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멘의 지하에는 지도에 없는 층이 있었다.
세리아는 그곳을 ‘심실’이라고 불렀다. 지하 삼층 봉인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일반 직원용 도면에 표시되지 않았다. 검은 돌벽 한쪽에 일곱 개의 작은 고리가 나란히 박혀 있었고, 세리아가 구리 반지를 가장 마지막 고리에 끼우자 벽 전체가 조용히 갈라졌다.
안쪽에서 젖은 바다 냄새가 났다.
진혁은 먼저 등불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카렌이 뒤를 따랐고, 라일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언제든 돌아설 수 있도록 문을 살폈다. 헥터는 지상 경비를 맡아 남았다. 누구라도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지하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위층에는 아직 백 명이 넘는 직원과, 영문도 모르고 거래를 이어 가는 상인들이 있었다.
계단 아래쪽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벽에는 소금 결정이 허옇게 끼어 있었고, 돌 사이사이로 검푸른 혈관처럼 굵은 줄기가 뻗어 있었다. 그것들은 박동이 올 때마다 조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진혁은 어느 순간 자신이 건물의 지하가 아니라 거대한 생명체의 내부로 들어가고 있다는 감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온 사람은 많지 않아.”
세리아가 말했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더 적고.”
“그런 말씀은 내려오기 전에 해 주셔야죠.”
진혁이 대꾸하자 라일이 뒤에서 웃었다.
“왜요? 들었으면 안 왔을 겁니까?”
“물론 왔겠죠. 대신 유언장 정도는 쓰고 왔을 겁니다.”
카렌이 손등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말은 농담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농담조차 들으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었다. 앞에서 걷는 세리아의 뒷모습은 이상하게 작아 보였다. 언제나 손님들 위에 서서 가격을 정하던 사장도 이곳에서는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지막 계단 끝에는 둥근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고, 가운데에는 검은 물이 고여 있었다. 호수라고 부르기에는 작았지만 웅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어 보였다. 물 위로 흰 빛줄기가 기둥처럼 내려와 있었고, 그 빛 속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떠 있었다.
진혁은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사람의 아이만 한 존재였다. 은빛 피부에 긴 귀가 있었고, 머리 위에는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뿔이 두 개 솟아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가슴은 아주 느리게 오르내렸다. 팔과 다리에는 투명한 실이 수십 가닥 연결돼 있었다. 실 끝은 사방의 벽으로 이어져 있었다.
“저게 그 괴수입니까?”
그가 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로는.”
세리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 아이는 그 이름을 싫어해.”
아이의 눈이 떴다. 물빛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였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천장을 울리던 심장 박동이 뚝 멈췄다가 다시 뛰었다.
“사람.”
아이가 말했다.
목소리는 물속에서 울리는 종소리 같았다. 정확히는 진혁의 귀보다 마음속에서 들렸다. 카렌도 들었는지 검집을 꽉 쥐었고, 라일은 잠깐 표정을 잃었다.
“또… 사람.”
아이는 그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분노도 환희도 없었다. 오랜만에 문이 열렸을 때 방 밖을 바라보는 아이의 호기심이 있었다.
진혁은 조심스럽게 물가에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진혁입니다.”
아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서… 진혁.”
“네. 당신은 누구죠?”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에 불안이 비쳤다. 벽을 타고 흐르던 검은 혈관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진혁은 손을 뻗어 물결 끝에 손가락을 적셨다.
[대상: 루멘의 심핵.]
[외부 명칭: 고대 괴수.]
[상태: 성장 정지, 봉인 유지.]
[잔류 기억: 구원 요청 아흔일곱 건.]
[소유권: 없음.]
[분류 오류: 생명체를 거래 물품으로 등록하려 함.]
'소유권: 없음.'
그 문장이 눈에 박혔다. 사람은 귀한 보석처럼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루멘은 살아 있는 건축물이라기보다 이 아이를 품은 거대한 보호막에 가까웠다. 괴수의 껍질이라는 감정 결과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 껍질의 목적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왜 여기에 묶여 있습니까?”
진혁이 묻자 세리아가 대답했다.
“오래전에 이 아이가 바다에서 발견됐을 때 마레온에는 큰 폭풍이 닥쳤어. 사람들은 저 아이를 재앙이라고 불렀지. 하지만 실제로 폭풍을 밀어낸 건 저 아이였어. 몸을 다치면서도 도시를 지켰어.”
“그런데 왜 봉인했죠?”
“아이의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거든. 왕과 길드장과 상인들. 누구도 직접 책임지려고 하진 않았어. 다들 도시를 지킨 힘을 사고 싶어 했지.”
세리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결국 아흔일곱 사람이 아이를 숨겼어. 이 건물의 결계를 짜고, 사람들의 탐욕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일곱 개의 규칙을 세웠지.”
진혁은 구리 반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붉은 하늘 아래 서로에게 반지를 건네던 사람들. 그들이 죽은 것은 괴수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럼 경매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사람이 무엇을 주고받는지 기록하기 위해서야. 대가 없는 약탈을 막으려고 만든 규칙이었어.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가 거래의 형식만 남겼지. 진심으로 동의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잊혀졌고.”
진혁은 물 위의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두 손을 모아 작은 원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는 듯 눈을 두리번거렸다.
“뭘 원하죠?”
그가 물었다.
아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이름.”
“당신 이름이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무서워.”
진혁은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저 아이를 부른 이름은 괴수, 봉인 장치, 상품 000 같은 것뿐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아이 자신에게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지 묻지 않았다.
“그럼 직접 지어 보는 건 어때요?”
아이가 눈을 깜박였다.
“내가?”
“네. 마음에 드는 소리를 골라요. 남에게 꼭 사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카렌이 진혁을 보며 작게 웃었다. 라일은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돈을 안 받는다고?’라고 물었다. 진혁은 그를 못 본 척했다.
아이는 한동안 생각했다. 그러다 물 위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모… 라.”
“모라?”
“모라.”
아이가 한 번 더 말했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물결이 잔잔하게 퍼졌다. 멀리서 낮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이름이네요.”
진혁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 순간 능력의 문장이 바뀌었다.
[루멘 심핵의 자칭명 등록: 모라.]
[독립된 의사 표시 확인.]
[소유권 재분류 요청 가능.]
세리아가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무릎을 꿇어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모라.”
아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세리아의 눈가가 젖었다. 진혁은 그제야 그녀가 이곳을 관리하는 사장이기 전에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를 지키려 애써 온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수는 없었다. 아이의 팔에 연결된 실은 여전히 팽팽했다.
“왜 지금까지 이름을 묻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세리아에게 물었다.
“그렇게 부르면 저 아이가 깨어날까 봐 겁났어. 깨어나면 사람들이 또 노릴 테니까.”
“잠들게 하는 것과 지키는 건 다를 수 있습니다.”
세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부정하지 않았다.
모라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진혁의 손등에 닿았다. 순간 그는 눈앞에 아주 오래된 바다를 보았다. 검은 파도 사이로 수백 척의 배가 흔들리고 있었다. 해안에는 붉은 불빛이 번졌고 사람들이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누군가는 도움을 구했고, 누군가는 쇠사슬을 들었다. 모라는 그 차이를 알지 못한 채 모두를 구하려고 했다.
장면이 끝났을 때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진혁은 시선을 들어 심실의 벽을 살폈다. 푸른 빛줄기는 모라의 어깨에서 시작해 천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뿌리처럼 얽힌 줄기들이 도시의 방벽을 향해 뻗어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해안에서 거센 폭풍이 불어도 마레온의 배들이 항구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자유항이 바다의 미궁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큰 침수 피해 없이 유지된 이유가 저 아이의 힘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마레온의 돌 방파제가 너무 튼튼해서 바다에 사는 거대 괴물들조차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방파제의 건축가를 칭송했고, 항구의 상인들은 그 덕분에 막대한 돈을 벌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힘을 공급하는 존재의 이름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저 아이는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있었습니까?”
“우리가 세는 시간으로는 수백 년.”
세리아가 답했다.
“모라에게는 그 시간이 다르게 흘렀을 거야. 잠든 동안에도 사람들의 말을 어렴풋이 들었다고 하더군.”
모라는 그 말을 듣고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물결 모양의 작은 그림들이 수도 없이 새겨져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 남긴 흔적이었다. 파도를 그린 그림 사이에는 조그만 사람 얼굴과 동그란 빵, 하늘의 별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저거 네가 그린 거야?”
진혁이 물었다.
모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들었어. 웃는 소리. 빵 달라는 소리. 엄마 부르는 소리.”
그녀는 동그란 빵 그림에 손가락을 올렸다.
“빵… 어떤 거야?”
진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는 폐기장 옆 길에서 카렌과 나눠 먹은 빵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아침을 때우는 값싼 음식이었지만 모라에게는 수백 년 동안 소리로만 들어 온 낯선 물건이었다.
“따뜻하고 조금 쫄깃해요.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러운 것도 있죠. 다음에 올 땐 꼭 가져올게요.”
모라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또 와?”
“네. 약속합니다.”
그 말에 작은 존재의 눈이 밝아졌다. 진혁은 더는 그녀를 봉인 장치나 건물의 부속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눈앞의 아이는 바깥 세상의 빵 냄새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고 싶어 했다.
“우리가 이 아이를 내보내면 도시가 위험해집니까?”
“봉인을 아무렇게나 끊으면 위험해.”
세리아가 말했다.
“모라의 몸을 거쳐 바다의 마력이 흐르고 있어. 갑자기 멈추면 항구의 방벽도 무너질 수 있지.”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은 옳고 그름의 선언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 물건의 상태와 사용하는 사람의 안전을 함께 살펴야 한다. 모라가 상품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연결된 마력선을 무작정 자를 수는 없었다.
“그럼 거래 대상을 바꾸면 되겠네요.”
“뭐라고?”
“모라를 파는 게 아니라, 모라를 안전하게 보호할 방법을 경매장에 맡기는 겁니다. 상품 000의 소유권을 넘기는 경매를 취소하고 보호 계약으로 바꾸는 거죠.”
세리아의 눈빛이 변했다.
“그런 계약은 처음 들어.”
“처음이라서 못 한다면 경매장은 왜 있는 겁니까? 새로운 물건을 감정하는 곳인데.”
그가 씩 웃었다.
모라는 세 사람의 대화를 다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대신 진혁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잡았다.
“서진혁.”
“네?”
“나… 나갈 수 있어?”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쉽게 된다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 헛된 약속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 저질러진 잘못과 다를 바 없었다.
“방법을 찾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바깥으로 데리고 갈 수 없어요.”
모라의 눈빛이 잠깐 어두워졌다.
“하지만 다시 오겠습니다.”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냥 손님처럼 만나죠. 갖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고, 제가 구할 수 있으면 구해 드릴게요.”
모라가 아주 천천히 웃었다. 천장 너머 박동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심실을 나서기 직전 진혁은 물가에 작은 금속 동전 하나를 내려놓았다. 폐기장 여인이 되돌려 준 동화 한 닢이었다. 모라는 동전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야?”
“마레온에서 쓰는 돈입니다. 값비싼 건 아니에요.”
“왜 나한테 줘?”
“처음 만난 기념으로요. 아무 대가도 필요 없습니다.”
그 순간 천장에 적힌 일곱 고리 가운데 하나가 또렷하게 빛났다.
[무상 증여 확인.]
[거래 아님.]
[봉인 규칙 제일조: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한 이전.]
진혁은 글자를 오래 바라봤다.
경매장이 만들어진 진짜 목적은 비싸게 파는 것이 아니라, 빼앗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첫 규칙을 수백 년 만에 다시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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