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77화
PAYLUA ORIGINAL · 제77화

77화. 거절을 찍어 내는 도장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134자

오프라인 책장
제8감정인석에 앉으라는 문서는 협박장처럼 보였지만, 서류상으로는 놀랍도록 정교했다. 문서 상단에는 칠성 경매원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래쪽에는 공증인의 확인 번호와 보관 담당자의 서명란이 있었고, 종이는 정식 계약서에 사용하는 황갈색 수제지였다. 그러나 진혁은 그 종이를 손에 들고도 선뜻 읽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카렌, 윤담, 세리아와 정유라 보관원이 모두 모여 있었다. 각자가 같은 문장을 확인하고 다른 결과를 예상하는 순간이었다. “제8감정인석에 앉으면 개봉할 수 있다.” 세리아가 읽었다. “이건 권한에 관한 문구가 아니야. 조건을 충족하는 행위를 강요하는 방식이지.” 윤담은 문서의 발신란을 확대경으로 살폈다. “발신인은 경매원 소속이 아닙니다. 대리인이라고 적혀 있지만 위임인의 이름이 없어요. 도장과 번호가 있어도 그 자체로 공식 신청이 되는 건 아니죠.”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제가 그냥 의자에 앉지 않으면 끝입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 카렌이 말했다. “하지만 저 사람이 원하는 게 앉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동의했다고 기록하는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져요.” 서검증관의 작은 창문 너머로 화령의 아침 시장이 보였다. 구리 지붕 사이에서는 굴뚝 연기가 피어올랐고, 상인들이 젖은 천막을 털어 말리고 있었다. 도시에는 늘 계약이 넘쳐났다. 빵을 외상으로 사는 약속, 운하 배를 하루 빌리는 약속, 공방에서 물건을 제작해 내일까지 납품하겠다는 약속. 그런데 누군가 그 평범한 약속의 형식을 빌려 사람의 이름과 능력을 가져가려 한다면, 법률상 효력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속이기 쉬웠다. “절차 자체를 실험해 볼 수 없을까요?” 진혁이 물었다. 카렌의 눈썹이 올라갔다. “당신이 앉는다는 뜻은 아니죠?” “아뇨. 의자가 꼭 제 이름을 알아보는지부터요.” 윤담은 잠시 고민하다 문서에 적힌 ‘제8감정인석’이 실제 법적 지위인지, 아니면 가구에 붙인 명칭일 뿐인지 확인하기로 했다. 그는 경매원 옛 규약에서 감정인의 선임과 계약의 효력 발생 조건을 찾아냈다. 삼백 년 전 규정집에는 여덟 번째 감정인이 따로 있었다는 직접 근거가 없었다. 다만 거래를 중단할 수 있는 검토권에 관한 문장이 일부 남아 있었다. “이런 식이면 충분히 오해하게 만들 수 있어요.” 정유라가 말했다. “비어 있는 칸 하나를 실제 사람 자리처럼 꾸미고, 그 자리에 누군가를 앉히는 겁니다.” 그들의 논의가 길어질 무렵 화령의 기계공 소연이 연락을 보냈다. 어제 만들기 시작한 세리아의 황동 열쇠 복제 도면에서 비정상적인 길이 비율이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진혁 일행은 공방으로 이동했다. 백조 공방은 동문과 서문 사이의 좁은 골목에 있었다. 장인들은 천장에 걸린 풀무를 번갈아 움직였고, 작업대마다 금속 부스러기를 담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 부품 제작 소리 사이에서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짧은 구호가 들렸다. 위험한 가공 과정에서는 긴 문장보다 정해진 구호가 중요했다. 소연은 보호대를 찬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투명한 유리판 두 장을 보여 주었다. “이 열쇠는 문을 여는 데 쓰기엔 톱니가 너무 얇아요. 대신 서류에 찍힌 눌림 자국을 읽어 내도록 만든 측정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서의 눌림 자국?” “도장을 찍거나 금속 틀로 글씨를 누른 종이는 표면에 자국이 남지요. 이 열쇠를 옆에서 빛에 비추면 그 자국을 일정한 간격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소연은 빈 종이에 무늬가 있는 금속판을 눌렀다. 겉에서 보면 아무 글자도 없었다. 그러나 낮은 각도의 등불을 비추자 얇은 홈들이 드러났다. 그녀가 만든 황동 모형을 그 위에 얹자, 홈의 위치가 서로 구분됐다. “지금 있는 자료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원본에 직접 올리지 않고 복제 자료로 시험해야 합니다.” 서검증관에서 가져온 옛 규정집의 고해상도 탁본이 유리판 위에 놓였다. 열쇠 모양 측정판을 조심스럽게 이동시키자 지워진 서명 칸 주변에서 희미한 반원이 나타났다. 얇은 선은 글자가 아니었다. 마치 여러 장의 종이를 함께 눌렀을 때 아래쪽에 남는 보조 선이었다. “누군가 다른 종이를 위에 놓고 찍은 흔적이군요.” 소연이 말했다. “원본의 작성 시기와 같은 것인지 후대의 수선 과정에서 생긴 것인지는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진혁은 경매원에서 받아 온 최근 사전 감정 요청서도 복제본으로 시험해 보자고 했다. 소연은 유리판을 닦고 같은 장비를 다시 맞췄다.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요청서에 찍힌 공식 인장은 옛 규정집의 특정 칸에 남은 눌림 자국과 형태가 매우 비슷했다. 옛날 도장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기보다, 최근에 누군가 오래된 눌림 자국을 본떠 만든 인장처럼 보였다. 윤담이 낮게 말했다. “위조 가능성이 높습니다.” “흔적이 같다고 제작자를 단정할 수는 없어요.” 소연이 지적했다. “그렇지만 이런 정밀한 모양을 만들려면 원본이나 세밀한 탁본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혁은 그날 오전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었다. 원판과 서류의 눌림 자국이 같은 제작 계열이라면, 화령에 보존된 다른 거래 문서에도 비슷한 흔적이 있어야 했다. 그는 윤담의 허락을 받아 오래된 위탁계약 사본 수십 장을 비교했다. 대부분은 글씨가 닳고 종이가 황변돼 있었지만, 서명 칸 옆의 작은 점들은 분명한 규칙에 따라 배열돼 있었다. “이런 표시를 왜 만들었을까요?” 진혁이 물었다. 소연은 종이 끝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돈을 잘못 세지 않으려고 만드는 표식과 비슷합니다. 숫자를 고치려면 표식도 바꿔야 하니까요. 아주 오래된 시절의 위조 방지 장치일 수도 있어요.” 서류 속에는 이상하게도 같은 손글씨가 반복된 계약이 있었다. 기록관은 필사자가 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진혁은 다른 점도 발견했다. 오래된 계약서에 남겨진 서명은 표면의 잉크가 다소 번져 있었는데, 최근 덧쓴 듯한 부분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그는 무턱대고 모든 문서를 위조라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 대신 별도의 섬유 검사와 잉크 성분 확인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도대체 이렇게 귀찮게 해서 뭘 얻을 수 있죠?” 라일이 투덜거렸다. “우리가 실수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죠.” 진혁이 말했다. “누가 ‘이 문서를 믿으면 큰돈을 준다’고 했을 때, 무엇을 모르는지 먼저 알려 주는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라일은 반쯤 웃다가 말았다. 그 말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는 한 번도 해 준 사람이 없던 말 같았다. 배달인 조합에서는 종이를 전달하는 아이에게 내용이 무엇인지 묻지 말라고 가르쳤다. 맡겨진 물건이 무엇인지 알려 하면 임금이 깎이거나 다음 일을 받지 못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왜 물건의 진실을 읽는 감정사 곁에 남아 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제가 어릴 때 누군가 저한테 봉투를 하나 주면서 ‘절대 열어 보지 마’라고 했어요.” 라일이 말했다. “그땐 그게 중요한 비밀이 들어 있어서인 줄 알았죠. 지금 생각하면 제가 따질 권리가 없다는 뜻이었을지도 몰라요.” 진혁은 쉽게 위로하지 않았다. 누군가 강제로 시킨 일의 의미를 뒤늦게 알아가는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대신 그는 라일에게 자신이 기록한 표를 건넸다. “지금은 내용 봐도 됩니다. 다만 글씨가 어려우면 천천히 읽으세요.” “감정사님 글씨가 제일 어렵습니다.” 둘은 짧게 웃었다. 소연은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풀리자 작업대 아래에서 작은 물병을 꺼냈다. 그녀가 오래전 조합에서 배달인들에게 주었다던 보리차였다. 진혁은 생각보다 진한 맛에 얼굴을 찡그렸고, 라일은 왠지 익숙한 향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날 오후 정유라는 옛 규정집의 출납 기록을 조사했다. 닷새 전 수리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은 ‘외부 복원 기술자’라고 적었지만, 실제 출입증을 발급받은 사람의 지문 인장이 없었다. 대신 회색 장부 조합의 유통 대리인이 검증관 근처에서 있었다는 경비 기록이 하나 나왔다. 대리인이 복원실에 들어갔다는 증거까지는 아니었다. 진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움직여 놓고 얻은 건 또 하나의 의심이네요.” 세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한 가지는 확실해. 누군가는 네가 그 문서를 진짜라고 믿고 움직이길 원해. 그러니 정반대로 하면 되겠지.” “정반대라면요?” “불명확한 조건을 거절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물건의 출처부터 따져 묻는 거야.” 진혁은 그녀가 왜 루멘 경매장을 운영하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세리아는 돈을 버는 일보다 돈 때문에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값을 부르는 순간, 사람들은 그 값이 물건의 진짜 가치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경매봉을 잡은 사람은 누구보다 그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 공방을 떠나기 전 진혁은 소연에게 복제 도면에 쓰인 잉크와 재료비를 얼마인지 물었다. 소연은 처음에는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오래전 배달인 조합과 관련된 일이니 자신에게도 찾을 것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진혁은 노동과 호의가 다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식 연구 비용에서 지급할 수 있는 항목을 정리해 주었고, 소연은 대신 시험 결과를 자신의 견습공들에게도 공개해 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둘 다 자기 이익만 지키지 않고 조금씩 양보한 거래였다. 카렌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냥 돈이 좋아서 감정사가 된 사람 맞아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돈이 좋아서 일하죠. 그래서 남이 일하고 돈을 못 받는 건 싫습니다.” 그날 저녁 윤담은 공식 공고를 게시했다. ‘출품번호 000의 봉인된 최초 감정서: 정식 출품 자격 불충족으로 보류. 다만 관련 시대의 감정 도구와 출처가 검증된 유물에 대한 공개 감정회는 예정대로 진행한다.’ 이 공고로 유물 경매를 미끼 삼은 함정이 곧장 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물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 다른 검증 가능한 물건들을 먼저 조사할 길이 열렸다. 진혁이 공고판에서 돌아설 때 작은 봉투 하나가 그에게 도착했다. 발신인은 하진 카스텔이었다. 안에는 짧은 초대장이 있었다. ‘경매장에서는 진실도 거래됩니다. 당신이 말한 공정한 경쟁, 이번에는 제가 받아들이지요.’ 그 아래에는 다음 감정회에서 등장할 유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0호 서판을 찍어 낸 인쇄원판.’ 진혁은 문구를 여러 번 읽었다. 훼손된 원본 서류를 되살리려는 사람이 원판을 필요로 한다면, 그 유물은 서명보다 훨씬 가치 있는 증거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놓고 진짜 경매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77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77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