며 거부했다. 대신 복사실의 위치와 관리자를 특정해 주었다. 루카스는 자백을 강요하지 않고 그 정보를 다른 기록과 대조하기로 했다.
도현은 제0식탁 한쪽에서 아직 검은 물이 마르지 않은 흔적을 보았다. 그것은 진짜 수프처럼 김이 오르지 않았고, 따뜻한 음식의 향도 없었다. 다만 이름을 적는 순간에만 움직였다. 누군가 만든 요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빠져 있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은 이름 석 자가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손도 있고, 배도 고프고, 오늘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사람이죠.”
그 말을 들은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집행한 명부를 처음으로 사람들의 얼굴과 연결해 보는 모습이었다.
도현은 명부 아래쪽에 작은 기호가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다. 일반 왕실 인장과는 달랐다. 일곱 개의 점과 칼집 같은 선 하나. 남쪽 주방의 화덕보다 더 오래된 기호였다.
그는 루카스에게 그 부분을 베껴 달라고 했다. 이제 누가 사람들을 지정하려 하는지만이 아니라, 누가 최초의 대가를 바꾸어 적었는지를 밝혀야 했다.
그때 빈 나무그릇 아래에서 숨겨진 글이 드러났다.
[미지급 의무의 합법적 이행자: 왕위 보유자.]
[대리 지정 조항: 최초 계약 대조 필요.]
도현은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이 그릇 자신도 사람을 대신 지정하는 게 확정된 규칙이라고 말하지 않네요.”
관리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더니 서류가방을 닫았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그렇게 믿고 일했던 절차가 처음부터 틀릴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 절차를 자신이 여러 번 실행했다는 사실이 더 두려운 얼굴이었다.
제10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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