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운하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정오였다.
화령의 거리들은 시장과 운하를 경계로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칠성 경매원 앞에서는 도금 마차가 바퀴 소리를 감추려고 고무 가죽을 덧대고 다녔지만, 운하 주변에서는 튼튼한 수레들이 돌바닥을 덜컹거리며 달렸다. 젖은 밧줄이 말뚝마다 축 늘어졌고, 물에 떠다니는 톱밥 사이로 새까만 물고기들이 움직였다. 강가 창고의 화물들은 냄새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었다. 향료는 달콤하고, 광물은 비릿하며, 오래 보관한 유물 상자는 곰팡이와 왁스의 냄새가 났다.
“여기가 황금도시의 진짜 뒷마당이군요.” 라일이 코를 찡그렸다.
“뒷마당이 없으면 앞마당도 없어요.” 카렌이 말했다. “저 짐을 옮기는 사람들이 있어야 경매원이 열리니까요.”
세 사람은 물류 창고 감독인 도하림을 만났다. 도하림은 커다란 장부를 품에 끌어안고 분주하게 하역장 사이를 오갔다. 두툼한 모자에는 송진 가루가 묻었고, 목에는 새끼줄로 묶은 나무 열쇠표가 여러 개 걸려 있었다.
“지난 닷새 사이에 감정 봉인함이 있었는지요?” 진혁이 물었다.
“이 운하로 들어오는 봉인함만 하루 열세 개입니다. 물건 이름을 모르면 못 찾죠.”
윤담이 발급한 공식 확인서를 건네자 도하림은 바쁘다는 말을 삼켰다. 그는 이관 기록을 펼쳤다. 기록된 상자는 확실히 존재했다. 닷새 전 밤, 붉은 등불이 켜진 제4접수대에서 입고됐고, 다음 날 오전 칠성 경매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상한 항목이 하나 있었다. 보관함의 무게가 입고 당시와 출고 당시 서로 달랐다.
“차이가 어느 정도죠?”
“은화 서른 닢만큼,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는 세 근 반입니다.” 도하림이 말했다. “나무 젖은 것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보관함이 방습 상자라면 얘기가 다르죠.”
라일은 창고 내부의 통로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상자 속에 무언가를 넣었다 뺐을 수도 있겠네요.”
“둘 다 가능성이에요.” 카렌이 제동을 걸었다. “먼저 저울에 문제가 없었는지부터요.”
도하림은 화물용 눈금을 다시 확인하게 했다. 검사용 추를 올렸을 때 저울은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치우쳤다. 무게 차이 일부는 오래된 저울 탓이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도하림은 며칠 전 야간조의 저울을 수리한 기록까지 찾아왔다. 붉은 등 아래로 서기들이 분주히 다녔다. 대부분은 누군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출항이 늦어져 하루 품삯이 깎일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진혁은 서기들에게 차와 빵을 돌렸다. 라일이 눈썹을 들었다. “우리가 뇌물 주는 겁니까?”
“증인에게 돈을 주면 뇌물이지만, 쉬는 사람한테 빵을 주면 빵입니다. 다만 누가 샀는지 영수증은 남겨야죠.”
도하림의 설명에 따르면 며칠 전 어두운 우의를 쓴 사람이 붉은 신호등이 켜진 동안 화물을 맡기고 떠났다고 했다.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접수대의 나무 토큰 한 장이 보존돼 있었다. ‘000’이라고 찍힌 표였다. 흠집의 위치가 출품 번호와 닮아 있었으나 똑같다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때 멀지 않은 시장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창고 앞 중개 장터에서 폐유물 임시 경매가 시작된 것이다. 운하에서 발견된 낡은 물건을 정식 경매원보다 낮은 수수료로 처분하는 곳이었다. 불량품과 진품이 뒤섞여 가끔 좋은 물건이 나오지만, 아무 보증 없이 충동적으로 사들이면 목돈을 잃기 쉬웠다.
“잠깐만 들렀다 가죠.” 진혁이 말했다.
카렌이 팔짱을 꼈다. “위험한 물건이면 안 됩니다.”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요.”
“지금까지 당신이 ‘잠깐’이라고 말한 일은 전부 밤까지 갔어요.”
라일은 이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셋이 도착했을 때 임시 경매상은 푸른 천 위에 볼품없는 물건 일곱 개를 늘어놓았다. 부러진 말발굽, 녹슨 물레, 금 간 렌즈, 둥글게 말린 구리판, 빛을 잃은 유리 구슬, 나무 호각, 그리고 손바닥만 한 검은 조개껍데기였다.
상인은 구리판을 들어 보였다. “원래는 마법 악기의 부품입니다. 소리가 안 나니 장식으로 쓰세요. 시작가는 동화 스무 닢!”
아이들은 웃었다. 근처 종 수리공도 손사래를 쳤다. “쓸모없어요. 두드려도 울리지 않아요.”
진혁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계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소리를 삼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구리판의 안쪽에서 먼지처럼 작은 점들이 물결 모양으로 배열된 것이 보였다. 화령 공방의 장인이 만든 흔적은 아니었다. 쇠를 두드린 자국 사이로 진동을 유도하는 미세한 틈이 있었다.
“수리공님, 시험해 봐도 됩니까?”
상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진혁은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판 위와 옆의 돌판 위에 각각 굴렸다. 돌판에서는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구리판 위에서는 미세한 떨림만 남았다. 그는 판을 돌려 같은 시험을 반복했다. 한쪽 방향에서는 효과가 거의 사라졌다.
“소리를 막는다기보다 일정한 진동을 한 방향으로 흘리는 물건 같습니다.”
“그래서 뭘 하게요?” 라일이 물었다.
“공방 수차와 펌프에 붙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마레온 방벽에 쓰려면 더 큰 시험이 필요하고요.”
경매상은 그 말을 듣자 시작가를 슬쩍 올리려 했다. 카렌이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시작가를 공지했어요. 바꾸려면 다시 공고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마지못해 경매상은 동화 스무 닢에서 시작했다. 한 재료상이 동화 서른 닢을 불렀고, 진혁이 마흔 닢을 제시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수리공이 동화 쉰 닢을 불렀다. 진혁은 마지막으로 은화 한 닢을 제시했다. 동화 백 닢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장터는 그 정도 금액에도 술렁였다. 수리공은 고개를 저었고, 경매봉이 내려왔다.
“은화 한 닢! 말이 안 되는 쇳조각, 낙찰!”
라일이 진혁의 얼굴을 살폈다. “또 돈 버릴 물건을 산 겁니까?”
“이번엔 시험할 가치가 있죠. 가치가 있다는 말과 돈이 된다는 말은 다릅니다만.”
근처에 있던 운하 펌프 수리공이 다가왔다. 그는 물을 끌어올리는 기계가 특정 속도에서 심하게 떠는 문제를 설명했다. 진혁은 고장 난 현장에 시험용 판을 대 보자고 제안했다. 수리공과 도하림이 동의한 뒤, 작업장 옆의 작은 펌프에서 안전 감독과 함께 시험이 이루어졌다. 금속판을 억지로 고정하지 않고 나무 받침으로 세워 소음 변화를 비교했다. 분당 회전수를 낮췄을 때 판이 진동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반면 높은 회전수에서는 판이 도리어 떨렸다.
“쓸 수 있는 범위가 좁군요.” 수리공이 말했다.
“그래서 싸게 산 거겠죠.” 진혁은 웃었다. “그런데 그 범위를 정확히 알아내면, 그 밖에서도 쓰는 위험한 짓을 안 하게 됩니다.”
시험이 끝나자 운하 수리공은 진혁을 작은 작업방으로 데려갔다. 방 한쪽에는 부러진 펌프 축들이 길이 순서로 걸려 있었고, 벽돌 난로 위에서는 쇠기름이 녹고 있었다. 기술자들은 마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신비한 물건 하나만 믿고 기계를 돌렸다가 누군가의 손가락이 잘리면, 그 피해는 유물이 아니라 자기 가족에게 돌아온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적이 아닙니다.” 수리공이 말했다. “어떤 회전수에서 기계가 버티는지, 고장 나기 전에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아는 거죠.”
진혁은 그 말에 노철에서 본 방진광을 떠올렸다. 같은 진동 저감 소재라도 한쪽은 금속이었고 다른 한쪽은 광물이었다. 두 재료가 만나면 좋은 결과가 있을 수도, 예상하지 못한 공진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는 종이에 안전 제한을 먼저 적었다. 작은 시험용 펌프에만 적용, 사람을 태우는 설비에 사용 금지, 고속 운전 중 검사 금지, 결과가 나쁘면 즉시 분해.
“이 정도면 계약서보다 경고문이 더 길겠군요.” 라일이 혀를 찼다.
“그게 좋은 계약서입니다.” 카렌이 말했다. “사고가 난 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싸우는 것보다 먼저 위험을 줄이는 편이 훨씬 싸니까요.”
수리공은 카렌의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의 아내는 십 년 전 펌프실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날 이후 불확실한 마법 장치를 기계에 달기 전에 자신이 직접 분해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진혁은 누군가 돈을 지불하며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비로소 이해됐다. 물건의 가치에는 때로 그 물건이 고장을 막아 줄 수 있는 시간까지 포함돼 있었다.
라일은 작업방 구석에서 오래된 회전축 하나를 굴려 보다가 수리공에게 야단을 맞았다. “그건 전시품이 아니야, 자네 발이 다친다고!” 라일은 금세 손을 들었다. “안 훔쳤습니다. 오늘은 만져 보기만 했습니다.” 기술자들이 터져 나온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짧은 순간 진혁은 라일이 누군가에게 과거를 추궁받지 않고 현재의 행동만으로 꾸지람 듣는 것을 이상하게 편안해하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카렌은 수리공이 제공한 작업실 기록을 자세히 읽었다. 일부 펌프는 방벽이나 던전의 부속 장비로도 쓰였으나, 시험에서 나온 개선 효과를 당장 마레온의 방벽 안전성과 연결할 수는 없었다. 서로 다른 압력과 습도, 진동 주파수를 하나씩 비교해야 했다. 그녀는 노철의 백여명이 조사받던 장면을 떠올렸다. 어떤 작은 가능성을 확정된 사실처럼 꾸미는 사람은 늘 있었다.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믿고 자신의 전부를 걸곤 했다.
진혁은 구리판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그는 이 물건이 손님들을 웃기는 고철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도구가 될 가능성을 보았다. 많은 판타지 이야기에서 유물은 빛을 뿜어 대륙을 뒤흔들었다. 이 구리판은 달랐다. 장인 한 명의 야간 수리를 조금 덜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
저녁이 되기 전, 그는 그 구리판의 사용 시험권을 소형 펌프를 제작하는 공방에 조건부로 넘겼다. 제작자가 시험비를 지급하고, 결과에 따라 후속 계약을 협의하는 방식이었다. 당장 손에 쥔 돈은 은화 몇 닢뿐이었지만, 진혁은 숫자가 적힌 영수증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기뻐 보여요.” 카렌이 말했다.
“드디어 오늘은 범인을 찾는 대신 물건을 감정했습니다.”
“범인은 아직 못 찾았죠.”
“기쁨을 그렇게 깎아내리지 마세요.”
라일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게다가 방금 산 구리판을 팔아도 경비를 빼면 흑자입니까?”
진혁은 표정을 굳혔다. “정산 이야기는 저녁 먹고 합시다.”
그들은 다시 도하림에게 돌아가 저울 기록의 확인 결과를 받았다. 출고될 때 보관함에 늘어난 무게는 단순한 물기 탓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서기 한 명이 남긴 쪽지에는 ‘붉은 등 아래에서 누군가 두 번째 묶음을 넣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넣었는지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접수대의 운반 목적지 기록이었다. 봉인함의 최초 배송 주소는 칠성 경매원이 아니었다.
‘마레온. 루멘 경매장. 수신인: 유나.’
진혁은 한동안 종이를 내려놓지 못했다. 세리아가 잃어버린 사람의 이름이 여기에 있었다. 윤담이 받은 출품 요청은 화령에서 시작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날부터 누군가 주소를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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