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 외항의 아침은 내항보다 한 시간 먼저 시작됐다.
해가 방파제 위로 떠오르기 전부터 부두에는 짐수레 바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고, 물에 젖은 밧줄을 끌어올리는 인부들의 어깨에서는 흰 김이 났다. 멀리 방벽 바깥의 바다는 검은 쇳가루처럼 일렁였다. 파도에 밀려온 해초와 석탄 먼지, 염장 생선 냄새가 뒤섞인 길을 서진혁은 코트를 여미며 걸었다.
“낭만적인 초대장이군요.”
그가 손에 든 종이를 흔들었다. ‘제998호 원부 원본 보관처 확인 요청. 시작가: 당신이 지울 수 있는 이름 하나.’
“정식 경매장이면 출품 책임자와 보관료부터 적어야죠. 이런 건 낭만보다 사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카렌 하르트는 장갑 낀 손으로 모자를 고쳐 썼다. 그녀의 옆에는 항만 경비대의 조사관 두 명이 있었다. 오랜 친구에게 부탁해서 데려온 사병이 아니었다. 창고 출입 기록 확인과 불법 거래 신고 접수에 관한 공식 동행 명령이 내려온 뒤였다. 명령서에는 조사가 가능한 시간과 압수 절차가 적혀 있었다.
“상대가 사람 이름을 지우겠다고 협박했는데 왜 곧장 체포하지 않아요?” 라일이 물었다.
“협박 문구만으로 발신인을 특정할 수 없으니까요. 장소를 빌린 사람부터 확인해야죠.”
“제 입장에선 훔친 물건을 돌려놓는 사람을 기다렸다 붙잡는 편이 더 쉬울 것 같은데.”
“당신 방식으로 해결하면 증거가 사라집니다.”
라일은 부두 끝에 늘어선 저장 창고를 가리켰다. “저도 이제 증거를 남길 줄 안답니다. 예를 들면 저기 제9창고가 다른 창고들과 다르게 밤새 등불을 켜 둔 점.”
제9창고는 삼층 높이의 짙은 적벽돌 건물이었다. 예전에는 고래 기름을 정제한 마력 윤활유를 쌓아 두었다지만, 유출 사고 뒤 내부 설비를 뜯어내고 임시 통관 보관소로 사용해 왔다. 북쪽 벽에는 오래된 파도 높이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눈금 맨 위에 표시된 수위는 사람 키 두 배를 넘었다. 항만 노동자들은 그 선을 ‘흑조선’이라 불렀다. 십이 년 전 큰 해일이 외항을 휩쓸었을 때 바닷물이 닿았던 높이였다.
문 앞에는 새 자물쇠가 걸려 있었으나 바닥의 먼지는 낯설었다. 짐수레 바퀴가 지나간 줄이 세 개, 두 사람이 끌고 간 긴 상자 자국 하나. 진혁은 출입문 틈에 낀 종이 조각을 보았다. 하역 표지의 한 귀퉁이였다.
[적재 기록: 제9창고 보관 구역 B.]
[표기된 소유자: 기재 없음.]
[참조 번호: 998-보조 운송.]
그에게만 보이는 글자는 그곳에서 멈췄다. 종이의 과거를 읽는 능력은 기억 조각을 보여 주었지만, 누가 합법적인 주인인지 결정하지는 못했다. 진혁은 코끝을 찡그렸다.
“이거 보조 운송 표예요. 원부 자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초청장에는 원본 보관처라고 적었을까요?” 카렌이 물었다.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은 단어만 골랐겠죠.”
경비대 조사관이 문을 열자 안에서는 물을 먹은 나무 냄새가 쏟아졌다. 높은 창으로 들어온 잿빛 빛줄기가 공중의 먼지를 갈랐다. 창고 가운데에는 천을 덮은 빈 진열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둘레로 관객석처럼 의자를 원형으로 배치해 두었지만, 좌석 번호가 여덟에서 갑자기 열로 넘어갔다. 아홉 번째 의자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일부러 비운 겁니다.” 라일이 바닥을 가리켰다. 네 개의 의자 다리 자국 가운데 한 자리는 밝은 네모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하면 없어진 자리가 더 눈에 띄니까.”
벽에는 오래된 선박 운항표가 붙어 있었다. 그 위에 희미한 먹으로 ‘반환 예정’이라는 글씨가 찍혔다. 세리아가 알려 준 마레온 심실의 검수표에도 있었던 표현이었다. 진혁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때 창고 뒤에서 낮은 쇳소리가 났다. 경비대가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움직임은 천천히, 체계적이었다. 세 사람은 뒷문을 살폈고 다른 조사관은 통로를 지켰다. 사방이 텅 빈 것처럼 보이던 공간에서도 누가 어디로 빠져나갈 수 있는지 계산하는 모습이었다.
그 소리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흔들리는 추였다. 진열대 아래에 매달린 철제 저울이 물결에 따라 좌우로 기울어졌다. 바닥 아래에는 항구 조수와 연결된 좁은 배수로가 있었다. 진혁은 시험 삼아 진열대에 손을 얹었다.
[임시 전시대.]
[과거 용도: 선박 적하 하중 시험용 받침.]
[기억 잔류: 누군가 '이름을 받는 척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두통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그는 손을 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진열대는 물건을 전시하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저 아래에서 무게 변화를 감지하려는 용도예요.”
카렌이 동행한 기록관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기록관은 종이 위에 빠르게 선을 긋고 눈금을 적었다. 추를 움직이자 배수로 안에서 다른 무언가가 맞부딪쳤다. 밖의 파도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별도의 장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창고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진혁은 이 건물이 지닌 오랜 시간을 새삼 느꼈다. 항구 쪽으로 난 창틀에는 방파제에서 실려 온 소금 가루가 하얗게 굳어 있었다. 기둥 사이에는 오래전에 끊어진 운반용 쇠사슬이 매달렸고, 위층으로 이어지는 화물 승강기의 손잡이는 닳아 반들거렸다. 마레온의 부두는 언제나 무언가를 들여오는 곳이었다. 어느 날은 마법사의 유물이, 어느 날은 생선 상자와 광석이, 또 어느 날은 살아 있는 사람이 계약서를 들고 들어왔다. 물건은 구분해 놓았지만 사람들의 사정은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았다.
한쪽 벽에는 십이 년 전 수해 때 돌아오지 못한 인부들의 이름이 동판으로 붙어 있었다. 진혁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동판의 가장 아래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동자 세 명을 뜻하는 가느다란 선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름이 없어도 죽음을 잊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남겼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초대장의 문구가 이전보다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카렌은 그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도시에서 이름이란 단순한 글씨가 아니에요. 출입증이 되고, 세금 장부가 되고, 실종자 신고서가 되고, 누군가의 귀가를 기다리는 이유가 되죠.”
“그러니까 가볍게 지우겠다는 말이 무서운 거군요.”
“바로 그거예요. 종이를 훼손한다고 사람의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 서류를 믿고 행동하면 피해는 실제로 생겨요.”
진혁은 초대장을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이곳에 자신만의 신비한 능력을 시험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한 줄의 기록 때문에 삶이 달라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창고 앞 길에는 두 사람의 갈등과 무관하게 장사가 계속됐다. 파란 앞치마를 두른 소년이 갓 구운 소금빵을 팔았고, 늙은 선원은 젖은 양말을 갈아 신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부두의 일상은 사건 때문에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진혁은 이 평범한 움직임이 모두의 싸움에 걸린 값이라는 생각을 했다.
창고 관리인은 오전 늦게 도착했다. 밀려 있는 통관 서류 탓에 경비대의 호출을 받고도 바로 오지 못했다며 거듭 사과했다. 그는 제9창고를 일주일 동안 임대한 사람이 항만 상인 조합의 중개인이라고 했다. 임대 계약자는 ‘에다르 크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보증금은 보통 임시 전시회의 세 배였다.
“전시품이 비싸 보이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냈죠?” 진혁이 물었다.
“관객이 많으면 바닥 수리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야간 사용료도 포함했습니다.”
“관객 명단은요?”
“들어오는 사람에게 현장에서 지급한다더군요. 우리는 공간만 빌려준 겁니다.”
세리아는 별관에서 전신으로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녀는 제9창고의 단서를 루멘 심실 기록과 섣불리 같은 물건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말했다. 특히 지하의 모라와 연결된 설비는 안전 진단 중이어서 어떤 실험도 허용할 수 없었다.
“예. 경매장부터 무너지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진혁이 말했다.
“그런 말을 네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사장님, 직원의 성장은 급여표에도 반영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경비대 기록에 네 농담부터 남기게 하자.”
전신이 끊겼다. 웃고 나자 진혁은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라일은 진열대 뒤에서 낡은 황동 고리를 발견했다. 자신에게 보내진 소포의 표와 크기가 비슷했다. 황동 표와 맞춰 보려는 순간 그는 손을 멈췄다. 기록관 앞에서 비슷한지 먼저 측정하자고 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내 이름을 알려 주겠다는 물건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더 확인해야죠.” 카렌이 답했다.
바람이 열린 문으로 밀려들자 의자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원형으로 놓인 자리들 가운데 빈 아홉 번째 자리가 유독 검게 보였다. 창고 관리인이 무심코 바닥을 가리켰다.
그보다 조금 앞서 진혁은 창고 안에서 작은 흔적을 하나 더 봤다. 진열대 아래 금속판의 한쪽에는 숫자들이 짧게 새겨져 있었다. 물건의 무게를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다른 번호 세 개가 같은 수치에 연결되어 있었다. 인부 한 명의 무게를 계산한 것이 아니었다. 수레와 상자를 함께 올렸을 때 나오는 하중을 일부러 맞춘 흔적이었다.
진혁이 기록관에게 그 부분을 보여 주자 기록관은 수첩에 위치와 깊이를 옮겨 적었다. 그는 항만에서 이십 년 넘게 화물 사건을 조사했다며, 무게가 같아도 물건이 같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운송 사기에서 가장 흔한 수법이 상자의 무게만 맞춰 내용물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세운 사람이 정말 증인이었다면, 의자를 왜 치웠겠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기록관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숫자 가운데 마지막 하나를 가리켰다. 998. 그 옆에는 조그마한 금이 있었다. 금이 아니라 누군가 칼로 새긴 사선이었다. 그 흔적을 바라보던 라일이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조합에서 빈자리 표시할 때 이런 사선을 쓰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게 여기에도 같은 의미인지는 모르겠네요.”
진혁은 더 묻지 않았다. 라일이 과거와 가까워질 때마다 견디는 고통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 역시 손바닥의 능력을 사용하고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어제 저녁에 분명히 의자 하나를 더 넣어 달라고 했어요. 사람 한 명을 세우겠다고.”
“누구를요?” 진혁이 물었다.
관리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름 대신 숫자를 적었습니다. 제998호의 마지막 증인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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