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라는 이름이 적힌 운송장 앞에서 윤담은 처음으로 말을 잃었다.
서검증관의 넓은 탁자 위에는 노란빛 등불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운하에서 가져온 송장 사본과 칠성 경매원의 접수 기록, 두 사람이 각각 보관한 시간표가 서로 겹쳐 있었다. 서쪽 창고의 도하림은 원본을 넘겨주지 않는 대신 서기관 입회 아래 사본에 확인 도장을 찍었다. 이름 하나 때문에 서류가 갑자기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세리아가 오랫동안 찾던 사람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유나가 실제로 수취인이었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윤담은 두 손을 맞잡았다. “송장에 그렇게 적혔을 뿐입니다. 최초 인계 기록도 사본이고요. 같은 이름을 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죠.”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때로는 인정하기 싫은 가능성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노철에서 배웠다. 유나는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과거의 수취인 이름이 악용됐을 수도 있었다. 세리아를 노린 미끼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유나를 기다린 사람에게 이 종이를 아무 설명 없이 보여 주어서는 안 됐다.
“세리아 사장님께는 사실과 추정을 나눠 전달하죠.” 그가 말했다.
윤담은 곧장 전신을 작성했다. 발신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공식 노선을 쓰고, 기록의 사진을 따로 봉인해 보냈다. 라일은 사자 인장을 떠올리며 전신국 바깥 출입구를 확인했다. 누군가 봉투를 빼돌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점심 무렵 그들은 경매원의 옛 문서 보관실을 방문했다. 사람 키보다 높은 갈색 서가가 복도를 미로처럼 만들었고, 선반마다 거래 연도와 출품자의 신원 확인 방식이 적힌 나무패가 매달려 있었다. 온도 변화를 막기 위해 창문은 작았으며, 창 밖에서 들리는 상인들의 고함도 실내에서는 먼 소리로 들렸다. 문서 보관원 정유라는 책등을 손끝으로 두드려 먼지를 털어 낸 뒤, 금박이 거의 떨어져 나간 규정집 한 권을 내밀었다.
“최초 감정서라는 이름이 실제로 처음 등장하는 건 여기입니다. 삼백 년 전 거래 규약을 옮겨 적은 필사본이죠. 원본은 존재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습니다.”
진혁이 펼쳐 본 첫 장에는 의외로 평범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물건 이름, 만든 사람, 사용 흔적, 손상 여부, 위탁 동의, 예상 가치의 구분. 지금의 감정 절차와 비슷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사람의 이름을 기재하는 특별한 칸이 있었다.
‘거절한 자의 기록.’
노철 광산에서 백여명이 보여 준 명판의 문장과 닮아 있었다. 진혁은 가슴이 조금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오래된 전설의 감정사가 정말 실재했는지 몰라도, 누군가 이 원칙을 서로 다른 지역에 남겨 두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칸은 왜 만들었습니까?”
정유라가 손가락으로 아래쪽 주석을 가리켰다. “불확실해요. 당시에는 강제 계약과 전리품 거래가 흔했고, 물건을 내놓기 싫어한 사람의 거부를 별도로 기록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다만 지금 읽는 주석은 훨씬 뒤 시대에 붙은 해석입니다.”
카렌은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누군가 서둘러 지운 듯 종이 섬유가 벗겨진 자리가 있었다. 같은 페이지의 아래쪽에는 ‘감정사의 서약’이라고 적힌 글이 있었지만 일부가 찢겨 나갔다.
“이름은 여덟 칸인데, 서명은 일곱 개군요.”
진혁은 낡은 칸들을 세었다. 한 칸은 분명하게 비어 있었다. 이것이 모든 수수께끼의 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봉인함 은테의 여덟 점과 숫자가 같았다.
문서를 보다 보니 한 가지 어색한 점도 있었다. 규정집의 표지에는 삼백 년 전 연호가 쓰여 있는데, 본문에서 사용된 종이 일부는 훨씬 최근의 것이었다. 정유라는 필사본이 후대 수선을 거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혁은 그 말이 중요한 단서라고 느꼈다. 오래된 이름과 새로 고친 표지는 서로 다른 사람의 손길을 거쳤을 수 있었다.
정유라는 유물 보관실 옆의 작은 세척 작업대로 그들을 안내했다. 종이 한 장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어떤 노동이 필요한지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작업대에는 동물 털로 만든 가는 솔과 무게가 다른 유리추, 습기를 일정하게 조절하는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정유라는 손등에 묻은 밀랍을 닦으며 찢어진 모서리 하나를 복구하는 데도 여러 날이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귀한 기록이면 당장 펼쳐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억지로 펴는 순간 글씨가 없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진혁은 작은 집게를 보며 물었다. “그럼 일부러 감추는 게 아니라 지키느라 못 보여 주는 경우도 많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런 걸 악용하는 사람도 많고요. 진짜를 보여 주지 못한다는 사정을 이용해서 가짜를 만들면, 의심하는 사람까지 무례한 사람처럼 보이게 되죠.”
카렌은 아버지의 오래된 기록을 처음 접했을 때 자신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하루라도 빨리 답을 보고 싶어서, 검집의 봉인을 열고 아버지가 숨긴 말을 모두 알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된 물건을 함부로 다루면 증거 자체가 훼손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배웠다.
그녀는 부드럽게 진혁에게 물었다. “당신 능력이 처음 생겼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뭐였어요?”
“집세를 올릴 수 있는 보물의 가격이요.”
“진지하게요.”
진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게 진심이었어요.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기만 하면 누군가 저를 무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 판단해서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도 없을 줄 알았죠.”
“지금은요?”
“지금은 누군가 제가 옳다고 믿게 만들려고 손을 쓰면,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카렌은 더 캐묻지 않았다. 진혁이 말을 흐리는 데에는 농담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라 솔직한 말을 꺼내느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인 경우가 있었다. 둘 사이의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래된 종이를 털어 내는 솔의 사각거림만이 그 시간을 채웠다.
그 사이 라일은 기록실에서 쓰는 출입패와 자신의 배달인 조합 나무표를 나란히 비교했다. 비슷한 모양이 몇 군데 있었지만 동일한 제작 기법은 아니었다. 그는 아쉬워하다가도 예전처럼 억지로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소연이 자신을 알아본 듯했을 때의 떨림, 노철 수선집의 노인이 오래된 아이 이야기를 해 주던 순간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기억하는 아이를 자신이라고 정해 버리면 정작 그 아이의 이야기를 빼앗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가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요.” 라일이 툭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그걸 위해 남의 이름을 쓰고 싶진 않습니다.”
정유라는 그에게 기록 신청 양식 하나를 건넸다. “그럼 발견 장소와 날짜부터 남겨 둬요. 시간이 걸려도 그렇게 찾은 이름은 누가 쉽게 지우지 못할 테니까.”
라일은 말없이 펜을 잡았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남몰래 서랍을 뒤졌을 것이다. 지금 그는 자신의 이름이 비어 있는 신청서에 현재 사용 중인 이름을 적고 있었다.
오후에는 새로운 방문객이 찾아왔다. 서검증관 문턱에서 광택이 흐르는 장화를 멈춘 남자는 하진 카스텔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젊은 나이였으나 말투는 이미 여러 경매장을 지배한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그가 입은 짙은 녹색 외투의 단추에는 작은 장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뒤에는 회계사와 두 명의 운송 대리인이 동행했다.
“서진혁 감정사라 들었습니다. 최근 노철에서 멋진 일을 하셨다지요.”
“남의 광산에 빚만 남기고 왔습니다.”
하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실력을 숨길 수는 없죠. 저는 카스텔 상회에서 유물 정식 매입을 맡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최초 감정서라는 물건을 찾는 사람이 많더군요.”
“무슨 정보를 원하십니까?” 카렌이 물었다.
“경매가 열린다면 공정하게 입찰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진은 장갑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렸다. “오래된 유물은 소유권을 깔끔하게 만들수록 값이 오릅니다. 원소유자 문제가 남으면 제가 중간에서 처리할 수 있고요.”
말은 친절했지만, 아무도 원소유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물건에 소유권을 ‘처리’한다는 표현은 기묘했다. 윤담이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출품 적격 심사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와드리려는 겁니다. 출품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저희 상회가 보관료부터 부담할 수 있지요.”
하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뒷면에는 다른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전 감정 손해 보상 계약.’ 진혁의 이름과 상당한 보상금, 그리고 서진혁이 향후 밝혀내는 관련 유물 가치의 일정 비율을 상회에 귀속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얼핏 보면 호의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계약 기간에는 끝나는 날짜가 없었다.
“보상은 좋네요.” 진혁이 말했다.
“돈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예. 너무 많아서 조건을 다 읽습니다.”
카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진혁은 종이를 접지 않고 돌려주었다. “관련 유물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후 가치를 넘기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남의 사람 이름을 담보로 쓰려 들면 보상금보다 변호사 비용이 더 나오겠죠.”
하진의 미소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동행인 회계사가 작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진혁은 들었다.
“거절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지금 조건은요. 나중에 평범한 경매에 들어오시면 경쟁은 환영합니다.”
하진이 돌아간 뒤 윤담은 한참 문을 바라봤다. “그 상회는 정말 돈이 많습니다. 마음먹으면 낮은 가치의 물건도 비싸게 만들 수 있죠.”
“가치와 낙찰가는 다르니까요.” 진혁은 말했다. “기록이 없는 물건을 돈으로 덮으면 나중에 큰일 납니다.”
라일은 책장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방금 움직였다. 그가 사라지는 옷자락 끝을 보고 조용히 뒤따르자, 얇은 회색 실 하나가 복도 끝 문고리에 매여 있었다. 누가 지나가면 그 실이 끊어져 안쪽에 있는 작은 방울을 울리도록 만든 경보 장치였다. 라일은 건드리지 않고 경비원을 불렀다.
“제가 저걸 만들었다면 조용히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정직한 사람이거든요.”
경비원이 실을 확인하는 동안 진혁은 오래된 규정집에서 마지막 장을 찾았다. 책등이 흔들리면서 접힌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정유라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치고 당사자들이 볼 수 있도록 보존 유리 아래에 놓았다. 거기에는 필사본을 수리한 날짜와 기술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날짜는 놀랍게도 닷새 전이었다.
칠성 경매원의 봉인함이 운하에 도착한 바로 그날이었다.
누군가 오래된 감정 규약의 빈칸을 최근에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류를 고친 사람의 서명은 읽을 수 없도록 지워져 있었다.
진혁은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이번 사건에는 전설보다 현실의 손길이 더 짙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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