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의 마지막 가을비가 내리던 아침, 서진혁은 처음으로 경매봉을 들었다.
그 경매봉은 진짜 경매를 진행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칠성 경매원의 오래된 교육실에서 쓰던 모형으로, 갈색 손잡이와 가벼운 놋쇠 머리가 달려 있었다. 윤담이 봉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은 물건을 파는 자리가 아닙니다. 다만 여러 사람이 서로 말을 빼앗지 않게 의사 진행을 하려면, 한 사람이 순서를 잡아야 하죠.”
“그런데 왜 제가 잡습니까?”
“이번 사전 감정 요청의 당사자가 자네니까.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을 확인할지 자네가 먼저 말할 권리가 있어.”
진혁은 손잡이를 살펴보다 씁쓸하게 웃었다. 말단 감정사로 경매장에 들어온 날, 그는 경매봉을 든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를 기다렸고, 금화가 몇 초 사이에 오갔다. 그런데 직접 봉을 쥐고 보니 생각보다 무거웠다. 좋은 값을 부르는 것보다 값을 매겨선 안 되는 것을 구별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실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윤담과 정유라, 공증인, 소연, 세리아와 카렌, 라일, 그리고 원판 공동 보관 계약에 참여한 기관의 대표들이 자리했다. 전날 붙잡힌 통지 담당자의 진술과 은판의 출처는 아직 정식 조사 중이었다.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유물을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오늘 할 수 있는 작업은 제한적이었다. 소연이 제작한 복제 모형으로 두 판의 위치를 비교하고, 원본 유물은 봉인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 전부였다.
창문 아래 작은 난로에서는 석탄이 타닥거렸다. 가을비에 젖은 외투들이 벽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평범한 날 같았지만, 세리아는 자꾸 창 밖을 바라봤다. 화령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마레온에서 보낸 전신에는 모라의 출력이 안정적이라는 글이 있었지만, 예비 펌프에서 작은 진동이 반복돼 기술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는 늦어도 저녁 열차로 돌아가야 했다.
“시작하시죠.” 카렌이 말했다.
진혁은 가볍게 봉을 두드렸다. 딱,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누군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다. 라일이었다.
“꼭 경매사처럼 보이십니다.”
“싫으면 나가도 됩니다.”
“그럼 누가 경매봉 훔쳐 가는지 지켜보겠습니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윤담이 장치 구조를 설명했다. 전날 은판은 사람의 발화를 기록하고 그것을 고정된 문구처럼 남길 수 있는 장치였다. 하지만 원판과 결합하면 같은 형식으로 전혀 다른 줄도 찍을 수 있었다. 두 판이 같은 제작 계열에 속한다는 사실은 아직 감정 중이었으나, 모형으로 맞춰 본 위치가 거의 일치했다.
소연이 여덟 개의 작은 홈을 가리켰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잠금쇠인데, 실제로는 글자판을 맞출 때 사용되는 기준점이에요. 하나라도 어긋나면 마지막 줄이 다른 위치에 찍힙니다. 여러 번 복제한 사람이라면 원판의 기준점을 알아야 제대로 흉내 낼 수 있어요.”
정유라는 보존 유리에 넣은 옛 규정집 사본을 펼쳤다. 아래쪽에는 ‘거절한 자의 이름을 기록하라’는 주석이 있었다. 봉인함 은테의 여덟 점, 세리아 열쇠의 여덟 구멍, 사라진 객석의 제8감정인 자리. 모두 같은 방식의 기준점을 모방한 흔적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제8감정인은 실제로 있었습니까?” 라일이 물었다.
윤담이 답했다. “아직 이름을 알 수 없죠. 다만 한 사람이 모든 감정을 독점하던 시대였다는 증거도 부족합니다.”
진혁은 모형을 유리판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창틀로 들어온 빛이 홈을 통과해 옛 규정집 복제 자료에 작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소연이 등불 각도를 조절하자, 지워진 글씨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0호 — 최초의 감정 기준은 한 사람의 말로 정하지 아니한다.’
정유라가 숨을 들이마셨다. 자료에 남은 그 다음 문장은 완전하지 않았다. 반 이상 사라졌지만 몇 개의 글자는 분명했다.
‘...각자 기록하고 ...서로 검증하며 ...거절한 뜻을 먼저 확인...’
서진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찾던 전설은 어떤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값을 아는 능력과는 달랐다. 감정 능력이 특별한 사람 하나에게 책임을 몰아주지 않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을 확인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제0호 감정사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인가요?” 카렌이 물었다.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유라가 답했다. “이 규정은 역할과 절차를 말할 뿐이에요. 최초로 제도를 만든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만들었을 수도 있지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제0호 감정사의 실체를 알면 자신의 능력이 생긴 이유도 알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서가 들려준 말은 ‘혼자 확신하지 말라’였다. 어쩌면 그토록 특별해지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찌르는 답이었다.
실험이 끝난 뒤 사람들은 당장 환호하지 않았다. 정유라는 글씨가 나타난 유리판을 먼저 보존 상자에 넣었고, 소연은 측정 장치의 위치를 도면에 옮겨 적었다. 처음보다 더 많은 단서가 생겼지만, 자료의 연대와 제작자, 판의 수리 이력을 판별하는 작업은 이제부터였다. 원본 유물을 열지 않은 채 얻은 결과라는 한계도 분명했다.
“이걸 신문에 내면 ‘제0호의 비밀 밝혀져’라고 쓰겠죠?” 라일이 물었다.
“그렇게 쓰면 제가 다음 날 기자를 찾아갈 겁니다.” 정유라가 말했다. “발견했다는 사실과 확인했다는 사실은 달라요.”
진혁은 창가에 나란히 놓인 서류를 보며 천천히 정리했다. 이번 일로 얻은 증거는 완전한 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짓을 가려낼 실마리는 됐다. 이제 누군가 진혁이 제8감정인이라 주장하더라도 그 자리가 낙찰자를 뜻한다는 근거부터 요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유나의 기록과 오래된 도구가 서로 연결되는 지점을 찾았다.
세리아는 유리판 위에 놓인 글씨의 복제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유나와 지내던 시절 그녀는 이런 식으로 물건의 작은 차이를 집요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경매봉을 휘두르고 금화에 열광할 때도, 유나는 책상 위 종이 한 장을 놓고 조용히 무엇이 빠졌는지 물었다. 세리아는 그때는 그런 질문이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그 질문을 해 줄 사람이 그리웠다.
“유나가 이것을 보면 웃을까?” 세리아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진혁이 답했다. “잘 모르겠지만, 틀린 계산부터 지적하실 것 같습니다.”
세리아는 잠시 진혁을 바라보다 웃었다. “맞아. 네가 그 사람을 조금은 닮아 가는군.”
그날 오후 사전 감정 요청을 둘러싼 공식 결론도 일부 정리됐다. 출품번호 000 봉인함은 여전히 출처와 권리자가 확인되지 않아 경매에 올릴 수 없었다. 진혁의 서명을 흉내 낸 문서는 정식 승인 기록에서 제외하고 별도 보전됐다. 제8감정인이라는 지위는 현행 칠성 경매원 규정 어디에도 없었다. 진혁이 의자에 앉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애초에 그 지위를 근거로 타인의 신원과 권리를 넘길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됐다.
“결국 비밀의 상자는 아직 못 여는군요.” 라일이 아쉬워했다.
“그게 오늘의 성과죠.” 진혁이 말했다.
“안 연 게 성과라고요?”
“열지 말아야 할 물건을 함부로 열지 않은 거니까.”
윤담은 그에게 작은 서류봉투를 건넸다. 안에는 공식 감정 자문료와 공동 보관 감정회 참석 수당이 계산된 정산서가 들어 있었다. 경매원 수수료와 비용을 제하고 나면 금화가 몇 닢 남을 예정이었다. 진혁은 계산이 적힌 줄을 세 번 읽었다.
“세상에. 돈을 벌었습니다.”
카렌이 웃었다. “그렇게 여러 곳을 다니고 겨우 그 정도예요?”
“수익률은 앞으로 좋아질 겁니다. 이번에는 유물을 살 권리까지 얻었으니까요.”
“공동 보관권이죠.” 윤담이 정정했다.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다시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진혁은 라일에게 소액의 운반 협조 수당을 건넸다. 라일은 돈을 받고 오히려 표정이 어색해졌다. 늘 훔치거나 빌려 쓰던 물건을 자신의 이름이 적힌 정산서와 함께 받아 본 경험은 많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 동전을 넣으려다 잠깐 멈췄다.
“이런 건 처음이네요.”
“뭐가요?”
“제가 뭘 했는지 적혀 있는 돈이요.”
진혁은 웃으려다 말았다. 라일이 잃어버린 이름을 찾는 데 집착하는 이유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려는 이유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이름은 때로 금화보다 오래 남았다.
세리아는 저녁 열차를 타기 전 진혁에게 유나의 노트 복제본을 한 장 더 건넸다. 기존 자료를 확인하던 루멘 회계 담당 벨라가 접혀 있던 안쪽 종이를 발견했다고 했다. 거기에는 짧은 지시가 적혀 있었다.
‘여덟 번째 칸은 낙찰자를 적는 자리가 아니다. 거래를 멈춘 사람을 기록하는 자리다.’
진혁은 종이를 펼쳤다. 문장 끝에는 아주 작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화살표는 여덟 번째 칸이 아니라 그 위쪽, 지워진 첫 번째 칸을 가리켰다. 그는 서류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흐린 잉크 밑에 또 다른 글씨의 윤곽이 보였다.
‘루멘 심실 — 첫 기록 보관처.’
“이게 정말 유나가 남긴 글입니까?”
세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는 분명 그녀 것이야. 다만 그 부분을 언제 적었는지는 모르지. 네가 마레온으로 돌아오면 안전 확인 후 원본을 함께 보자.”
역 플랫폼에서는 저녁 기차의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세리아는 가방을 들어 올리며 진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수익보다 중요한 건 알겠지?”
“영수증이요?”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녀가 열차에 오르자 라일이 진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사장님 마음도 좀 감정해 보시죠.”
“그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유물입니다.”
카렌이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제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진혁은 목까지 붉어졌다. 라일이 크게 웃었고, 세리아는 기차 창문 너머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다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기적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날 밤 진혁은 숙소 책상에 앉아 지난 열흘의 기록을 정리했다. 봉인된 최초 감정서는 아직 열지 못했고, 제0호의 실명도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위조된 동의 문구를 막았으며, 유물 원판의 공동 관리권을 확보했고, 유나가 남긴 자료의 새로운 방향도 발견했다.
새벽에 접어들 무렵 창밖 골목에서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렸다. 진혁은 서류를 접고 등불을 낮추었다. 막 눈을 감으려는 순간 전신국 소년이 문을 두드렸다.
마레온에서 보낸 급보였다.
‘모라 심실 내 미등록 보관함 발견. 외형은 화령의 출품번호 000 봉인함과 유사. 세리아 도착 전 임의 개봉 금지.’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의 글씨가 짧게 뜨거워졌다. 그는 봉투 뒷면에 도착 시간을 적고, 서둘러 카렌과 라일을 깨우러 갔다.
화령에서 모두가 한 상자만 바라보는 동안, 같은 모양의 또 다른 상자가 루멘의 심장 가까이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제0호의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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