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창고 지하의 물은 생각보다 빠르게 차올랐다. 처음에는 장화 밑창을 적시는 정도였지만, 벽에 새겨진 오래된 수위 눈금 세 개가 연이어 잠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장에 걸린 등불들이 천천히 흔들렸고, 좁은 복도의 공기는 더 차갑게 식었다.
미란은 젖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수압계의 바늘을 확인했다. 손이 차가워져도 펜을 놓지 않았다. 수문을 무작정 닫으면 제9창고 바닥이 부풀어 오를 수 있었고, 인쇄틀을 그냥 작동시키면 범죄의 증거가 물에 휩쓸려 사라질지도 몰랐다.
“오른쪽 통로의 차단판을 열어야 해요. 열리기만 하면 물이 바다 쪽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지지대가 썩었어요.”
도르는 그녀 곁에 섰다. “예전에는 저쪽으로 수레를 보냈소. 마지막에는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왜요?”
노인은 물에 젖은 손을 비볐다. “열두 해 전 저 안에 아이 하나가 갇혔으니까.”
라일의 호흡이 멎었다. 뒤쪽에서 바닷물이 돌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오래전 꿈속에서 반복되던 비 오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에도 도르가 말을 이어 가기를 기다렸다.
“이름을 들은 적 있습니까?” 카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아이는 가명을 여러 번 바꿨소. 그때도 사람들이 데려가려 했거든. 나는 그 아이를 지켜 주려 했지만, 정작 문이 잠길 때는 다른 쪽으로 물품을 날라야 했소.”
도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이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십이 년을 살았지.”
라일은 노인을 한동안 바라봤다. 화가 나야 할 것 같았지만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의 기억은 빈칸이 많았다. 그 빈칸에 남의 죄책감을 끼워 맞추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아이가 저라는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때 누군가를 지키려고 했다는 건…… 믿고 싶어요.”
도르가 고개를 숙였다. 라일은 그를 끌어안지 않았다. 대신 노인 옆에 서서 물길을 살폈다. 과거가 무엇이었든 지금 이곳에서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진혁은 벽에 설치된 작은 인쇄틀의 회전수를 세었다. 네 번마다 종이 한 장이 내려왔다. 서류의 이름은 제멋대로였다. 과거에 죽은 사람, 살아 있는 작업자, 도시를 떠난 상인. 금액은 모두 달랐지만 마지막 문구는 같았다. '양도 확인'. 진혁의 손바닥에는 비슷한 글자들이 겹쳐 떠올랐다.
[원본 대조 실패.]
[문서의 실제 용도: 사후 발행된 권리증 위장.]
[재인쇄 횟수: 확인 불가.]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능력이 다시 아프게 반응했다. 더 이상 읽는다고 해서 증거가 선명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단어들이 뒤섞였다. 진혁은 손을 떼고 일반적인 장비로 돌아왔다.
“종이를 보존해야 합니다. 최소한 여기가 위조 공장이라는 건 입증할 수 있어요.”
카렌은 조사관들에게 출입구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일부는 이미 확보한 서류와 사진을 지상으로 옮겼다. 남은 사람들은 시설을 안전하게 정지시키는 작업을 도왔다. 범인을 잡는 일보다 사람을 살아서 데려가는 일이 우선이었다.
“진혁 씨.” 미란이 불렀다. “어제 해체장에서 구한 고정구, 아직 있죠?”
“마침 저렴하게 샀다는 그 물건이요?”
“그걸 보조 지지대로 쓸 수 있어요. 단독으로 버틸 수는 없지만, 임시 철판과 같이 쓰면 수문을 열 때 비틀리는 힘을 줄일 수 있습니다.”
진혁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동화 일곱 닢의 고철이 다시 생명을 구할 가능성이 생겼다. 그는 곧바로 웃지 않았다. 가능성을 확정하는 데는 시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배웠기 때문이다.
미란은 구조팀과 무전으로 계획을 확인했다. 지상에서는 보조 고정구와 쇠지렛대, 버팀목을 순서대로 내려 보냈다. 물이 더 차기 전에 지지대를 바꾸고 빈 통로의 차단판을 열어 물길을 분산시키는 작업이었다. 손끝이 떨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절차가 느린 것처럼 보여도 잘못된 조작 한 번이면 모두가 물속에 갇힐 수 있었다.
라일은 얇은 쇠줄을 벽 위의 고리에 통과시켜 퇴로를 표시했다. 검은 가루를 뿌린 바닥에 작은 빛이 반짝였다. 그가 기억하던 배달인 조합의 안전 표시였다. 그는 비로소 어린 시절의 기술이 누군가를 해치는 일 말고도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오른쪽 문 준비.” 미란이 외쳤다.
지지대가 버티는지 확인한 뒤 차단판을 열었다. 처음에는 작은 틈으로만 물이 흘렀다. 이어 낮은 굉음과 함께 거친 물살이 새 통로로 쏟아졌다. 벽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러나 쇠받침은 버텼고, 수압계의 바늘은 서서히 내려갔다.
“성공이에요.”
미란은 기쁨에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마지막 수치가 안정될 때까지 숫자를 확인했다. 그제야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 시각 지상의 제9창고에서는 작은 다툼이 벌어졌다. 바닷물이 차오르자 일부 구경꾼들이 경계끈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창고 지하에서 일했다며 기록을 찾아야 한다는 여자가 있었고, 젊은 상인은 검은 망치가 찍힌 계약서가 자신의 것이라고 소리쳤다. 경비대는 그들을 억지로 끌어내기보다 먼저 사건 접수대를 만들었다. 신원을 적고, 연락처를 확인하고, 무엇을 잃었는지 기록했다. 혼란 속에서도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차츰 목소리를 낮췄다.
아래층에서는 그들의 사정이 벽 너머로 전해지는 듯했다. 진혁은 사람들이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금 원부를 꺼내기 위해 무리하면 더 많은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몇 차례 그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눈앞에 있는 증거가 사라지더라도 사람을 먼저 살려야 했다.
카렌은 그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며 말했다. “나가고 싶은 겁니까?”
“예. 그런데 더 내려가고 싶기도 합니다.”
“그럼 지금은 안전한 일을 먼저 합시다. 당신은 감정사고, 저는 검사예요. 우리는 서로의 판단이 무리하지 않게 지켜 주려고 여기 있죠.”
그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비밀을 한 번에 털어놓는 일이 아니라, 위험할 때 멈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그 순간 인쇄틀 뒤편의 좁은 선반이 드러났다. 물이 빠지며 작은 서류함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류함은 낡은 방수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천에는 세 갈래 매듭이 묶여 있었다.
도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건…… 내가 묶었던 거요.”
서류함의 겉면에는 숫자 998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작은 글씨는 달랐다.
‘원본 아님. 수취 거절 증명 보관.’
카렌은 그 글을 반복해서 읽었다. “거절 증명?”
진혁은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는 장치가 전부인 것처럼 꾸민 자들에게 가장 불편한 문서는, 누군가 처음부터 그 거래를 거절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보존사가 사진을 찍고 봉인 상태를 확인한 다음, 서류함을 건조한 용기로 옮겼다. 뚜껑은 현장에서 열지 않았다. 증거가 오래도록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열지 않는 것도 중요한 선택이었다.
“저것이 아홉 번째 의자입니다.” 도르가 말했다.
“의자 자체가 아니라 거절이 기록된 자리였군요.” 진혁이 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걸 온전히 입증할 사람도 물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카렌은 서류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남아 있는 것부터 지키면 됩니다.”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외항의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칠 때마다 불빛이 젖은 돌에 반사됐다. 서류함을 실은 경비대 마차가 창고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라일은 오래전 자신을 지키려 했던 어른의 등을 떠올렸다. 기억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노인장.” 라일이 말했다. “혹시 내 본명은…….”
도르가 그를 바라봤다. “서둘러 듣지 않아도 된다. 내가 가진 기록은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
라일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에 식사하면서 얘기하죠. 구명환을 훔치는 법부터 물어보고 싶으니까.”
“그건 도둑질이잖니.”
“저는 이제 안 합니다.”
그들은 함께 부두를 걸었다. 그러나 진혁은 멈춰 섰다. 하역 창고의 멀리 떨어진 창문에서 작은 불빛이 한 번 깜박였다. 경비대가 봉쇄하지 않은 건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만 남았다.
창고에서 빠져나온 뒤 진혁은 곧바로 쉬지 못했다. 구조팀의 마지막 인원까지 올라오는지 확인해야 했다. 미란은 흠뻑 젖은 설계도를 펼쳐 놓고 물길의 방향을 다시 표시했고, 기록관은 수습한 증거물의 봉인 번호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 사이 제9창고 지하에서는 더 이상 인쇄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완전히 해체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무허가로 종이를 찍어 내는 일은 당분간 멈춘 셈이었다.
바깥에는 지친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오래된 임대 계약서를 들고 온 어머니는 자신이 낸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가족의 이름이 사라진 문서를 보여 주며 이곳과 관계가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카렌은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기보다 경비대의 피해 접수 절차를 안내했다. 진혁은 잠시 당혹스러웠다. 그들 모두에게 '오늘 해결됐습니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죠?” 그가 물었다.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을 지키는 것까지요.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어서 해야 해요.” 카렌이 답했다.
진혁은 처음으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여러 사람이 제 몫을 다할 때 한 사람의 허풍보다 더 많은 일이 바뀌었다. 그는 돌아갈 루멘 경매장을 생각했다. 거기에도 자신이 해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때 카렌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오늘은 쉬어요. 당신이 쓰러지면 감정할 사람이 없어요.”
진혁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임금 인상부터 논의하시죠.”
카렌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진혁은 잠깐 불빛의 정체를 잊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는 오른손을 주머니 깊이 넣고 있었다. 손바닥에 남은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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