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83화
PAYLUA ORIGINAL · 제83화

83화. 심장이 아니라 펌프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119자

오프라인 책장
세리아는 아무것도 꺼내지 말라는 지시를 세 번 읽고서야 종이를 내려놓았다. 아침빛이 회계실 책상 위로 넘어왔다. 먼지 섞인 빛이 영수증 모서리와 잉크 얼룩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세리아는 젊은 시절 유나와 함께 저런 글씨를 쓴 적이 있다고 했다. 모험가들이 가져온 위험 물품에 ‘손대지 말 것’이라고 적어도 반드시 누군가는 손을 대곤 했다. 유나는 그래서 지시를 쓰는 대신 사람들에게 왜 위험한지 그림을 그려 보이려 했다. “그 사람답긴 하네요.” 진혁이 말했다. “그 사람다워 보이는 것과 그 사람이 썼다는 건 달라.” 세리아가 대답했다. “오늘은 그걸 구별하는 날이야.” 미란이 정비 기술자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모라의 출력은 밤새 안정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심실 봉인함에서 위험한 에너지가 새어나온다는 직접 증거는 없었다. 대신 북측 냉각관의 작은 차압계가 오랜 시간 동안 정상 범위의 가장자리를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모라는 루멘을 지탱하는 의식이면서도 스스로 모든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경매장은 모라의 제한 출력과 사람의 손으로 관리하는 펌프, 도시의 보조 전력을 함께 사용했다. 그 세 부분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방벽과 경매장 지하 시설이 견딜 수 있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경매장이라는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그곳에 살며 일하는 이들은 고장 난 밸브와 누수되는 이음쇠부터 걱정해야 했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상자 감정이 아니라 펌프 감정이에요.” 미란이 말했다. 그녀는 작업대에 원형 펌프의 축 부품을 놓았다. 오래된 구리합금 표면에는 미세한 흠집이 많았다. 화령에서 제작 중인 대체 부품은 아직 승인되지 않아 실전에 투입할 수 없었다. 지금 가능한 일은 기존 장비를 규정대로 진단하고 일시적인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었다. “마력이 모자라서 그런 거라면 모라에게 더 달라고 부탁하면 안 되나요?” 라일이 물었다. 미란은 한참 그를 보다가 말했다. “네 다리가 아플 때 누가 더 빨리 뛰라고 부탁하면 어떻겠어?” “먼저 부탁한 사람의 지갑부터 봅니다.” “바로 그거야. 힘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장비가 그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걸 수 있어.” 시험실은 심실과 떨어진 낮은 석조 별관에 있었다. 창문에는 두꺼운 철망이 쳐졌고, 바닥에는 물이 흘러도 전기 장치에 닿지 않도록 배수로가 파여 있었다. 기술자들은 축 부품을 시험대에 고정하고 유량을 단계적으로 올렸다. 진혁은 장부로만 보던 수치가 실제 관의 떨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지켜보았다. 첫 번째 시험에서는 정상적이었다. 두 번째 시험에서도 큰 문제가 없었다. 세 번째, 온도가 올라가는 구간에서 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오래된 합금의 마모 때문일 수도, 고정대와의 간격 때문일 수도 있었다. 미란은 시험을 멈추고 부품을 분해해 마모 위치를 표시했다. “여기만 보고 전체 설비의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말했다. “적어도 출력 이상이 모라 혼자 때문이라는 가설은 약해졌어요.” 진혁은 시험 기록 옆에 금액을 적었다. 부품 하나를 새것으로 만드는 비용, 구리합금을 덧대어 수리하는 비용, 설비를 멈출 때 발생하는 경매장 손실. 세리아가 물었다. “무슨 계산을 그렇게 열심히 해?” “모라에게 무조건 희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게 더 싸다는 걸 보여 드리려고요.” “내가 그렇게 무정한 사람으로 보여?” “아뇨. 회계 담당자에게 설명하려고요.” 벨라가 문가에서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보통 제일 비싼 견적서를 들고 와요.” 정오가 지나자 마레온 항구에는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렸다. 석벽에 떨어진 빗물이 한꺼번에 수로로 흘렀고, 모래를 실은 마차들이 길가에 멈췄다. 진혁은 빗줄기 너머 루멘의 지붕을 바라봤다. 거대한 동판 장식 아래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오갔다. 그들 중 대부분은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요?” 카렌이 물었다. 세리아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보다 소문이 빠른 도시에서 ‘루멘 심실 이상’이란 말은 곧 ‘괴수 각성’으로 바뀔 터였다. 그러나 안전과 관련된 문제를 숨길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경매장을 일찍 닫고 지하 구역만 제한하며, 설비 점검으로 인한 업무 조정을 공지하기로 했다. 모라의 존재나 봉인함에 관한 추측은 발표하지 않았다. 확인된 것만 말하는 결정이었다. 오후의 시설 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시장 쪽으로 통하는 외벽 아래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추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란은 펌프 효율과 누수가 동시에 나빠질 때 어떤 순서로 조치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정비 인력이 부족하면 부품 교체가 먼저인지, 수로 청소가 먼저인지 판단하는 데도 근거가 필요했다. 세리아는 건물 전체의 사용을 중단하자는 의견에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루멘에 들어오는 수입이 멈추면 기술자를 고용할 돈도 사라진다. 그러나 전 영업을 계속하자는 주장에도 반대했다. 위험한 구역을 명확히 나누어 사용 가능한 부분만 운영하는 편이 안전하고 현실적이었다. “이쪽 남관은 관로와 분리돼 있으니 제한적으로 쓸 수 있겠군요.” 안전 담당자가 도면을 가리켰다. “그럼 손님 동선을 바꿔야겠네요.” 벨라가 말했다. “중앙 계단은 닫고 옆 복도로 안내하겠습니다.” 라일은 안내 표지판을 만들겠다고 나섰다가 세리아에게 손글씨 검사를 받았다. 그의 화살표는 창고로 향할지 출구로 향할지 구별되지 않았다. 진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둑이 길 안내를 못 하면 어떡합니까?” “저는 사람들이 못 찾는 길을 찾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면 안내할 일이 더 없네요.” 라일이 잠시 씩씩거리다 결국 정확한 방향의 화살표를 그렸다. 그날 늦은 오후 남관으로 드나드는 직원들은 처음 보는 부드러운 종이 표지 덕분에 위험 구역을 피해 걸을 수 있었다. 사소한 일 같아도 사고는 대개 사소한 곳에서 시작했다. 회의가 끝나자 세리아가 진혁을 복도로 불렀다. 경매장 벽의 황금빛 장식 아래에서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의 시설이 모라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 처음에는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옛날 유나가 이 건물의 울림을 듣고 ‘이건 설비가 아픈 소리’라고 했을 때 자신은 지나친 걱정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항상 나보다 먼저 멈췄어. 물건을 보고도, 돈을 보고도.” “사장님은 그때 일을 지금 다시 계산하고 계시네요.” “잘못 계산한 걸 인정하는 데도 비용이 들지.” “그 비용이 너무 크면 직원이 할인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세리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진혁을 보다가 웃었다. 그러나 웃음 끝에는 작은 안도감도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혼자서 모든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비 작업을 끝낸 사람들은 작업대 앞에 모여 그날의 점검표를 함께 읽었다. 미란은 숫자를 한 줄씩 짚으며 어떤 측정값이 평소와 달랐는지 설명했다. 진혁이 이 자료를 보자마자 비용을 계산하려 하자 그녀가 수첩을 덮었다. “가격은 잠깐 뒤에 적어도 돼요. 먼저 이 숫자들이 실제로 무슨 소리와 진동을 뜻하는지 기억하세요.” 진혁은 그제야 작업대 위에 손을 얹었다. 펌프가 움직일 때 올라오는 진동은 종이로 기록된 값과 달리 균일하지 않았다. 장비마다 떨림에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유물의 숨겨진 가치를 알아보는 재능도 필요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장과 씨름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미란은 자신의 손가락에 남은 작은 화상 흉터를 보여 주었다. 처음 루멘에 왔을 때 성급히 밸브를 만지다가 입은 상처라고 했다. “저도 한 번 실수하고 나서야 조심하게 됐어요.” “그래서 오늘은 제 차례군요.” 진혁이 대답했다. “아뇨. 오늘은 누구도 다치지 않는 날이어야 해요.” 그날 저녁, 카렌은 진혁을 데리고 시장 끝 작은 식당에 들렀다. 밤비에 젖은 손님들의 외투가 벽난로 앞에 걸려 있었다. 식당 주인은 굵은 생선살을 넣은 수프와 빵을 내왔다. 카렌은 진혁이 수저를 들어 올릴 때 손바닥을 살피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도 아팠죠?” “조금요. 유물을 직접 본 건 없는데, 심실에 있으면 자꾸 따끔거려요.” “그렇다면 당신을 며칠 동안 빼야 할지도 몰라요.” “저 없이 진행하면 제가 실직하는 거 아닌가요?” “누구보다 일을 못 하는 날에 혼자 계속 일하려는 사람이 먼저 실직하죠.” 카렌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진혁이 농담으로 넘어가려는 습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어릴 적 아버지 레온이 그녀에게 검을 쥐여 주며 했던 말이었다. 좋은 검사는 가장 오래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검을 집어 들었는지 잊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추적하는 동안 그 말이 오히려 부담이 됐다. 이제는 그 뜻을 조금 알 것 같다고 했다. “당신이 계속 쓰러지면 누구를 지키려던 건지도 모르게 됩니다.” 진혁은 한동안 수프를 저었다. “그럼 저를 좀 더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해 주세요.” 카렌은 아주 천천히 웃었다. “감정가부터 불러 볼까요?” “적어도 동화 열세 닢보다는 비싸겠죠.” “당신을 돈으로 계산할 생각은 없어요.” 그녀의 말이 농담을 끝냈다. 진혁은 식당의 작은 창밖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가끔 사람의 마음은 값이 정해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더 복잡했다. 이튿날 새벽 미란에게서 새로운 보고가 왔다. 북측 점검로의 온도 확인창을 복원하지 않고 바깥에서 빛을 비춰 보자, 선반 밑 검은 유리판에 손글씨처럼 가느다란 흠이 드러났다. 종이의 붉은 잉크 지시와 같은 문구였지만 마지막 줄은 달랐다. ‘심실에 없는 것을 먼저 찾아라. 첫째, 소리를 지운 종.’ 라일이 머리를 긁었다. “소리를 지운 종이요? 종이가 원래 소리가 없지 않습니까?” 진혁은 화령에서 회수한 녹음 은판을 떠올렸다. 사람의 발화를 압착 기록한 장치. 그렇다면 소리를 지운 종이는 그 반대 기능을 가진 물건일까, 아니면 과거 사건의 기록에서 누락된 증언일까. 세리아는 유나가 보관했던 소형 장비들의 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진혁은 다른 방향을 제안했다. 유물이 아니라 당시 경매장 시설에서 ‘소리’가 기록될 법한 장소, 다시 말해 경매망치가 울리던 경매실과 그 기록원을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관으로 향할 때, 오전 준비 중이던 경매사가 말했다. “이상하군요. 오래된 낙찰 기록 하나가 또 반품품 목록으로 돌아왔습니다.” 번호는 998. 품목명은 비어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83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8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