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혁이 태어나기도 전에 작성됐다는 계약서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소식은 이튿날 오전까지 루멘의 내부 소문으로만 남아 있었다.
세리아는 계약서 원본을 분리 보관하고, 가문 대리인 이벨린 코르트에게서 접수 확인증을 받아 두었다. 서류가 위조인지, 나중에 덧쓴 것인지, 혹은 누군가 원래 문서를 이용해 만든 가짜인지 아직 구별하지 못했다. 진혁은 자신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았다. 이름을 없애면 모순도 사라질 거라고 믿는 순간, 화령의 범인들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그가 창고 복도에서 카렌을 만난 것은 오전 열 시쯤이었다. 카렌은 잠을 설친 얼굴이었다. 이벨린이 가져온 계약서와 아버지 레온의 안전 검토 문서가 같은 시기에 작성됐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밤새 비교 자료를 뒤졌다.
“오늘도 이름 때문에 싸우게 생겼네요.” 진혁이 말했다.
“오늘은 사람보다 물건부터 확인해요.” 카렌이 답했다. “물건이 있었던 자리에 누가 접근했는지.”
세 사람은 중앙 홀의 보관실을 조사했다. 코르트 저울은 수십 년 전부터 출품 보류 목록에 있었지만, 창고를 옮길 때마다 다른 임시번호가 붙었다. 그중 한 기록은 이상하게도 심실 북측 선반의 부품과 같은 운송 조합을 사용했다. 루멘의 여러 부서가 필요한 물건을 한꺼번에 실어 나르던 시기였으므로 그것만으로 비밀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래서 숫자가 무섭습니다.” 진혁이 말했다. “똑같이 보이는데 하나는 재고번호고 하나는 사고번호예요.”
라일은 저울 아래 받침에 얇은 종이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출품 금지 봉인을 훼손하지 않도록 외부 보존사를 불렀다. 종이는 오래된 운송 표식이었다. ‘제998기록 사용 금지’라는 글씨 아래 누군가 동그라미를 그려 놓았다. 그 동그라미는 화령 인쇄 원판의 여덟 기준점과 비슷했지만 순서가 달랐다.
정오 무렵 이벨린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가문의 법무 담당자가 동행했다. 그녀는 저울의 소유권을 되찾는 일 외에도 그 저울에 연결된 기록물의 열람권을 요구했다. 세리아는 계약서의 효력이 확인되면 정당한 권리는 돌려주겠다고 답했지만, 다른 사람의 개인 기록이나 모라의 상태까지 열람하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당신들은 늘 누군가를 보호한다며 물건을 숨겨 놓지요.” 이벨린이 말했다. “하지만 그 물건으로 우리 집이 잃은 것이 있다면요?”
카렌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엇을 잃었습니까?”
이벨린은 잠깐 망설였다. 코르트 가문은 오래전 루멘에 부품 납품을 했고, 시험이 실패한 뒤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공식 기록에는 납품품의 결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벨린의 조모는 죽기 전까지 고장이 난 것은 물건이 아니라 실험 기록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가문은 그 사실을 증명할 문서를 찾고 있었다.
진혁은 그녀의 말을 듣다가 질문을 바꿨다. “그럼 저울을 팔거나 그 기록을 이용해 남의 이름을 지우려는 게 아니라, 누가 잘못을 저질렀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군요.”
“그렇다고 해 둡시다.”
“그 말로는 부족해요.” 카렌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 가문이 알고 있는 자료를 모두 내놓아야 공동 검증이 가능합니다.”
잠시 대치가 이어졌다. 이벨린은 계약서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가, 마침내 작은 사진판 한 장을 꺼냈다. 오래된 시험실에서 사람 여섯 명이 서 있는 사진이었다. 그중 두 사람은 얼굴이 분명했다. 유나와 레온. 나머지는 장비 뒤에 가려져 있었다. 가장자리에 서 있는 작은 아이는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라일이 무의식적으로 사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카렌도 그것을 알아챘다. 작은 아이의 어깨 위에 배달인 조합의 오래된 표식이 있는 망토가 걸려 있었다.
“저 애가 누군지 압니까?” 진혁이 물었다.
“그날 임시 기록 보조를 맡은 아이예요. 본명은 기록에서 지워졌다고 들었습니다.” 이벨린이 말했다.
라일은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자신의 잃어버린 이름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낯선 사진 한 장에 반응하는 자신을 숨기기 어려웠다.
라일은 이벨린이 가져온 사진을 확대경 아래에 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소년이 매듭진 망토를 입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얼굴이 옆으로 향해 있었고,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왔다. 라일은 자신의 오래된 기억 속에도 그런 옷을 입은 아이가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한번 본 얼굴이면 기억할 줄 알았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진혁은 그의 곁에 의자를 끌어다 놓았다. “모르는 걸 억지로 기억할 필요는 없어요.”
“저한테는 필요합니다. 이게 정말 저라면, 누가 저를 지웠는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럴수록 다른 자료가 필요하죠. 그 애가 누구든 함부로 당신이라고 적을 순 없잖아요.”
라일은 기분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잠시 뒤 사진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건 맞네요.”
카렌은 사진판 가장자리에 찍힌 조합 문장을 확인했다. 망토의 매듭은 과거 항만 배달인들이 짐을 묶을 때 쓰던 표식과 같았지만, 여러 조합에서 비슷한 형태를 사용했다고 했다. 사진에 적힌 날짜는 마침 레온과 유나가 시험회의에 참석한 날이었다. 따라서 소년의 정체를 확인하려면 당시 출입 명부가 필요했다.
진혁은 배달인 조합의 오래된 사무소 위치를 알아냈다. 지금은 과일 창고가 들어선 곳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 세 사람은 좁은 시장길을 걸어 그 건물 앞까지 갔다. 길가에서는 생선을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한쪽 처마 아래에는 배달 아이들이 비를 피해 모여 있었다. 가방을 멘 아이들이 서로의 손목에 작은 끈을 묶어 준 뒤 달려 나가는 모습을 라일이 가만히 바라봤다.
“저렇게 끈을 묶으면 길을 잃어도 어느 조합인지 알 수 있거든요.” 그는 말했다. “예전에는 이름 대신 매듭을 먼저 배웠습니다.”
과일 창고 주인은 오래된 장부를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전 세입자의 짐이었지만 함부로 처분하지 않고 보관실에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진혁은 정식 열람 허가를 받기 위해 담당 조합과 연락하기로 했다. 그날 당장 장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라일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고 했다. 자신의 기억이 완전히 허공에 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진혁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늘은 훔치지 않았는데도 단서를 얻었군요.”
“이제야 제 직업이 좋아 보이죠?”
“아뇨. 훔치는 게 여전히 빠르긴 해요.”
카렌이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오래 남는 건 정식 기록입니다.” 라일이 재빨리 덧붙였다.
진혁은 웃었다. 이 사람이 잃어버린 이름을 찾는 데 언젠가 자신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답을 대신 결정할 수는 없었다.
오후에는 심실의 임시 지지대 설계가 완성됐다. 경매로 마련한 계약금 덕분에 외부 구조 기술자의 정식 진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만 예상보다 오래된 벽체가 발견돼 지지대를 설치하기 전 추가 측정이 필요했다. 미란은 모라의 제한 출력을 유지하면서도 상부 하중을 분산시킬 수 있는 경로를 찾았다.
“봉인함을 들어낼 필요는 없을 수도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상자를 받치는 선반 아래에 독립된 지지대를 먼저 설치한다면요.”
진혁은 선반 뒤쪽에 있는 제1기록 금속 패를 생각했다. 그 패를 꺼낼 수 있다면 과거 실험의 진짜 순서를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하중 계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록 한 장을 얻으려고 모라의 안전을 걸 수는 없었다.
세리아는 이벨린과 두 번째 면담을 마친 뒤 분쟁 기록을 공개 열람 가능 부분과 비공개 부분으로 나눴다. 이벨린은 저울의 상태를 확인할 공동 감정인을 보내겠다고 했고, 가문의 과거 배상 문제도 별도 검토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진혁 이름이 적힌 계약서의 효력에 관해서는 아직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신들은 너무 느려요.” 이벨린이 떠나기 전에 말했다.
“빠르게 잘못 결정하면 그 비용을 누가 책임집니까?” 진혁이 되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브로치의 낡은 문장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말했다. “우리 가문은 그렇게 잘못된 결정을 떠안고 십 년 넘게 살았어요.”
진혁은 그녀가 왜 조급해하는지 조금 이해했다. 오래된 빚은 계산서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 자기 잘못이 아닌 돈을 갚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증거를 얻기 위해 무리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무리를 받아 주는 것이 옳은 방법은 아니었다.
벨라는 경매장 정산서와 별개로 코르트 가문의 청구 금액을 적어 놓았다. 진혁이 멍하니 그 숫자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돈에 관한 기록은 마지막에 반드시 누군가가 확인해야 합니다. 그게 빠지면 다음 사람에게 비용이 넘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998원부가 사람의 이름을 거래하던 장부였다면, 돈의 흐름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내일은 오래된 안전 시험의 비용뿐 아니라 실제로 누가 돈을 냈는지도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날 밤, 진혁은 혼자 창고 옆 휴게실에 앉아 계약서를 살폈다. 비슷한 서명, 오래된 날짜, 익숙한 숫자들. 누군가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게 만들려고 역사를 움직이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 말에 약간의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의문부터 들었다. 왜 하필 자기 이름일까. 자신의 능력으로만 읽히는 문장이 그들의 계획에 정말 필요할까.
카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진혁의 손에 남은 붕대를 보더니 조용히 앉았다.
“무서워요?”
진혁은 한참 만에 말했다. “제가 뭘 팔아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라, 남들이 자꾸 저를 물건 취급하는 게 싫습니다.”
“그럼 안 팔면 됩니다.”
“그게 그렇게 쉬워요?”
“누가 당신을 평가할 권리가 있는지부터 물으면 되죠.”
그녀는 농담하지 않았다. 진혁은 조금 웃었다. 인간을 동화와 금화로 나누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도 잠깐 감정사라는 직업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세리아가 급하게 불렀다. 외부 기술자가 선반의 하중 검토를 마쳤고, 상자를 움직이지 않은 채 금속 패를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됐다는 것이다. 다섯 명의 입회인이 모인 자리에서 거울과 얇은 조명을 넣자 패의 전체 문장이 드러났다.
‘제1기록. 담보를 받기 전에 돌려줄 것: 선택권.’
그 아래에는 한 문장이 더 있었다.
‘거절을 봉인한 자는 감정사가 아니다.’
진혁은 오랫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제0호가 남긴 유산이 어떤 보물인지보다, 그 유산이 왜 거래를 멈추게 하려 했는지가 조금씩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금속 패 뒷면에서 발견된 날짜는 그 모든 생각을 뒤집었다. 세리아가 유나를 마지막으로 본 날보다 사흘 뒤였다.
제8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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