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루멘 경매장 북측 선반 뒤에서 발견된 금속 패에는 세리아가 유나를 마지막으로 본 날보다 사흘 뒤의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서진혁은 날짜를 처음 보았을 때 읽는 순서를 잘못 이해한 줄 알았다. 그러나 경매장 기록과 항만의 연호를 대조한 결과 적힌 날짜는 분명했다.
세리아는 조용한 회의실에서 그 숫자를 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바다에 떠 있는 부표들이 밀물에 맞춰 흔들렸다. 평소라면 그녀는 손님을 만나고 경매 일정을 점검하느라 앉아 있을 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일들을 뒤로 미뤘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사라진 뒤 누군가가 남긴 시간표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나가 살아 있었다는 뜻일까요?” 라일이 물었다.
“아니.” 세리아가 천천히 말했다. “그날 누군가 이 패를 만들었거나 날짜를 새겼다는 뜻이지. 유나가 직접 했다는 뜻은 아니야.”
진혁은 그녀가 그 말을 어렵게 꺼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기대가 생기면 버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희망을 증거로 바꾸는 순간, 그 희망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기 쉬워진다.
회의실에는 이벨린 코르트와 경비대 기록 담당자, 외부 보존사까지 모였다. 지난 며칠 동안 따로 발견된 자료가 드디어 같은 탁자 위에 놓였다. 화령의 출품번호 000 봉인함 사진, 마레온의 998번 검수 표, 유나와 레온의 오래된 시험기록, 코르트 가문의 저울, 그리고 선반 뒤 금속 패. 한 장씩만 보면 뜻이 흐릿했지만, 날짜를 나란히 놓자 서로 맞지 않는 지점들이 나타났다.
화령 봉인함의 일부 나사는 최근에 교체됐다. 마레온의 상자는 오래된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잡이 주변에는 최근 덮개를 치운 흔적이 있었다. 두 상자가 같은 물건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둘 다 여덟 기준점을 공유했다. 누군가 오래된 감정 표준을 알고 그 형태를 다시 쓰고 있었다.
정유라가 화령에서 보내 온 공증된 측정 결과도 도착했다. 두 상자의 여덟 점 간격을 도면 위에 겹치자 대부분이 일치했지만 네 번째와 일곱 번째는 어긋났다. 소연이 만든 도장 측정판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문서를 찍는 기구를 위한 배치였고, 다른 하나는 기록을 검증하는 기구를 위한 배치에 가까웠다. 따라서 원본과 복제라는 단순한 구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한쪽은 서류를 만들고, 한쪽은 그 서류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장치였을까요?” 카렌이 말했다.
“가능성이 있죠.” 진혁이 답했다. “하지만 아직 구조 확인이 필요해요.”
이벨린은 코르트 가문의 저울이 그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묻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이 부당하게 뒤집어쓴 배상 책임을 밝히고 싶어 했다. 진혁은 그녀에게 적이든 아군이든 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자료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함께 검증하자고 했다. 이벨린은 오래 생각하다 가문의 오래된 시험 비용 명세서를 내놓았다.
그 명세서에는 이상한 지출 한 줄이 있었다. ‘실험 중단 요청 접수 비용.’ 사람 하나의 거절을 별도로 기록하고 보관하기 위한 비용이었다. 금액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회계 항목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때 누군가는 거절을 절차로 인정하려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이런 데 돈을 썼을까요?” 라일이 물었다.
“기록하는 데에도 인력이 필요하니까.” 벨라가 말했다. “누군가의 반대를 받아 적고 보관하려면 비용이 들어요. 오히려 그 돈을 아끼겠다고 기록을 빼는 쪽이 더 문제죠.”
오전 열한 시에는 심실 구조 검사가 다시 시작됐다. 미란은 외부 구조 기술자와 함께 선반을 지지하는 별도 받침대를 설치할 준비를 했다. 지지대는 관로에 무게를 전달하지 않도록 바닥 기초 위에 놓였다. 모든 작업 전에 모라의 출력과 냉각관 차압이 확인됐다. 공정은 느렸지만, 어떤 값진 기록도 그보다 앞에 놓이지 않았다.
진혁은 좁은 점검로 입구에서 미란의 손짓을 기다렸다. 그동안 그는 벽면 바닥에 붙어 있던 작은 구리표를 보았다. 처음에는 정비 인부들이 쓰는 흔한 부품표 같았지만, 구리표 가장자리에 새겨진 표시는 여덟 기준점 중 일곱 개만 갖고 있었다. 여덟 번째 자리에는 얇은 빈 홈이 있었다.
“여기도 비어 있네요.” 그가 말했다.
미란은 구리표를 카메라로 기록했다. 그것은 과거의 보조 정지 회로와 연결된 구형 표식일 가능성이 있었다. 작동 여부를 모르므로 누구도 홈을 누르지 않았다.
작업이 끝나자 선반 아래에 좁은 공간이 확보됐다. 상자를 움직이지 않고도 금속 패의 뒷면에 빛을 비출 수 있었다. 외부 보존사가 확대 거울을 통해 패 가장자리의 작은 기호를 읽었다. 글자는 오래되어 상당 부분 닳았지만, 마지막 네 글자는 비교적 또렷했다.
‘보류권자.’
그 아래에는 사람 이름을 적는 빈칸이 있었다. 누군가 한때 그곳에 이름을 썼다가 긁어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진혁의 손바닥이 갑자기 화끈거렸다. 그는 즉시 한 걸음 물러났다. 최근 몇 주 동안 능력을 억지로 쓰지 않으려 노력했고, 이번에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가느다란 글씨가 떠오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대상: 제1기록의 보조 검증 패.]
[남은 기능: 대조할 기록이 존재할 때 차이를 표시한다.]
[주의: 원기록 부재. 판단 불가.]
고작 그 세 줄이 전부였다. 정보는 강렬하지 않았지만, 손바닥 안쪽을 바늘로 찌르는 통증이 밀려왔다. 카렌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진혁 씨.”
“괜찮아요. 더 보지 않을게요.”
“괜찮지 않은 얼굴인데요.”
그는 밖으로 나와 의자에 앉았다. 미란이 물을 가져왔고, 세리아는 어떤 결론도 서두르지 않았다. 진혁이 본 것은 개인의 제한적인 감각일 뿐이었다. 그 문장을 토대로 작업 순서를 바꾸려면 다른 기술자의 확인이 필요했다.
오후가 되자 화령에서 연락이 왔다. 윤담과 정유라가 공동 보관 중인 인쇄 원판의 보수 부품을 분리 검사한 결과, 제8칸 부분에 오래된 교체 흔적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교체 전 형태를 추정한 도면은 마레온 금속 패의 빈 홈과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두 곳의 장치가 서로를 검증하도록 설계됐을 수도 있었다.
“그걸 누가 이용하려는 건지도 알겠군요.” 세리아가 말했다.
“아직은 모릅니다.” 진혁이 답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건, 누군가 다시 그 빈칸에 사람 이름을 써 넣으려 한다는 점이에요.”
해 질 무렵 진혁은 경매장 위층의 작은 창가에 서 있었다. 아래쪽 광장에서는 상인들이 짐을 정리하고 있었고, 도로에 물을 뿌리는 인부들이 빗자루로 먼지를 밀어냈다. 루멘 경매장 내부의 시계는 여전히 정확하게 움직였다.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는데도 도시의 하루는 놀라울 만큼 평범했다.
카렌이 차 두 잔을 가져왔다. 진혁은 금속 패에서 본 짧은 문구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담보를 받기 전에 돌려줄 것: 선택권.’ 예전의 그는 어떤 보물이든 진가를 알면 결국 팔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면 그 물건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받아도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요즘엔 돈 이야기를 잘 안 하네요.” 카렌이 말했다.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나쁜 변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혁은 그녀를 바라봤다. 창밖의 마지막 햇빛이 카렌의 얼굴 한쪽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순간 그녀에게 할 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겁을 먹던 날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두려움, 그녀가 곁에 있어 버틸 수 있었다는 사실. 그러나 입을 열자 평소 같은 농담이 튀어나왔다.
“혹시 제 가치가 올랐다는 뜻입니까?”
카렌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런 질문을 하는 동안은 아직 멀었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그래도 어떤 일이 생기든 혼자 먼저 도망치지는 마요.”
“그건 약속할 수 있어요.”
“도망치려면 같이 도망치자는 뜻이었는데.”
진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복도를 따라 번졌다. 모든 답을 알아내지 못해도, 함께 있는 동안은 견딜 수 있다는 감각이 그의 마음에 남았다.
아래층에서 벨라가 올라왔다. 그녀는 수습된 안전 기금 집행표와 앞으로 열릴 구조 검사의 비용 추계를 건넸다. 지출은 여전히 많았지만, 임시 구조 검사가 시작됐고 위험 구역에 대한 책임 구분도 명확해졌다. 진혁은 그 장부를 한참 바라본 뒤 서류 맨 위에 작은 문구를 적었다. ‘완료가 아니라 진행 중.’
그때 창밖에서 경매 종료 종이 울렸다. 그는 종소리를 끝까지 들었다. 오늘은 누군가가 값을 더 부르는 소리보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하루를 마쳤다는 사실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그때 라일이 자리를 떴다가 돌아왔다. 오늘 새벽 루멘에 도착한 소포 하나를 찾았다고 했다. 보낸 사람과 배달 주소가 모두 정확했지만, 발송 날짜가 열두 해 전으로 적혀 있었다. 봉투에는 오래된 배달인 조합의 각인과 라일이 어릴 적부터 기억하던 세 갈래 매듭이 함께 묶여 있었다.
“이 매듭을 알아요.” 라일이 말했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에 장난기가 없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이 쓰던 방식입니다.”
카렌은 봉투를 받아 들며 봉인 상태를 확인했다. 보존 담당자가 입회한 뒤에야 외부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작은 황동 표 하나와 짧은 쪽지가 있었다.
‘첫 기록을 찾으려거든 사람이 아니라 빈자리를 찾으십시오.’
쪽지 뒤에는 북쪽 노철에서 나온 제32후보 표와 비슷한 숫자가 있었다. 그리고 황동 표 뒷면에는 누군가 긁어 새긴 이름 두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라일은 그것을 읽지 않았다. 읽으려다 손을 멈췄다. 몇 년 동안 잃어버린 이름을 찾았지만, 누군가 건넨 글자를 그대로 자신의 이름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진혁은 그 선택이 고마웠다. 이제 그도 이해했다. 감정할 수 있는 것은 물건의 흔적이지, 그 물건 앞에 선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는 아니었다.
창밖 항만에서 저녁 종이 울렸다. 루멘의 경매 망치는 오늘도 누군가의 물건 값을 정했고, 지하의 모라는 제한된 출력 안에서 조용히 버티고 있었다. 경매장은 아직 안전 검사를 끝내지 못했으며 제0호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달라졌다. 진혁은 더 이상 혼자 모든 답을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벨라가 보내 온 긴급 출품 조회서에는 새로운 공지가 있었다.
‘제998호 원부의 원본 보관처 확인 요청. 응찰 자격: 기록을 지킬 의사가 있는 자. 예정 장소: 마레온 외항 제9창고.’
시작가는 금화가 아니었다.
‘당신이 지울 수 있는 이름 하나.’
진혁은 서류를 접어 세리아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무엇을 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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