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의 비가 그친 날, 루멘 경매장에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손님들이 찾아왔다. 값비싼 유물을 찾는 귀족도 있었고, 던전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를 감정받으려는 어부도 있었다. 그날의 경매장은 살아 있는 괴수의 껍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오래된 건물이었다. 회랑의 돌기둥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고, 입구의 작은 분수에서는 깨끗한 물이 흘렀다.
서진혁은 출근하자마자 자신의 책상에 쌓인 서류를 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세상에. 범죄 조직 하나 막았더니 서류 조직 열 개가 생겼군요.”
벨라는 그에게 검은 표지가 붙은 장부를 내려놓았다. “한 장 한 장 읽으세요. 지난번 소액 경매로 남긴 수익이 안전 검증에 얼마나 들어갔는지 적었습니다. 그리고 제9창고 관련 장비 사용료도요.”
“저 동화 일곱 닢짜리 고철이 도시를 구했잖아요. 좀 봐주시면 안 됩니까?”
“그래서 수리비와 보관료를 빼고도 긍정적인 평가가 붙었습니다. 하지만 공공 조사에 쓴 물건이라고 당신 개인 소유권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정산은 해야 합니다.”
진혁은 장부를 넘겼다. 동화 일곱 닢의 조수 고정구가 없었다면 조사팀은 더 비싼 장비를 빌려야 했을 것이다. 고철 하나가 사건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물건이 지닌 실제 쓰임을 본 덕분에 선택지가 하나 늘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뿌듯했다.
남관의 작은 회의실에는 카렌, 미란, 라일, 세리아, 도르가 모여 있었다. 이번에는 누구도 장갑을 벗지 않고 미지의 봉인함을 만지지 않았다. 제9창고에서 확보한 서류함은 항만 경비대와 보존사의 공동 입회 아래 개봉하기로 했고, 전날 밤에는 습기를 제거하는 처리만 진행했다.
카렌이 먼저 보고했다. “은색 망치를 들고 도망친 여성은 붙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에다르 크룸은 중개 계약서와 선불금 계좌를 제출했습니다. 대리인인 자신이 사용한 이름과 실제 출품자의 이름이 다르다는 진술도 일치합니다.”
“그럼 범인은 안 잡힌 거군요?” 진혁이 물었다.
“전부는요. 하지만 문서 위조와 수문 불법 조작은 입증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에다르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될 거예요.”
도르는 고개를 숙였다. “너무 늦게 말해 미안하오.”
세리아는 노인을 바라봤다. “늦었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잠시 후 보존사가 서류함의 봉인을 제거했다. 안에는 두툼한 원부가 아니라 유리판 여러 장과 작은 종이 묶음이 들어 있었다. 각 유리판에는 서로 다른 이름과 시각이 새겨져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열두 해 전의 것이었고, 최근의 것에는 몇 달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
“원본은 아니네요.” 카렌이 말했다.
“예.” 보존사가 답했다. “하지만 여기에 적힌 기록은 원본과 대조할 수 있게 만든 확인용 사본으로 보입니다. 법적 효력을 확정하려면 추가 검증이 필요합니다.”
진혁은 그 말에 오히려 안도했다. 원본을 단번에 찾아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지난 몇 달간 발견한 수많은 위조 문서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에는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의 권리를 이용해 온 흔적이 있었다. 한 번의 승리로 모두 사라질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유리판 가운데 하나를 바라봤다. 판의 가장자리에는 흐릿한 글자가 남아 있었다.
'거절을 기록한 증인은 거래에 참여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카렌이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아홉 번째 자리의 역할이 실제로는 거절권을 보증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커졌군요.”
세리아는 처음으로 어깨의 힘을 풀었다. “그렇다면 유나가 마지막까지 남기려 한 건 소유권이 아니라 거절의 증거였을지도 몰라.”
“아직 그분이 남겼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미란이 말했다.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이제 살펴볼 곳이 생겼어.”
작은 안도감이 방 안에 퍼졌다. 누군가 그 안도감을 웃음으로 바꾸려는 듯 라일이 말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이름은 안전해진 겁니까?”
“오늘 우리가 확인한 것에 한해서는요.” 카렌이 대답했다.
“언제나 '오늘'이 문제네요.”
“그래서 내일도 살아 있어야죠.”
라일은 도르를 돌아봤다. 노인은 전날보다 얼굴빛이 조금 좋아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묻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다. 도르가 기억하는 어린 배달인과 지금의 라일이 같은 사람인지 확인할 자료는 부족했다. 그러나 라일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남의 입에서 듣기 전에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부터 생각했다.
도르가 돌아간 뒤 세리아는 잠시 홀로 회의실에 남았다. 오래된 창문을 닫자 방은 조용해졌다. 벽에는 유나와 함께 사용했던 작은 측정 자가 아직 걸려 있었다. 세리아는 그 앞에서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유나를 처음 만난 날 두 사람은 서류의 빈칸 때문에 다툰 적이 있었다. 세리아는 빈칸을 채우는 것이 유능함이라고 믿었고, 유나는 채우지 않아도 되는 칸을 남기는 것이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그 대화를 떠올리니 후회보다 더 묵직한 감정이 느껴졌다. 자신은 여전히 유나의 생사를 몰랐고, 그가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증거도 부족했다. 그러나 적어도 루멘에서는 누군가 동의하지 않은 거래를 거부할 수 있게 해야 했다. 세리아는 새 직원 규정 초안을 꺼냈다. 계약서의 빈칸을 임의로 채우지 말 것, 신원과 소유권을 혼동하지 말 것, 감정사의 설명이 소유자의 선택을 대신하지 않게 할 것. 그녀는 문구를 여러 번 고쳤다.
그것이 유나에게 보내는 사과인지, 미래의 직원들에게 내놓는 약속인지 스스로도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빈칸 하나를 남겼다. 당사자가 직접 자기 뜻을 적을 수 있도록.
오후 경매 시간에는 마레온 남관의 작은 경매장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한 노부부가 가져온 것은 낡은 오르골이었다. 태엽을 돌려도 소리가 나지 않았고, 뚜껑에는 작은 균열이 있었다. 감정 기록에는 동화 여덟 닢짜리 폐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혁은 별생각 없이 손을 얹었다가 익숙한 문구를 봤다.
[무음 보관 오르골.]
[기본 기능: 외부 소리를 차단하고 내부 음을 저장.]
[잔류 기억: 한 소녀가 밤마다 같은 노래를 불렀다.]
[주의: 보관된 소리는 조심스럽게 복원할 것.]
그는 오르골을 들여다봤다. 나무 틈에는 손톱만 한 유리 조각이 끼어 있었다. 단순한 음악 장치가 아니었다. 어쩌면 유나와 제0호 감정사가 남긴 고대 음향판과 같은 계열의 기술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손님에게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마법 장치라면 더더욱 안전 점검이 필요했다.
“이건 폐품으로 팔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진혁이 말했다.
노부부는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고장 난 물건이라 가져온 건데요.”
“수리하면 소리를 보관하고 재생할 수 있는 종류로 보여요. 감정 절차를 다시 밟아 보시죠. 원하시면 수리 가능성부터 확인하겠습니다.”
할머니는 오르골을 품에 안았다. “우리 딸이 어릴 때 좋아했던 노래가 들어 있을지도 몰라요.”
진혁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렸다. 경매품의 가격을 높이는 것만이 감정사의 일은 아니었다. 어떤 물건은 높은 값을 붙이지 않는 편이 더 옳을 수 있었다. 소유자가 기억을 지키고 싶다면 그것을 팔지 않을 이유를 알려 주는 것도 감정이었다.
이튿날 작은 공방에서는 오르골의 외부 장치를 안전하게 분리해 테스트했다. 기술자가 유리 조각의 파손 상태를 검사한 뒤 낮은 출력으로 구동하자, 아주 짧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진혁은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걸었다. 바닷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그는 문득 이 일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물건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누구에게 돌려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화려한 보물보다 낡은 물건 한 조각이 사람을 웃게 할 수 있었다.
세리아가 복도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어.”
“사장님이 그 말을 하시면 월급이 오르는 걸로 이해해도 됩니까?”
“그럴 줄 알고 회계 담당자에게 새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했지.”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수습 기간 끝났어. 정식 감정사로 승급시키겠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멘 경매장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하루하루 해고당하지 않는 것만이 목표였다. 이제는 경매장과 도시의 안전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됐다. 그는 가슴 안쪽에서 낯선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제 책상도 바뀝니까?”
“책상은 그대로야.”
“의자는요?”
“의자는 새것으로 바꾸자. 네가 이제 의자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붙이니까.”
두 사람이 웃고 있을 때 벨라가 회계실에서 뛰어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봉투가 들려 있었다.
“사장님, 화령에서 온 서신입니다. 제0호 인쇄 원판과 마레온 유리판을 비교한 결과가 나왔어요.”
세리아의 표정이 바뀌었다. “뭐라고?”
벨라는 숨을 고른 뒤 봉투를 내밀었다.
“제0호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랍니다. 그건 오래된 감정 장치의 자리 번호래요. 그리고 그 번호의 실제 역할이…… 거래가 시작되기 전에 무효를 선언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있대요.”
진혁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루멘 심실의 냉각관, 화령의 인쇄 원판, 제9창고의 인쇄틀, 검은 망치 토큰.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었다.
'다만 제0호 장치의 작동을 중단시킨 마지막 책임자의 이름은 말소되어 있으며, 원본 대조 자료가 필요하다.'
그 아래에는 누군가 후대에 덧붙인 듯한 작은 글씨가 있었다.
'다음 원본 대조 시각: 왕도 에르반, 겨울 첫 경매.'
진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마레온의 하늘은 맑았지만 먼 수평선에는 회색 구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 상대는 항구의 낡은 창고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름을 사고판다는 거짓말은 왕도의 거대한 경매장에서 더 비싼 값에 팔릴지도 몰랐다.
“사장님.”
“왜?”
“승급한 첫 출장은 왕도입니까?”
세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계약서에 출장 가능이라고 썼어.”
“이상하네요. 제 계약서엔 분명히 적혀 있어야 하는데.”
“무슨 말?”
진혁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위험수당 별도.”
복도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하지만 그의 손안에 든 서신은 무거웠다. 그것은 100화 동안 쌓여 온 비밀을 끝내는 문서가 아니라, 다음 경매를 알리는 초청장이었다.
제10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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