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항의 밀물은 아무 때나 들어오지 않았다. 마레온의 선원들은 바람보다 먼저 조수표를 확인했다. 바람이 거칠어도 물이 빠지는 시간이라면 대형 화물선은 기다려야 했고, 잔잔한 날에도 항로의 바닥이 드러나면 작은 배조차 좌초했다.
제9창고를 조사한 다음 날, 항만 경비대는 창고 내부에서 찾아낸 조수 추와 하중 저울을 봉인했다. 문제는 저울이 움직일 때의 기록이 없다는 점이었다. 외항의 오래된 수문은 십이 년 전 수해 이후 몇 차례 교체되었고, 당시의 조수 눈금이 지금에도 맞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확인한 흔적은 물이 드나든다는 것뿐이죠.” 카렌이 말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물을 보내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에요.” 진혁도 인정했다.
그날 오전 루멘의 작은 회의실에는 항만 기술자와 보존사, 경비대 기록관이 마주 앉았다. 벨라는 회의실의 난로를 켰고, 미란은 수문의 옛 설계도 위에 붉은 연필로 점을 찍었다. 창고 안에서 바닷물이 밀려드는 방향과 지도에 표시된 배수구의 방향이 조금 달랐다.
“배수관이 개량되었다면 이런 차이는 생길 수 있어요.” 미란이 설명했다. “그런데 제9창고 바닥에는 옛날 바닥 높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죠. 물이 오래전 설계대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럼 밑으로 내려가면 되는 건가요?” 라일이 물었다.
“당신은 항상 왜 먼저 내려갈 생각부터 해요?”
“어릴 적 직업 교육을 그렇게 받았거든요.”
카렌이 그를 쳐다보자 라일은 두 손을 들었다. “농담입니다. 지금은 기술자 말을 듣겠습니다.”
항만 기술자는 오래된 수문의 잔해를 조수에 맞춰 고정할 도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새 장비를 들여오면 금화가 열 닢 넘게 들었다. 그러나 보존사가 가져온 난파선 재활용품 목록에는 폐기 예정인 조수 고정용 닻이 있었다. 금속이 녹슬고 손잡이가 부러져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은 물건이었다.
진혁은 목록의 사진 한 장에서 시선을 멈췄다. 보통 닻에는 선박의 무게에 맞춰 뿔이 달리지만, 사진 속 닻은 아래쪽이 둥글고 옆으로 세 개의 작은 날개가 나 있었다. 물속에서 무엇인가에 매달리기보다 특정 위치에서 회전하지 않도록 설계된 모양이었다.
“이거 확인해 봐도 됩니까?”
잠시 뒤 네 사람은 외항 북쪽의 해체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괴수 뼈처럼 굽은 선체 골격과 잘린 증기 관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쇳가루가 섞인 빗물이 웅덩이에 고여 주황색 막을 만들었고, 해체장 뒤편에서는 인부들이 대못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해체장 주인은 커다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그 닻은 그냥 고철이오. 선박에 매달기에는 날개가 작고, 밧줄을 묶을 고리도 부러졌지.”
“고철값은 얼마죠?”
“동화 열다섯 닢.”
진혁은 못 들은 척 다른 녹슨 물건을 구경하다 돌아왔다.
“동화 다섯 닢이면 가져가겠습니다.”
“다섯 닢? 내 마당 청소비도 안 되는데!”
“어차피 다음 주에 용해로에 보내실 거잖아요. 운반비가 들 텐데.”
해체장 주인은 코웃음을 쳤다. “젊은 감정사라더니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구먼.”
결국 값은 동화 일곱 닢으로 정해졌다. 대신 진혁이 직접 운송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벨라가 나중에 운송비까지 계산할 것 같아 진혁은 짐수레가 얼마인지 먼저 물었다. 라일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도 이제 경매 낙찰가와 실제 비용이 다르다는 걸 배우셨군요.”
“저도 사람입니다. 같은 실수를 백 번씩 하지는 않죠.”
그는 손바닥을 닻의 몸통에 대었다.
[조수 고정구.]
[원래 용도: 수로의 미세 회전량을 고정하는 기준점.]
[잔류 기억: 붉은 깃발 세 개, 물이 뒤집히는 밤.]
[손상: 중심축 일부 마모.]
한순간 눈앞에서 짙은 물이 거꾸로 흐르는 그림자가 스쳤다. 진혁은 손을 떼고 계단에 앉았다. 새삼 자신의 능력이 무서웠다. 저렇게 생생한 장면을 보아도 그것이 오늘의 위험을 예언하는 것인지, 수십 년 전 누군가의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
“쓸 수 있을까요?” 미란이 물었다.
“본래 조수 고정구였을 가능성이 있어요. 하지만 중심축 상태는 기술자가 봐야 합니다. 물속에 바로 넣지는 마세요.”
실제 시험에서는 마모된 날개 하나가 뜻밖의 변수였다. 장치를 회전판에 올리자 중앙축이 특정 방향에서 밀렸다. 미란은 금속 얇은 판을 덧대고, 하중을 반으로 줄인 뒤 반복 시험을 진행했다. 진혁은 여섯 번째 시험이 끝나서야 긍정적인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보조 기준점으로는 가능합니다. 단독으로 수문을 고정하는 건 금지예요.”
“일곱 닢짜리가 도시를 구하는군요.”
“아직 도시를 구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제 기분이라도 구하면 안 됩니까?”
미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곱 동화에 낙찰받은 고정구를 해체장 밖으로 운반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됐다. 작은 지게차를 부르면 은화 한 닢이 넘는다는 말을 들은 진혁은 나무 수레를 빌렸지만, 바퀴 하나가 자갈 틈에 빠졌다. 라일은 옆에서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었다.
“도와줄 생각 없어요?”
“당신이 그렇게 자랑하던 투자 수익을 보여 달라는 중입니다.”
“제 투자 수익이 지금 부서지게 생겼잖아요.”
카렌이 줄을 잡자 라일도 결국 힘을 보탰다. 수레가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며 진흙이 튀었다. 세 사람의 바짓단은 똑같이 더러워졌다.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 전만 해도 루멘에서는 누가 누구를 속였는지 확인하느라 무거운 얼굴로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화 일곱 닢 때문에 새벽 항구를 떠밀고 있었다.
노점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는 동안 카렌은 진혁의 손바닥을 봤다. 그의 손가락 마디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능력을 사용한 뒤 나타나는 통증이었다.
“매번 이렇게 아파요?”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평생 돈이 없던 것보다 덜 아프죠.”
“농담 말고요.”
그가 머뭇거리자 카렌이 이어 말했다.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당신이 다쳐 버리면 남는 건 없어요. 앞으로는 적어도 확인 가능한 부분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요.”
진혁은 그녀를 바라봤다. 단호하지만 성급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라일이 그 모습을 보고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이, 저기 찻집 주인에게 신랑신부 할인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볼까요?”
카렌이 곧장 외쳤다. “물어보면 당신 수당에서 뺄 거예요.”
라일이 얌전히 찻잔을 들었다. 진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뜨거운 차를 들이켰다가 혀를 데었다.
항구 맞은편에는 낮은 벽돌집이 줄지어 있었다. 작은 집들의 마당마다 씻은 그물이 걸렸고, 아이들은 굴러가는 나무통을 따라 달렸다. 라일은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자신에게도 저런 평범한 오후가 있었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은 물에 젖은 지도의 가장자리를 찢어 놓은 것처럼, 일부분만 남아 있었다. 그가 그리워하는 곳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날 구름은 항구 저편에 낮게 걸려 있었다. 먼바다에서 돌아온 배들이 물기를 털어 내듯 연기를 뿜었다. 진혁은 먼 길을 돌아온 선원들의 발밑을 바라봤다. 두툼한 장화에는 검붉은 진흙이 엉겨 붙어 있었다. 마레온에서는 물건이 도착한 장소보다 어디를 거쳐 왔는지를 아는 사람이 진짜 거래를 잘한다고 했다.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의 단서가 떠올라도 그 사이에 어떤 길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오후에는 배달인 조합의 옛 장부 열람 허가가 떨어졌다. 라일은 황동 표에 남은 숫자와 과일 창고에서 보관하던 배달 명부의 번호를 비교했다. 종이들은 습기를 먹어 가장자리가 부풀어 있었지만, 오래된 접수인의 도장은 남아 있었다. 그 안에서 같은 세 갈래 매듭이 찍힌 서류를 찾아낸 건 카렌이었다.
‘제9창고. 일곱 번째 썰물. 봉인품 전달 대기.’
전달 담당자 이름은 긁혀 있었다. 대신 받는 사람 칸에 ‘빈 의자’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물건을 의자에게 배달하라고 했다고요?” 진혁이 말했다.
“이건 사람 이름이 아니라 접수용 암호일 수 있어요.” 라일이 대답했다. “조합에서는 안전하지 않은 물건을 맡기면 실제 주소 대신 확인 문구를 적기도 했어요.”
그는 서류 뒤쪽을 가리켰다. 어린아이의 글씨처럼 비뚤어진 글자 한 줄이 있었다. ‘기다리면 문을 열어 준다고 했다.’
라일의 손이 멈췄다. 그는 그 글씨를 따라 쓰려고 하다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기억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 문장을 누가 말했는지는 알고 싶어요.”
저녁 무렵 조수 고정구를 이용한 첫 수로 측정이 진행됐다. 기술자들이 줄을 연결해 구간별 물높이를 기록했고, 경비대는 어둠이 내려오기 전에 모두 철수시켰다. 진혁은 작은 돈으로 낙찰받은 물건이 실제 조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장부 열람실에서 나온 뒤 라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배달인 조합의 오래된 접수대는 여전히 손바닥만 한 흠집이 가득했고, 서류를 보관하던 철제 상자에는 자물쇠를 떼어 낸 자리만 남아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 이곳에 왔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회색 종이를 접어 작은 배를 만들던 손놀림은 낯설지 않았다.
“당신, 종이접기도 잘합니까?” 진혁이 물었다.
“돈이 없으면 놀이도 공짜여야 하거든요.”
라일은 오래된 포장지 한 장을 가져와 종이배를 만들었다. 바닥에 놓인 종이배의 안쪽에는 세 갈래 매듭을 그려 넣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렸다는 사실에 놀라 손을 멈췄다. 잠시 뒤 어린아이가 접수대 앞을 지나며 그 배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라일은 종이배를 건네주고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카렌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기억을 다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다만 지금 떠오른 것이 실제 과거라고 너무 빨리 믿지는 마세요.”
“그럼 뭘 믿으란 말이죠?”
“당신이 오늘 그 아이에게 종이배를 줬다는 사실이요.”
그 말은 뜻밖에 오래 남았다. 라일은 길모퉁이에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아이는 여전히 종이배를 들고 있었고, 아침 햇빛이 어린 손등에 닿아 있었다. 라일은 처음으로 과거를 찾는 것과 현재를 잃지 않는 일이 반드시 서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측정 결과는 더 이상했다. 제9창고 바로 아래의 물높이가 다른 구간보다 낮게 기록된 것이다. 밀물이 들어오는 중인데도 그곳만 물이 빠지고 있었다.
미란은 기록지를 세 번 확인한 뒤 말했다.
“오차가 아니면 저 밑에 물을 빨아들이는 다른 통로가 있어요.”
그리고 일곱 번째 썰물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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