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릭이 가져온 계약서는 비싸게 보이는 종이 위에 아주 싼 잉크로 작성돼 있었다.
서진혁은 종이를 손에 잡지 않은 채 빛에 비추어 보았다. 일반 상업 계약에는 발주자와 인수자, 물건의 소유권과 지급 날짜가 명시돼야 했다. 그런데 이 계약서는 대금을 받는 사람만 확실했고, 돈을 보내는 쪽은 대리 계정으로 가려져 있었다. 화령에서 경험한 위조 동의 서류와 비슷한 냄새가 났지만, 성급히 같은 조직이라고 부를 근거는 없었다.
“당신이 왜 우리에게 이걸 보여 주는지부터 듣고 싶습니다.” 카렌이 말했다.
아드릭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브레덴 상회는 몇 년째 항만 부품 거래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가 경쟁자에게 중요한 영업 정보를 넘긴다면 상회에서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링을 낙찰받은 뒤 이상한 조건을 알게 됐고, 누군가 루멘 설비의 빈 공간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고 했다.
“나는 수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건물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요.”
진혁은 차가워진 홍차를 내려놓았다. 아드릭의 말이 진심이더라도 계약서가 진짜인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세리아는 브레덴 상회에 공식 조회 요청을 보내고, 카렌은 계약서의 인장과 지급 계정의 출처를 조사하기로 했다. 계약을 보여 준 일만으로 아드릭의 죄가 없어지는 것도, 그가 범인으로 확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미란이 옛 조선소의 장부를 가져왔다. 방수 천은 과거 루멘 냉각관의 방진 시험에 쓰였고, 품질 검수 서명란에는 유나의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날짜 옆에 다른 서명이 하나 더 있었다. 카렌은 그것을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레온 하르트.
“아버지 이름이에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그 이름은 검의 소유권 기록과 북쪽 기록고의 사고 명부에서 여러 번 발견됐다. 카렌은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문서 위에서 다시 만날 때마다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살아 있을 때 레온은 집에 돌아오면 검을 닦는 것보다 먼저 구두의 흙을 털곤 했다. 카렌이 어린 시절 그에게 왜 그렇게 흙을 싫어하냐고 묻자, 그는 흙이 집에 들어오면 집을 떠나온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그 기억은 세리아의 사무실에 서 있는 지금까지 따라왔다.
“당신 아버지가 루멘의 계약까지 맡았던 거예요?” 진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을 수도 있죠. 하지만 서명만 보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카렌은 숨을 고르고 서류를 다시 들었다. 레온의 서명은 서류 아래쪽 경고 표시와 함께 적혀 있었다. ‘안전 검토 참여, 매각 권한 없음.’ 그 옆에는 투명한 방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원본 여부를 확인하려면 당시 경비대가 쓰던 검정 인장과 비교해야 했다.
일행은 오후 늦게 항만 수비대의 옛 문서 보관소를 찾았다. 바람이 잘 들지 않는 붉은 벽돌 건물이었고, 입구에는 오래된 해양 사고의 희생자 이름을 새긴 동판이 있었다. 카렌은 문 앞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그녀의 아버지 이름은 그 명단에 없었다. 레온의 죽음은 공식 전투도 항만 사고도 아닌, 누군가의 모호한 보고서에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보관소 담당자는 신분과 열람 권한을 확인한 뒤 서류를 꺼내 주었다. 레온이 경비대의 대외 기술 안전 자문을 맡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루멘은 신형 마력 펌프를 설치하며 방수 재료를 시험했고, 경비대는 주변 주택가의 안전을 점검했다. 레온은 그 시험회의에 참석했다. 그렇다면 그의 서명이 나타나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험을 끝냈다는 승인 문서에는 이름이 없었다. 마지막 실험의 승인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검게 지워져 있었다.
“이렇게 지운 기록도 열람할 수 있나요?” 진혁이 물었다.
“원본을 보존한 기록은 있어요. 다만 공개 제한을 푸는 별도 절차가 필요합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라일은 길고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제가 잠깐 창문으로 들어갔다 오는 게 빠르겠네요.”
카렌이 단호히 말했다. “그러면 문서가 법정에서 쓸모없어져요.”
“농담입니다. 반쯤은.”
진혁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도둑이 몰래 가져온 서류도 도움이 된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신원과 생사가 걸린 사건에서 자료가 언제 어떻게 확보됐는지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진혁은 담당자가 가져온 표와 관인 도장을 가까이 비교해 보았다. 보관소의 공식 문서에는 종이 귀퉁이에 두 개의 작은 압착 점이 있었다. 하나는 기록 담당자가 원본과 대조했다는 표시이고, 하나는 열람 신청이 적법하다는 표시였다. 그중 어느 것도 글씨가 사실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인장이 많아질수록 믿음직해 보였는데요.” 진혁이 말했다.
“인장은 누가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 보여 줄 뿐입니다.” 담당자가 답했다. “틀린 판단에 도장을 찍을 수도 있으니까요.”
카렌은 서류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아버지는 최종 승인자가 아니라 ‘위험 징후 보고자’로 기록돼 있었다. 그 표현 때문에 그녀는 잠깐 안도했다. 적어도 아직은 레온이 누군가의 권리를 마음대로 판 사람이었다는 근거가 없었다. 동시에 그가 왜 마지막 시험에 없었는지도 더욱 궁금해졌다.
라일이 진혁에게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 도둑은 흔적을 안 남기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흔적을 얼마나 남겼는지 확인하고 있네요.”
“흔적을 많이 남긴다고 전부 정직해지는 건 아니죠. 하지만 확인할 곳은 생기잖아요.”
카렌은 그 대화를 들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레온이 기록을 남긴 이유를 자신이 상상하는 이야기로 채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사실로 남은 날짜와 서명, 그 곁에 적힌 작은 제한 문구를 하나씩 옮겨 적었다.
담당자는 대신 공개 가능한 시험 일정표를 제공했다. 그 표에는 놀라운 점이 하나 있었다. 방진 시험은 폭풍 경보로 한 차례 연기됐고, 원래 실험에 참여하던 유나와 레온이 모두 마지막 일정에서 빠졌다. 하지만 실험은 결국 진행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동의한 적 없는 일을 누군가 승인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날 누가 시험실에 있었는지 확인해야겠네요.” 카렌이 말했다.
“원본 출입 기록은 아직 남아 있을까요?”
“남아 있다면요.”
보관소를 나오기 전 카렌은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작은 전시실에 들렀다. 유리장 안에는 항만 수비대가 예전에 쓰던 붉은 어깨띠와 비상 신호장치, 오래된 순찰대의 일지가 놓여 있었다. 카렌은 어릴 적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오던 소금 냄새를 기억했다. 부두에서 돌아온 날에는 옷에 바닷물이 말라 희끗한 자국이 남곤 했다. 레온은 딸이 그 자국을 이상하게 여길 때마다 바다와 싸우고 돌아왔다는 농담을 했다.
전시실 구석에 낡은 나무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경비대 기록 대조석’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담당자는 이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일지를 두 권씩 펼쳐 놓고 같은 날의 기록을 확인했다고 했다. 레온이 그 일을 실제로 맡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남긴 ‘매각 권한 없음’이라는 글귀가 우연은 아닌 듯했다.
“기록을 서로 확인하는 건 좋은데, 어떤 사람은 그 기록을 바꿀 권한까지 가지려고 했겠죠.” 진혁이 말했다.
카렌은 의자 가장자리를 만지지 않은 채 바라봤다. “그래서 아버지가 보증과 권한을 나눠 적었을지도 몰라요.”
돌아오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가로등이 바퀴 자국에 고인 물을 비추고,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빵을 품에 안고 길을 건넜다. 카렌은 오래전 항만 수비대의 근무 시간표를 펼쳐 놓았다. 레온이 루멘을 방문한 날은 대개 도시의 축제 직후였다. 축제 때는 경매장이 늦게까지 열리고, 경비대는 추가 순찰을 돌았다. 그가 위험 유물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출입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언젠가 저 분을 실제로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알게 되겠죠.” 진혁이 말했다.
“그게 두려워요.” 카렌은 시선을 떨궜다. “제 기억과 다른 사람이면 어쩌죠?”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당신에게 좋은 아버지였던 날들이 사라지는 건 아닐 겁니다.”
카렌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 비에 젖은 계단을 오르는 부부가 보였다. 남편이 먼저 올라가다가 아내를 위해 한 손을 내밀었다. 카렌은 무심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검을 쥐는 데 익숙한 손이었지만 누군가를 믿고 잡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진혁은 마차가 급히 방향을 바꿀 때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바닥을 받쳤다. 카렌은 그가 상처 난 손을 쓰지 않도록 손목을 조심히 밀어 돌려 주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문서 열람 결과는 정식 보고서로 남겼다. 진혁은 레온이 보낸 공식 안전 검토 의견의 마지막 장에 주목했다. 거기에는 기계 시험이 진행될 때마다 외부 관찰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서명은 확인됐지만 왜 다음 실험에서 그 조항이 빠졌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빈자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날 밤 카렌은 루멘의 빈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 방파제의 등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보냈다. 그녀는 레온의 서명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비뚤어진 ‘하’ 자 끝이 기억 속 아버지의 글씨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닮았다는 사실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진혁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손에는 따뜻한 차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오늘은 다들 일찍 쉬라는데요.”
“당신부터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 손은 오늘 쉬었습니다. 머리는 좀 더 일할 수 있고요.”
카렌은 차를 받아 들었다. 진혁은 그녀 곁에 앉았지만 위로의 말을 서두르지 않았다. 결국 카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죽던 날, 저는 아버지에게 화를 냈어요. 위험한 일에 자꾸 끼어들지 말라고요. 그런데 그날이 마지막 대화였죠.”
진혁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때 하신 말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걱정해서 하신 말이니까.”
“그걸 알아도 후회는 남아요.”
“그럼 오늘은 후회 말고, 아버지가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한 가지라도 더 알아낸 걸로 해요.”
카렌은 눈가를 문질렀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차가 식지 않게 컵 받침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 작은 행동이어서 오히려 고마웠다.
회의실 문 밖에서 라일이 나타났다. 그는 몰래 서류를 훔친 것이 아니라 보관소 담당자에게 정식으로 전달받은 추가 자료를 들고 있었다. 담당자가 공개 가능한 기록을 다시 분류하다 오래된 방문자 명단의 사본을 찾아낸 것이다.
“레온 이름 옆에 공동 입회인 표기가 있더라고요.” 라일이 말했다. “그리고 그분의 서명이 또 있어요.”
사본의 맨 끝에는 ‘유나’가 있었다. 그 아래 더 작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제8칸 비워 둠. 물건보다 사람 먼저.’
카렌은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무언가를 막으려 했다는 단서 하나가 생겼다.
그리고 진혁은 깨달았다. 빈칸은 실수가 아니었다. 누군가 반드시 남겨야 한다고 판단한 자리였다.
제8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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