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로 돌아가는 수레는 올 때보다 훨씬 비어 있었다.
온실에서 쓰던 커다란 물통과 실험 장비는 대부분 남겨 두었다. 대신 도현의 가방에는 검은 수로에서 채취한 밀봉 표본, 시든 꽃 한 장, 원본과 대조하지 못한 기록의 목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에스텔이 감싼 부러진 주걱이 놓여 있었다.
“귀한 물건만 골라 넣으셨네요.” 브론이 수레를 끌며 말했다.
“귀한 것보다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이죠.”
“그런데 제 간식은 왜 못 싣게 하셨어요?”
“간식이 아니라 온실의 수확 예정표를 몰래 가져오려고 했잖아요.”
“그 종이가 사과 포장지로 딱 좋던데요.”
루카스가 기겁했다. “그건 증거 보관 대상입니다!”
브론이 어깨를 움츠리자 일행 사이에 처음으로 편안한 웃음이 흘렀다. 며칠 동안 불안한 시설과 위험한 수로만 보던 사람들에게 바람이 부는 길은 그 자체로 휴식이었다.
동부의 가을은 화려하지 않았다. 마른 풀 사이로 아직 초록빛이 남았고, 들판에는 수확을 마친 밭과 끝내 수확하지 못한 밭이 나란히 있었다. 몇몇 집에서는 굴뚝이 연기를 뿜었다. 도현은 그 연기에서 태운 짚 냄새를 맡았다. 한국에서는 계절이 바뀔 때 어느 골목이 어떤 냄새였는지 떠올리곤 했는데, 이제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지어 주던 음식 몇 가지가 통째로 빈자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갑자기 브론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릴 때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했어요?”
“뼈 붙은 고기요.”
“그건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잖아요.”
“좋아하는 걸 굳이 바꿔야 합니까?”
도현이 웃었다. “그럴 필요 없죠.”
브론은 잠시 뜸을 들이다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도 어머니가 끓인 무 수프가 생각날 때는 있습니다. 늑대인간 집안이라 고기만 먹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무를 오래 끓였거든요. 고기를 남겨 놓았다가 마지막에 아주 조금 넣으셨어요.”
그 말에 도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남의 선명한 추억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브론이 신나게 얘기하는 목소리를 듣는 일은 괴롭지만은 않았다.
오후에 그들은 도로 옆 여관에서 쉬었다. 여관 주인은 수레 옆에 붙은 왕실 조사단 표식을 보고 움찔했다. 지난달에는 왕실 징수관들이 찾아와 사람 수보다 많은 아침 식사 비용을 받아 갔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런 걸 계산하러 오셨습니까?”
루카스가 먼저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아니요. 오히려 그런 기록이 왜 생겼는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믿지 못했다. 도현은 말로 설득하는 대신 자기 돈을 꺼내 보리죽 네 그릇을 주문했다. 주인이 장부에 적은 숫자와 실제 나온 그릇을 함께 확인한 뒤 먹기 시작했다.
“다섯 그릇이잖아.” 브론이 말했다.
“당신은 방금 추가로 시켰죠.”
“그건 주방장님이 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여관 주인은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종이 울리는 저녁 무렵에는 문을 걸어 잠그려 했다. 도현이 이유를 묻자 주인은 낡은 동전 한 닢을 내밀었다. 한 면에는 보통 왕의 초상이, 다른 면에는 빈 왕좌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걸 가진 손님이 어제 다녀갔어요. 왕궁에서 오신 분이라는데 제 값을 지불하고도 영수증을 안 받더군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 왕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사값을 받으러 다닐 거라고 했죠.”
에스텔이 동전을 살폈다. 가장자리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선이 있었다. 왕실 화폐와는 다른 주조법이었다. 그녀는 값을 치르고 동전을 사려 하지 않았다. 대신 주인의 허락을 받아 표면을 종이에 문질러 본을 떴다.
“동전을 보관하세요. 나중에 공식 조사에서 증거가 될 수 있어요.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도 적어 두시고요.”
주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동전이 저주받은 물건이라면?”
에스텔은 간단한 봉인 주머니를 만들어 주었다. “확실하지 않으니 맨손으로 만지는 일은 피하세요. 왕도에 도착하면 이 주조 표식을 조회해 보겠습니다.”
여관을 떠날 때 주인은 뜨거운 보리차를 수레에 실어 주었다. 도현이 돈을 내겠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장부에 쓰지 않아도 되는 선물입니다. 제가 선택해서 드리는 거예요.”
도현은 선물임을 확인하고 감사히 받았다. 장부에 적히지 않는 호의가 반드시 나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대가를 강요하고, 누가 스스로 건네는가였다.
여관을 나온 뒤에는 오래된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평소라면 작은 통행료만 내면 되는 길이었지만, 그날은 다리 앞에 길게 줄이 서 있었다. 마차를 몰던 상인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쳤고, 길가에는 밀가루 자루를 내려놓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성 밖에서 왕도 안으로 식량을 들여가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검문을 하는 겁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앞쪽의 징수인은 새로운 규정이 생겼다고 대답했다. 왕위 안정 기금 명목으로 모든 식량 수레가 하루치 식사를 미리 신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브론은 자기 가방을 내려다봤다.
“제가 내일 먹을 고기를 아직 안 샀는데 어떻게 신고합니까?”
“예상 식사량으로 적으시오.”
“그럼 예상보다 많이 먹으면요?”
“추가 청구가 생기겠지.”
“적게 먹으면 돌려줍니까?”
징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손바닥을 펴서 가방 안의 말린 과일 두 봉지를 보여 주었다. 실제로 가진 물품을 적는 것과 미래에 먹을 것을 적는 것이 왜 다른지 설명하려는 참이었다.
바로 그때 앞줄에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엄마를 따라 장에 가려던 아이였다. 어머니는 등에 묶은 보리 자루를 내려놓고 다리 밑을 가리켰다. 배가 고프면 물가에서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통행료를 내고 나면 점심 살 돈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도현은 주변 상인에게 가격을 물어 빵 두 덩이를 샀다. 아이와 어머니에게 건네며 오늘 먹을 건지, 보관할 건지 직접 고르도록 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고 했지만 아무 장부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징수인이 그 모습을 보더니 무언가 적으려 하자 루카스가 다가갔다.
“저건 개인 간 식사 제공입니다. 통행 예납과 무관합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겠소?”
도현은 빵을 판 상인에게 받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오늘의 실제 구매량과 금액만 적혀 있었다. 상인은 왕실 도장 대신 자기 가게의 작은 꽃무늬 도장을 찍어 두었다.
“매일 이런 영수증을 만드는 건 수고스럽겠군.”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수고스럽죠. 그래도 없던 빚을 만드는 것보단 훨씬 싸게 먹힐 겁니다.”
루카스는 다리 앞 징수 규정을 베껴서 나중에 왕실 감사 자료와 대조하겠다고 했다. 즉석에서 통행료 징수를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명이 없는 예납표까지 식사 완료로 처리할 수 없다는 근거를 찾아 상인들에게 설명했다. 그날 수레 몇 대가 다리를 통과할 수 있었고, 통과하지 못한 이들은 다음 날 확인할 방법을 알게 되었다.
돌다리 아래에서 강물이 반짝였다. 물살은 막을 수 없어도 배가 지나갈 길은 고를 수 있었다. 도현은 그런 사소한 선택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왕도에 가까워지자 길 옆으로 새 게시물이 늘었다. 첫 번째 것은 일곱 번째 종이 울릴 때까지 귀족들은 공식 연회를 열지 말라는 권고였다. 두 번째는 '왕위 안정 특별기금'에 자발적 기부를 받는다는 공고였다. 그런데 공고 아래에는 기부를 하지 않은 상점의 이름을 공개할 수 있다는 위협이 작게 적혀 있었다.
“자발적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군요.” 도현이 말했다.
루카스는 공고 날짜를 확인했다. 온실에서 첫 종이 울리기 하루 전이었다. 왕궁의 누군가는 종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성문에서는 수레를 검문했다. 관리는 에스텔의 주걱을 보자 표정이 바뀌었다. 쇠끝에서 아직 연기가 나지도 않았는데 코를 감싸 쥐었다.
“이건 안 됩니다. 특별 경보에 오른 조리 도구입니다.”
“소지 자체가 금지됐다는 명령이 있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관리가 문서를 뒤적였다. 종이를 한 장 넘길 때마다 말소된 이름이 보였다. 마침내 그는 수색 허가서 한 장을 꺼냈다.
[대상: 왕위의 마지막 식사를 만들 자.]
[소유물: 부러진 일곱 홈 주걱.]
[예상 이동 경로: 동부 유리 온실에서 왕도로 향하는 길.]
도현은 그 글을 읽고 등을 곧게 폈다.
누군가는 자신이 온실을 떠나기도 전에 이동 경로를 적어 두었다. 손님이 주문하기 전에 메뉴가 정해져 있는 식당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종이에 제 동의도 적혀 있습니까?”
관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없으면 짐을 뺏을 근거도 없죠.”
잠시 실랑이 끝에 관리는 물품을 봉인하지 않은 채 입성 시각만 기록했다. 대신 왕실 측이 도현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저녁 시장의 냄새가 밀려왔다. 구운 양파, 흙 묻은 감자, 오래된 우물물의 석회 냄새. 그 사이로 궁전 쪽에서 낮은 종소리가 흘러왔다.
첫 종과는 달랐다. 두 번째 울림이었다.
도현의 가방에서 주걱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은 종: 다섯.]
[초대 수락 여부: 미확인.]
그는 수레의 고삐를 잡았다. “왕궁에 가기 전에 식당부터 들릅시다.”
“왜요?” 브론이 물었다.
“가게가 멀쩡한지 봐야죠. 그리고 사람을 초대하는 쪽에서 자꾸 식사를 강요한다면, 먼저 내 주방에서 밥 한 끼 제대로 먹고 생각하려고요.”
그 말에 브론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이번 여행에서 들은 말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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