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감정회 날, 칠성 경매원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줄이 늘어섰다.
비가 갠 화령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공방 굴뚝에서 올라온 연기가 가벼운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기울었고, 경매원 둥근 지붕의 금박 장식은 햇빛을 반사했다. 사람들은 ‘제0호’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전설적인 감정사의 유물이라고 속삭였고, 어떤 이는 삼백 년 전 감정 기술을 재현할 수 있는 도구라고 떠들었다. 그중 상당수는 물건을 본 적도 없으면서 벌써 낙찰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진혁은 정문 계단 아래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가 입은 외투는 노철의 먼지를 털어 냈지만 완전히 새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반대로 하진 카스텔은 보석이 달린 넥타이핀과 검은 장갑을 갖추고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세 명의 평가사와 별도 기록 담당자가 따라왔다.
“오늘은 제안서를 읽기 전에 경쟁부터 하게 되는군요.” 하진이 말했다.
“좋습니다. 다만 먼저 묻고 싶네요. 서판 원판의 출처는 확인됐습니까?”
하진은 미소를 지었다. “정식 소유자의 허가와 운송 기록을 갖췄습니다. 서류는 경매원이 확인할 겁니다.”
“그렇다면 가치를 보고 판단하죠.”
윤담이 검증대 위에 물건을 올렸다. 사람 팔뚝만 한 납작한 동판이었다. 겉면에는 닳은 글씨가 반대로 새겨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고정용 구멍이 있었다. 동판을 인쇄 장치에 넣고 눌러 찍으면 종이 위에 글씨가 바로 나타나는 구조였다. 판의 가장자리에는 조금씩 모양이 다른 보수 흔적이 있었다.
“연대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윤담이 설명했다. “기본 판은 삼백 년 전 장비일 가능성이 높으나, 위에 덧댄 글자판 몇 개는 훨씬 뒤에 교체됐습니다. 따라서 최초 감정서 전체를 인쇄한 원판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객석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하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물건에 새겨진 문구를 천천히 읽었다. ‘기록할 것. 물건의 이름, 제작자, 사용 흔적, 주인의 의사.’ 그 뒤의 글자는 훼손돼 있었다.
진혁은 그 문장에 익숙했다. 노철에서 들은 이야기, 정유라의 필사본, 유나가 남긴 노트. 세 자료 모두 ‘거절’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 원판에는 그 단어가 없었다. 닳아 없어졌는지, 애초에 없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험 인쇄를 하죠.” 윤담이 말했다.
공식 소유자가 동의한 제한 시험이었다. 기술자들은 원판을 장비에 끼우기 전에 상태를 기록했고, 압력을 최소로 낮췄다. 두꺼운 종이에 탄소 잉크를 얇게 발라 찍어 낸 결과, 첫 글자들은 비교적 선명했으나 마지막 부분은 흐릿하게 나타났다. 흔들리는 글자를 보던 진혁은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글자 획보다 그 아래에 남은 미세한 보조 격자가 더 정교했다.
“원판에 글자만 새겨 놓은 게 아닙니다.”
“무슨 뜻이죠?” 하진이 물었다.
“판 가장자리의 눈금이 종이마다 일정한 여백을 만들도록 돼 있습니다. 같은 양식의 문서를 여러 장 찍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단 한 장뿐인 비밀 감정서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굳이 이렇게 복잡한 장치가 필요했을까요?”
객석이 조용해졌다. 진혁은 원판을 가리켰다. “어쩌면 최초 감정서는 전설적인 한 사람이 쓴 원본 한 장이 아니라, 누구나 같은 형식으로 기록을 남기도록 만든 표준 서식일지도 모릅니다.”
정유라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나눠 말했다. “정확히는 다량 제작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 배포된 사본 수나 최초 제작자를 확인한 것은 아니에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추측이 맞다면 이야기의 의미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한 명의 천재 감정사를 찾고 있었지만, 유물은 오히려 수많은 감정사가 일관되게 기록하도록 만든 도구일 수 있었다.
원판을 본 관객 사이에서는 여러 종류의 계산이 시작됐다. 어떤 귀족은 유물을 소장해 자신의 문장 옆에 전시하려 했고, 어떤 상인은 옛 계약 양식을 팔면 새 서류 장사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유라는 그 목적을 들으며 불안해졌다. 문화유물은 비싸게 팔리는 순간 보존 가치가 인정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 이용하려 들었다.
진혁은 경매 시작 전에 윤담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이걸 인쇄하는 과정에서 문구를 교체할 수 있습니까?”
윤담은 원판 보수 부분을 가리켰다. “일부 교체된 부품은 분리할 수 있어. 그러니 어느 시기의 문구인지 따로 표시하지 않으면 역사 자료로 오해될 수 있지.”
“그럼 원판 자체를 산다고 진실을 사는 건 아니군요.”
“그렇게 쉬우면 내가 자네보다 돈이 많았겠지.”
경매장 뒤쪽에서는 한 견습 감정사가 진혁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자신의 스승이 옛날 서판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사람 이름 대신 빈칸을 세는 장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증거라며 주장하지 않고 오래된 장인 구술을 찾아볼 방법만 적어 놓았다. 진혁은 견습생에게 고맙다고 했다. 한 사람의 감정은 불완전할 수 있지만, 여럿의 기억이 모여 더 정확한 질문을 만들 때도 있었다.
하진이 가까이 와서 물었다. “돈보다 원칙이 중요하다고 말하던 감정사가 왜 직접 사겠다고 합니까?”
“누가 사든 위험하니까요. 그래서 사용 범위를 제한하려는 겁니다.”
“상인에게는 가장 듣기 싫은 답이군요. 앞으로 돈이 얼마나 들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니까.”
“사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진혁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손대면 안 되는 물건이라고 평생 땅에 묻어 두는 것도 답은 아닐 테니까요.”
하진의 미소가 약해졌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오래된 유물을 보관해 두었다가 값이 오르면 파는 방식으로 상회를 키웠다고 했다. 그에게 유물은 자산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 팔았던 의식용 저울 하나가 사람의 신원을 넘기는 불법 계약에 악용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무엇이 단순한 물건인지 의심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당신이 어떻게 하는지 보려는 겁니다.” 하진이 말했다. “내가 이겨도, 당신이 이겨도요.”
진혁은 선뜻 하진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역할을 반성하는지, 새로운 경쟁자를 시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두 사람 모두 경매봉 하나로 책임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입찰이 시작됐다. 시작가 금화 열다섯 닢. 노철에서 물건을 빌리고 화령에서 적은 수익을 모은 진혁에게도 큰돈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계산했다. 개인 자금과 경매원 자문료를 모두 합쳐도 삼십 닢을 넘기 어려웠다. 세리아는 법적으로 확인된 문화유물 공동 보관 계약이라면 경매장 예산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개인 호의가 아니라 별도 승인이 필요한 비용이었다.
“저 물건, 꼭 사야 합니까?” 카렌이 물었다.
“사고 싶습니다. 하지만 무조건은 아니에요. 가격이 너무 오르면 공식 연구를 요청하면 됩니다.”
하진이 먼저 열여덟 닢을 불렀다. 다른 상인이 스물둘을 제시했고, 진혁이 스물넷을 불렀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돔 안에 울렸다. 가격이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마지막에는 하진과 진혁 둘만 남았다.
“서른 닢.” 하진이 말했다.
진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돈만 생각하면 여기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경매원이 요구한 예치금과 운송비, 사후 보관 비용을 포함해 계산해 보니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가 혼자 낙찰받으면 판을 보관하고 검사할 전문 인력을 확보해야 했다.
그는 윤담에게 손을 들고 규정에 따라 잠깐 입찰 중단을 요청했다. 경매원은 소유자의 동의와 전 입찰자에게 동일한 시간 제공을 조건으로 이를 허락했다. 진혁은 세리아, 정유라, 공공 기록 연구소의 담당자와 빠르게 협의했다. 정유라가 속한 보존실은 개인이 원판을 독점하지 않는 방식의 공동 보관에만 참여할 수 있었다. 금액을 나누는 것보다 권한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한 조건이었다.
잠시 뒤 협약 초안이 작성됐다. 원판의 소유권은 일정 기간 공동 관리하고, 출처 검증 자료는 공개하며, 위험한 실험은 보존위원회의 승인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정식 기관 승인이 나기 전까지는 잠정 협약일 뿐이었다. 세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낙찰 후에도 보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조항을 넣겠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이 물건을 이용해 사람의 이름을 지운다면 비싼 낙찰가가 아무 의미 없었다.
입찰이 재개됐다. 하진이 서른둘 닢을 제시했다. 진혁 일행의 공동 매입 제안은 서른넷이었다. 하진은 잠깐 생각하다 서른여섯을 불렀다. 진혁은 한 번 더 손을 들었다. 서른여덟 닢.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하진은 기록 담당자와 속삭였다. 진혁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돈이 많은 사람이 끝없이 가격을 올리면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한도를 지키는 것이 유일한 승부였다.
경매봉이 올라간 채 잠깐 멈춰 있는 동안 진혁은 무대 뒤쪽의 다른 감정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원판의 연대를 조사하느라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원판이 누구 소유가 되든 그 시간의 기록은 남을 것이다. 진혁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결론보다 검증 절차가 오래 남기를 바랐다. 적어도 그런 마음으로 입찰을 멈출 수 있었다.
경매사가 물었다. “더 높은 입찰 없습니까?”
하진은 손을 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망치가 내려왔다. 금화 서른여덟 닢. 낙찰은 진혁이 주도한 공동 보관 협약 측에 돌아갔다.
라일이 어깨를 툭 쳤다. “드디어 부자 되셨군요.”
“제가 가진 돈보다 더 큰 물건을 샀는데 그게 왜 부자입니까?”
“남의 돈을 합법적으로 쓰는 능력이 생겼잖아요.”
카렌은 웃다가 조용히 진혁의 손을 잡았다. 긴장한 탓에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한도를 넘기지 않았네요. 잘했어요.”
그 짧은 말이 칭찬보다 더 크게 들렸다.
그날 오후 원판은 입찰자가 아니라 공동 보관 담당자의 입회 아래 봉인됐다. 하진은 떠나기 전 진혁에게 다가왔다. 이전처럼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달랐다.
“내가 졌군요.”
“가격 경쟁에서는요.”
“아뇨. 돈으로 독점하려던 계산에서 졌습니다.”
진혁은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진은 조용히 덧붙였다. “조심하십시오. 누군가는 당신이 그 판을 사길 바랐을 겁니다.”
경매장 정문 밖으로 나오는 순간 진혁의 손바닥에 익숙한 통증이 스쳤다. 이번에는 감정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몸에 남은 피로 때문에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인계 기록 맨 아래, 어제까지 없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제8감정인이 판을 확보함. 다음 절차 대기.’
누군가 아직 공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자리에 진혁을 이미 앉혀 놓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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