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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87화
PAYLUA ORIGINAL · 제87화

87화. 여덟 번째 칸의 두 가닥 선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106자

오프라인 책장
루멘 경매장의 심실에 있는 두 번째 상자를 둘러싼 소문은 예상보다 빨리 번졌다. 누군가는 제0호 감정사의 보물이 발견됐다고 했다. 누군가는 모라의 심장을 담은 관이 지하에서 나왔다고 했다. 점심 무렵에는 항만 술집에서 ‘서진혁이 하룻밤 사이에 금화 만 닢을 벌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정작 진혁은 구두 밑창이 닳아 새 신발을 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소문대로라면 제가 오늘부터 도시에서 제일 부자라는데요.” 그는 벨라에게 말했다. “도시에서 제일 부자는 미납 수당 증빙을 아직 안 낸 사람입니다.” “아, 그것까지 아시는군요.” “제가 장부를 맡았다고 몇 번 말해야 하죠?”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심실 점검로 주변에서 미세한 진동이 반복됐고, 일부 직원은 물건을 옮기는 동안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미란은 원인을 밝힐 때까지 접근 인원을 제한했다. 봉인함을 꺼내고 싶다는 요청은 벌써 네 번이나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오늘 허용된 일은 하나였다. 선반과 벽면에 남아 있는 여덟 개의 기준점을 비접촉 방식으로 기록하고, 그것이 상자 자체의 잠금 구조인지 주변 설비의 표식인지 구분하는 일. 화령에서 소연이 만든 복제 측정판은 유리 상자에 담겨 도착했다. 원본 황동 열쇠는 세리아가 따로 보관했고, 새 측정판에는 어떤 봉인도 풀 수 없도록 실제 돌출부 대신 잉크로 점 위치만 표시돼 있었다. 유나 노트의 지시처럼 열지 않고 먼저 그리는 방식이었다. 진혁과 카렌, 미란, 세리아 그리고 외부 보존사가 입회했다. 라일은 출입 통제와 관찰을 맡았다. 점검로는 좁았고 바닥 아래에 관이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만 안쪽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유리 거울과 먼 거리 계측기를 사용했다. 첫 번째 측정에서는 상자 위 여덟 점 사이 거리가 화령의 봉인함과 같아 보였다. 그러나 두 번째 각도에서 기록하자 네 번째 점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 미란이 흔들리는 관을 고정하고 다시 재자 오차는 더 커졌다. 이는 화령 상자를 진품이라고 부를 증거도, 마레온 상자가 원본이라는 증거도 아니었다. 같은 구조를 만들면서 일부 치수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일부러 다르게 만든 건 아닐까요?” 라일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죠.” 진혁이 답했다. “반대로 후대 수리하면서 바뀌었을 수도 있고요.” 보존사는 모서리의 마모 상태를 기록했다. 그때 세리아가 상자 오른쪽 아래 작은 홈을 발견했다. 네모의 한쪽이 미세하게 닳아 있었다. 화령에서 본 제8칸 표시와 형태가 닮았다. 다만 이곳에는 이름을 적는 문구 대신 서로 어긋난 두 개의 짧은 선이 있었다. “이건 뭘 뜻할까요?” 카렌이 물었다. 세리아는 대답 대신 유나의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는 여덟 칸을 그린 작은 도형 아래 글씨가 있었다. ‘일곱 사람이 소유를 증명하더라도, 여덟 번째 사람은 거래를 멈추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진혁은 그 문장을 몇 번 읽었다. 오래된 계약 체계에서 제8칸은 소유권을 추가로 얻는 자리가 아니라 거절을 남기는 자리일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거절할 권리가 있는지, 거절이 무엇을 멈추는지는 문서만으로 알 수 없었다. 미란은 지하 공간의 구조를 측정했다. 상자 뒤편에는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운 빈틈이 있었고, 그곳에서 오래된 석판 한 장이 확인됐다. 외부 보존사는 석판 표면을 벗겨 내지 않고 그림자를 이용해 문양을 읽었다. 일곱 개의 세로선 옆에 여덟 번째의 빈 공간이 있었다. “저걸 꺼내면 될까요?” 라일이 물었다. “상자가 걸쳐 있는 동안에는 위험해요.” 미란이 말했다. “선반을 해체하면 뒤 관로 하중이 어디로 옮겨가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측정 작업을 쉬는 동안 세리아는 모라의 출력 표시등이 있는 작은 관찰실을 찾았다. 유리창 아래에는 미란이 남긴 지난 일주일의 운전 기록이 놓여 있었다. 출력이 줄어든 날에도 모라를 보호하기 위한 제한 값은 그대로 유지돼 있었다. 미란은 그 기록을 자랑하지 않았다. 수치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맡은 일이라 여겼다. “모라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로 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세리아가 말했다. “어떤 반응이 뜻을 가진 것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먼저 해석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카렌이 대답했다.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루멘에 왔을 때 그녀는 건물의 울림을 특별한 힘으로만 여겼다. 지금은 그 울림 뒤에 오래 버텨 온 존재와 고장 난 기계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디를 도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혁은 밖에서 종소리를 들었다. 정오 경매를 알리는 종이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거래를 시작하고, 다른 쪽에서는 거절을 기록할 수단을 찾고 있었다. 시장의 소리와 지하의 조용한 점검 소리가 멀리서 겹쳤다. “오늘은 제 손바닥에 물어보지 않을 겁니다.” 진혁이 말했다. “왜 갑자기 선언해요?” 라일이 물었다. “제가 일을 하다 보면 자꾸 말을 안 듣는 것 같아서요. 누군가 들어야 할 것 같거든요.” 카렌은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봤다. “제가 잘 듣고 있어요.” 진혁은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천장 너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매장 상부에서 큰 화물이 내려놓이는 소리였다. 하지만 심실의 센서는 예상보다 큰 반응을 보였다. 차압계가 순간적으로 흔들리고, 모라의 출력 표시등이 노랗게 변했다. 미란이 손을 들었다. “작업 중단. 바깥으로 나갑니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상자 쪽을 향했다. 손바닥이 따가웠다. 무엇인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각이 사실인지 유물의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카렌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필요한 건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세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물러나자 미란은 비상 차단 밸브를 점검했다. 다행히 출력은 몇 분 안에 안정됐다. 그러나 이 작은 흔들림은 상자가 어떤 보물인지보다 지하 시설의 안전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 줬다. 점검로 바깥에는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봉인함에 대한 소문보다 안전 문제를 더 걱정했다. 창고에서 오랫동안 일한 올란은 지하 진동이 커질 때마다 작은 물건이 선반에서 흔들린다고 말했다. 반면 남관 경매사는 영업을 너무 오래 줄이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상인들이 다른 경매장으로 갈 거라고 했다. “우리도 살아야 할 거 아니오.” 경매사가 말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다치면 그 장사는 누가 합니까?” 올란이 받아쳤다. 서로 큰소리를 내던 두 사람은 세리아가 들어오자 조용해졌다. 그러나 세리아는 누구를 꾸짖지 않았다. 그녀는 직원들의 우려를 한쪽 장부에 적고, 기술자들이 확인한 실제 위험 구간을 다른 쪽에 적었다. 매출 손실과 부상 위험을 한 문장으로 덮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진혁은 이 장면을 보며 경매가 가진 이상한 성질을 생각했다. 가격이 붙으면 사람들이 비교하기 쉬워지지만, 모든 것을 같은 단위로 비교해 버리면 정말 중요한 것이 빠질 수 있었다. 한쪽 장부에 적힌 은화 열 닢의 손실과 다른 쪽 장부에 적힌 사고 위험은 같은 줄에 넣을 수 없었다. 미란은 임시 조치를 제안했다. 북측 점검로는 완전 폐쇄하고, 다른 통로에는 경고 표식을 보강하며, 무거운 물품 운반은 진동이 적은 시간대로 제한할 것. 동시에 구조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상부의 하중 시험을 멈춰야 했다. 작업자 대표는 위험 수치가 높아지면 즉시 근무를 중단할 수 있는 규정도 요구했다. “그건 원래 있어야 할 조항이죠.” 세리아가 말했다. 담당자는 새 지침에 작업 중지 권한을 명시했다. 진혁은 펜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려다봤다. 제8칸에 거래 중지 권한을 기록했다는 옛 제도도 결국 이렇게 평범한 필요에서 시작됐을지 모른다. 상자 속 보물보다 누군가 ‘안 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들을 절차가 중요했다. 회의가 끝난 뒤 진혁은 올란에게 다가가 창고 바닥에 쌓인 나무판을 함께 옮겼다. 올란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감정사가 그런 일도 하나?” “네. 게다가 물건을 옮기면 장부도 좀 더 정확해지겠죠.” “그게 의도였군.” 진혁은 웃었다. 두 사람은 손상된 목재와 수리할 수 있는 장비를 구분했다. 값싼 물건이 많았지만 그중에는 아직 쓸 만한 부속품도 있었다. 사람들 앞에 공개 경매를 열려면 누가 소유한 물건인지 먼저 정리해야 했고, 그 작업은 한두 시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후 회의에서 두 의견이 맞섰다. 오래된 봉인함을 즉시 제거해 심실을 비우자는 쪽과, 봉인함을 움직이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현 상태를 유지하자는 쪽이었다. 진혁은 어느 편도 쉽게 들지 않았다. “조건이 없으면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움직일 수 있는 하중과 위험 범위를 계산하고, 모라에 부담이 생기는지 확인한 다음 결정합시다.” 세리아는 자금 문제를 숨기지 않았다. 정밀 구조 검사와 임시 지지대 설치에는 돈이 들었다. 루멘은 이미 방벽 제한 출력과 대체 부품 개발로 예산이 빠듯했다. 진혁은 자신이 준비한 계산표를 내밀었다. 최근 장터에서 발견한 방진 섬유를 활용한 소형 시험권 수익과 경매장 안전 적립금을 합쳐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결국 또 경매를 해야겠네요.” 라일이 말했다. “그건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죠.” 진혁이 답했다. “다만 비밀 상자를 상품으로 내놓는 건 아닙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루멘에 쌓인 불용 설비와 수리 가능한 유물들을 투명하게 재감정해 공개 경매에 올리는 방안을 제안했다. 처분 가능한 물건과 보존 대상, 소유권 미확정 물건을 구분하면 안전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세리아는 계획이 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외부 보존사가 미란에게 작은 도면을 건넸다. 상자 뒤 석판의 여덟 번째 빈 공간에는 사실 미세한 표시가 하나 더 있었다. 사람이 글씨를 쓰다 멈춘 흔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손가락을 걸 수 있도록 파인 홈이었다. “멈추라는 표시가 아니라 실제로 멈출 수 있게 만든 장치일지도 몰라요.” 보존사가 말했다. 진혁은 도면을 바라봤다. 거래를 거절하는 권리가 종이에 적힌 문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기계 구조 자체에 반영돼 있었다면, 누군가는 그 권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저녁에 심실의 오래된 제어반을 정리하던 미란이 더욱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손가락 홈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제어선이 두 가닥 있었는데, 하나는 현재 모라의 출력 조절기에 이어져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오래전에 끊긴 채 벽 안으로 사라져 있었다. 그 선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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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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