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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84화
PAYLUA ORIGINAL · 제84화

84화. 열지 않은 상자의 소리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303자

오프라인 책장
998번 반품품이 보관돼 있다는 남관 창고는 경매장의 화려한 로비 뒤쪽, 문을 세 번 꺾어야 닿는 좁은 장소였다. 로비에는 새 옷을 차려입은 의뢰인과 경매사를 기다리는 고객들이 모여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구두 굽이 부딪힐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났고, 안내원들은 금박이 둘린 책자를 건넸다. 반면 창고 쪽에는 거친 나무 상자와 젖은 포대, 포장용 짚이 쌓였다. 경매장에서 물건의 가치가 태어나는 곳은 무대 위지만, 그 가치가 맞는지 따지는 일은 대개 이런 어수선한 방에서 시작됐다. 창고지기 올란은 진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이번에는 뭘 또 찾아온 건가? 지난번엔 폐품 상자를 뒤져서 이틀 치 작업표를 다시 쓰게 만들더니.” “이번엔 상자를 뒤집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제일 많이 뒤집더라고.” 올란의 걱정과 달리 오늘 진혁은 물건을 만질 생각부터 하지 않았다. 반품 대장에는 ‘소리 없는 계약의 견본’이라고 적힌 지워진 문구와 함께 출고 후 재입고 세 번이 기록돼 있었다. 보관 창고는 매번 달랐다. 마지막으로 돌아온 곳이 남관이었다. 그들이 찾은 것은 종이 상자 하나였다. 안에는 두꺼운 마분지에 감싼 얇은 음각판 네 장과 흰 종이 한 묶음이 들어 있었다. 음각판에는 경매사의 손글씨처럼 생긴 문양이 있었지만, 유물 감정표에서 기대하는 마력 반응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실패한 기록 장치라며 반품했다. “이상하네요.” 세리아가 말했다. “유나는 소리 기록에 관심이 많았지만, 사람을 속이는 데 쓰는 걸 싫어했어요.” “그럼 지웠다는 말이 꼭 삭제를 뜻하는 건 아닐 수 있죠.” 진혁이 말했다. 올란이 물건을 열람대에 올리고 수량을 확인했다. 네 장 가운데 두 장은 귀퉁이가 부러져 있었다. 나머지 두 장에는 희미한 홈이 이어졌는데, 화령의 은판처럼 말을 기록하는 홈과는 방향이 달랐다. 기록원 출신의 노감정사가 판을 기울여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낭독을 가로채는 물건이 아니라, 원래 시끄러운 곳에서 작은 소리를 걸러 내는 시험판 같군요. 예전에는 경매실마다 울림이 달랐거든.” 진혁은 그 말을 정식 의견서에 적게 했다. 한 사람의 기억만으로 분류를 바꿀 수는 없었다. 창고에는 비슷한 음향 장치가 여럿 있었고, 안전한 장소에서 대조해야 했다. 시험을 시작하기 전 진혁은 판의 옛 거래 내역을 확인했다. 첫 반품 때는 소리가 제대로 남지 않는다는 이유가 적혀 있었고, 두 번째 반품에는 사소한 잡음이 커진다는 불만이 있었다. 세 번째에는 구매자가 아예 ‘손님들의 비밀 이야기를 녹음할 수 없는 물건’이라고 항의했다. 진혁은 마지막 문구에 빨간 밑줄을 그었다. “이건 원래 목적에 대한 오해일 수도 있어요.” 그가 말했다. 경매실의 기록 장치는 모두 같은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공개 선언을 기록하는 판, 낙찰 순간의 망치 소리를 보존하는 판, 위탁자가 공개하고 싶지 않은 신상 정보를 걸러 내는 판이 따로 있었다. 그중 일부는 외형만 보고 기능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쓰지 않는 동안 담당자도 바뀌어 물품 분류가 엉켜 버린 것이다. 올란은 물건을 돌려받을 때마다 화를 냈다고 했다. 대체 왜 똑같이 생긴 판을 다른 목적에 써야 하냐고,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 거면 제품마다 큰 글씨로 써 놓으라고 불평했다. 진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지적입니다. 경매장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분할 수 있어야 해요.” “지금이라도 내가 옳았다는 게 인정되는 건가?” “네. 대신 반품품을 오래된 창고에 아무 설명 없이 쌓아 둔 일은 따로 검토해야겠죠.” 올란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자네가 틀린 게 없군.” 기술자들은 판 네 장을 먼저 사진에 찍고 각기 다른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균열이 있는 판은 작동 실험에서 제외했다. 성능이 남아 있다 해도 진동을 가하다가 깨지면 위험했다. 상태가 양호한 두 장에도 천을 직접 대지 않도록 얇은 유리 받침을 썼다. 라일이 장난삼아 판을 두드리려는 시늉을 하자 카렌이 엄하게 손목을 잡았다. “농담이었습니다.” “여기선 농담도 실험 기록에 남길 겁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준비하고 나니 진혁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거대한 비밀에 대한 두려움이 세밀한 절차 속에서 잘게 나뉘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봉인된 상자를 한 번에 열지 못해도, 오늘은 판 하나가 무엇을 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시험은 남관 뒤쪽 빈 감정실에서 진행됐다. 밖에서는 수산물 경매 종이 울리고, 앞마당에서는 마차가 짐을 내리고 있었다. 라일은 가벼운 소리굽쇠를 손에 들었고 미란은 장치 연결을 감독했다. 카렌은 출입문을 닫으며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먼저 기준 소리를 녹음판에 남겼다. 그다음 오래된 시험판을 중간에 세우고 같은 소리를 냈다. 평범한 기계라면 주파수 일부를 막아 소리가 낮게 들릴 뿐이다. 그런데 이번 판은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남기고 종의 긴 울림을 줄였다. 라일이 귀를 기울였다. “재미있네요. 선반 삐걱거리는 소리는 잘 들리는데 사람 목소리는 멀어져요.” “사람 목소리를 지운 게 아니에요.” 미란이 설명했다. “어떤 소리가 더 강하게 통과하는지 달라지는 거죠.” 진혁은 두 번째 판으로 순서를 바꿔 실험했다. 이번에는 작은 손목시계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두 판을 포개는 순간 바닥 아래에서 올라오는 일정한 진동만 남았다. 시험자는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도시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 세 걸음씩 걷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입니까?” 라일이 물었다. “아뇨.” 미란의 표정이 굳었다. “심실 쪽 펌프 작동 주기예요.” 진혁은 숨을 멈췄다. 남관 감정실은 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두꺼운 돌과 관로를 지나온 진동이 시험판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소리를 지운 종이라는 설명은 소음을 제거해 중요한 신호를 듣게 하는 장치를 가리켰을 가능성이 컸다. 진혁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두 판을 서둘러 분리하고 시험 결과를 정리했다. 시험 도중 들린 진동은 모라의 심장이라기보다 펌프와 비슷한 주기를 보였다. 무엇을 들었는지 분명히 확인하려면 설비 측정기와 함께 대조해야 했다. “이런 걸 사 가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진혁이 물었다. 올란이 귀를 번쩍 세웠다. “팔겠다고?” “보관 중인 물건을 제가 마음대로 팔 수는 없죠. 그런데 활용 가치가 확인되면 재감정을 신청할 수 있잖아요.” “또 돈 얘기군.” 카렌이 말했다. “보수 비용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모라에게 밥값을 청구할 수는 없잖아요.” 루멘의 경매규정에 따르면 반품품은 원위탁자의 소유권 확인이 끝나야 다시 출품할 수 있었다. 그런데 998번 물건은 출처가 흐렸다. 진혁은 판매 대신 제한된 시험 사용 계약을 제안했다. 보존 자료 자체는 보관하며, 음향 장치를 필요로 하는 항만 구조대에 시험 데이터만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안전 검증을 통과하면 실험 자문료가 발생하고, 일부를 펌프 점검 비용에 보탤 수 있었다. 벨라는 계약서를 보고 처음으로 진혁에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물건을 팔지 않고 돈을 벌겠다는 거네요.” “네. 드디어 회계실에서 칭찬받을 방법을 찾았습니다.” “칭찬은 정산 뒤에 해요.”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남관의 고참 경매사가 시험 결과를 보러 왔다. 그는 이 장치가 처음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서기관들은 큰 경매에서 관객들의 환호가 너무 커서 정작 낙찰을 거절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누군가 중요한 말만 따로 보존하려는 음향판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고 했다. “돈을 더 부르는 사람은 언제나 잘 들렸지. 그만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작은 목소리였어.” 노경매사가 중얼거렸다. 진혁은 그 말이 유나 노트의 제8칸과 이어지는 듯해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개인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수 있었다. 그는 경매사에게 당시 기록 담당자의 이름을 물었다. 노인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오래된 행사 안내장에 제조 공방의 이름이 남아 있을 거라고 말했다. 카렌은 즉시 그 안내장을 열람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서류는 별관 자료실에 남아 있었다. 장부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훼손됐지만, 장치의 이름만큼은 분명했다. ‘침묵 확인판’. 작은 거절을 알아듣게 한다는 제작 설명도 적혀 있었다. 진혁이 장치를 다시 바라봤다. 사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남아 있는 물건이 아니라, 누구도 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었을지도 몰랐다. 오후에는 심실에서 같은 음향 대조를 진행했다. 이번에는 출입자를 엄격히 제한하고, 모라가 불안정한 구간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미란은 외부 안전 장치와 파형 기록기를 연결했고, 진혁과 카렌은 점검로 입구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소리의 크기보다 패턴이 중요했다. 세 번의 짧은 진동 뒤, 비정상적으로 긴 멈춤이 있었다. 멈춤은 북측 관의 차압계가 움직이는 시점과 맞아떨어졌다. “상자가 원인이라는 건가요?” 진혁이 물었다. “아니요.” 미란이 단호히 말했다. “지금 알 수 있는 건 그 구간의 진동 전달이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선반이 진동을 막는지, 관이 느슨한지, 아래에 빈 공간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 해요.” 라일이 선반 아래로 손전등을 비추었다. 미세한 석분 속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가 낮게 탄성을 냈다. “여기에는 상자보다 큰 물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미란은 재빨리 그를 뒤로 물렸다. 아래쪽은 관로가 지나는 곳이라 무턱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담당 구조 기술자가 천천히 내시경 거울을 집어넣자, 선반 뒤 벽면에 직사각형의 빈 공간이 보였다. 상자는 그 공간을 가리듯 바깥쪽에 놓여 있었다. 진혁은 화령의 출품번호 000 봉인함을 떠올렸다. 모두가 뚜껑을 열고 싶어 했던 물건. 그런데 마레온에서 중요한 것은 상자 안이 아니라 상자 뒤쪽이었다. 세리아가 말을 꺼냈다. “유나가 꺼내지 말라고 한 이유가 이거였을까?” “아직은 모르죠.” 진혁이 대답했다. “하지만 소리 없는 종은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 가리킨 방향도요.” 그때 모라 쪽의 점검등이 다시 번갈아 켜졌다. 이번에는 세 번 짧게, 한 번 길게. 미란의 계측기에도 같은 순서의 진동이 남았다. 진혁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존재의 의사를 함부로 번역하는 것은 누군가의 침묵을 동의로 바꾸는 일과 닮아 있었다. 그는 다만 점검표에 적었다. ‘신호의 반복 관찰. 의미 미확정.’ 관 뒤 빈 공간에는 종이가 아니라 금속 패가 놓여 있었다. 문이 좁아 꺼낼 수 없었지만, 거울에 비친 글씨 몇 자는 읽혔다. ‘제1기록 — 담보를 받기 전에 돌려줄 것.’ 라일은 한동안 눈을 깜박였다. “남의 물건을 감정하는 사람들한테 뭘 돌려주란 거죠?” 진혁은 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모라의 진동은 세 번 짧게 울렸다가 길게 멈추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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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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