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은 도둑이 되는 데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잠깐 눈을 돌릴 때까지 기다리면 되거든.”
“그 말을 경비대장 앞에서도 해 보시죠.”
진혁이 대꾸하자 라일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헥터 형님은 너무 무서워서 싫습니다. 난 오늘까지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세 사람은 마레온 시청 뒤편의 기록관 앞에 서 있었다. 밤거리는 낮보다 한산했지만 완전히 조용하지는 않았다. 선술집마다 선원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거리의 기름등은 짙은 안개 속에서 희미한 원을 만들었다. 멀리 부두에 정박한 배의 종이 바람에 흔들렸다. 기록관은 그 소란에서 한 골목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낮은 돌담과 수백 년 묵은 느릅나무가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겁니까?”
라일이 말했다.
“카렌 씨 아버지의 사망 증명서를 확인하려고요.”
“그거라면 시청 창구에서 낮에 열람하면 되잖아.”
“공식 장부는 복사본뿐이래요. 원본은 지하에 있고.”
“그걸 어떻게 알았지?”
진혁은 카렌을 돌아봤다. 그녀가 짧게 말했다.
“아버지는 이 도시의 경비대원이셨어요. 사망 기록이 이상하다는 말을 옛 동료에게 들었어요. 얼마 전 그분이 돌아가셨고요.”
라일은 잠깐 말이 없었다. 바람에 검은 망토 자락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록을 믿고 싶어 하지.”
그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기록이 사람을 버릴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고.”
기록관 정문에는 야간 근무 경비가 둘 서 있었다. 진혁은 정면으로 들어가 허가를 받자고 제안했다. 라일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지만, 카렌이 서류를 보여 주자 경비들은 선뜻 들여보냈다. 카렌 아버지가 과거 경비대원이었으며 그의 사망 관련 자료를 확인하려 한다는 사유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봐요. 사람 사는 세상엔 자물쇠보다 말이 잘 통할 때가 많습니다.”
진혁이 속삭였다.
“그 말은 아직 자물쇠 안을 못 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예요.”
라일이 복도 끝을 가리켰다.
기록관 지하는 습기를 막으려고 두꺼운 돌로 지어져 있었다. 출입문마다 시청 인장이 찍혀 있고, 문지방에는 외부 마법을 차단하는 소금과 은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허가증으로 열 수 있는 구역은 두 번째 복도까지였다. 그 아래부터는 정식 기록관 책임자의 인장이 필요했다.
“여기서부터 제가 할 일이 있군요.”
라일은 잠금장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얇은 철사 여러 개를 꺼내더니 작은 금속 조각을 귀에 붙였다. 안쪽의 톱니 소리를 들으려는 듯했다.
진혁이 물었다.
“그 정도면 도둑이 아니라 장인이신데요?”
“장인은 정직한 대가를 받지. 도둑은 덜 정직한 방법으로 받아.”
“그건 자랑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남들한테 배우라고 하지 않잖아요.”
찰칵.
자물쇠가 풀렸다. 라일이 문을 열자 차고 눅눅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진혁은 출입 허가증을 따로 내려놓았다. 나중에 발견되더라도 정식 경로로 어디까지 들어왔는지 구분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왜 이런 세세한 기록까지 신경 쓰는지 생각하다가 짧게 웃었다. 감정사라는 직업이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지하에는 수천 권의 서류가 있었다. 종이 묶음이 연도별로 선반에 쌓여 있고, 각 선반에는 도시 인장이 달린 작은 금속 표찰이 붙어 있었다. 카렌은 어릴 적 아버지가 사망한 해를 말했다. 진혁은 날짜에 맞춰 장부를 찾아냈다.
장부를 찾는 동안 세 사람은 기록관의 복잡한 체계를 직접 겪었다. 출생 신고와 결혼 기록은 일상적인 민원 서가에 놓였지만, 사망 기록은 별도로 봉인되어 있었다. 도시가 여러 전염병과 전쟁을 겪은 뒤부터 사망 증명서 한 장으로 상속과 채권, 길드 지분까지 움직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혁은 아래쪽 서가에 붙은 업무 안내문을 읽었다. 사망 증명서의 원본 열람은 친족에게만 허용하고, 수정 기록은 별책에 남긴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기록관장 인장이 찍힌 진한 자주색 도장이 있었다.
“수정 기록이 따로 있다면 그걸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열람하려면 기록관장이 필요해요.”
카렌이 대답했다.
“그분은 지금 시의회 숙직실에 있을 겁니다.”
“그럼 내일 정식으로….”
진혁이 말을 꺼내다가 멈췄다. 내일은 루멘의 소유권 분쟁을 마무리해야 하는 날이었다. 기록관장 한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아무 장부나 뜯어 가져갈 수도 없었다.
라일이 낮게 웃었다.
“사람들은 내가 자물쇠를 잘 따는 줄만 알지. 사실 가장 잘하는 일은 어떤 종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기억하는 겁니다.”
그는 서가 한쪽에 붙은 날짜 표찰을 가리켰다. 표찰의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붉은 잉크 자국이 있었다. 시청에서 수정 기록을 옮길 때 사용하는 이동 확인 도장과 같은 색이었다.
“원본은 바로 여기 있고, 수정 장부는 아마 오른쪽 방에 있을 거야. 이렇게 표찰에 흔적을 남기는 건 누군가 나중에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지.”
진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법적인 침입은 마음에 걸렸지만, 적어도 원본과 바뀐 기록을 함께 확인하면 누군가 허위 문서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입증할 수 있었다.
카렌은 장부를 펼치기 전 손수건을 꺼냈다. 먼지를 털어 내는 손길이 평소 검을 쥘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이 안에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적혀 있겠죠.”
“적혀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혁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 왜 진실을 숨기려 했는지는 남아 있을 겁니다.”
카렌은 잠깐 그를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경매장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진혁이 비밀을 숨기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지금도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을 아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음대로 단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믿을 수 있었다.
사망 기록은 생각보다 짧았다.
‘경비대원 레온 하르트. 순찰 중 사망. 유품: 외투, 장갑.’
카렌은 종이를 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 밑에는 유족 보상금과 처리 공무원의 서명이 있었다.
“그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출근하셨어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는 그 종이에 적힌 날짜로 제사를 지내셨어요.”
진혁은 문서 위에 손을 얹었다. 미세한 떨림이 손끝으로 올라왔다.
[문서: 사망 처리 확인서.]
[현재 상태: 공적 기록.]
[잔류 기억: 서명 세 번, 도장 두 번, 교체 한 번.]
[원본 작성 시각: 표시된 사망일보다 나흘 전.]
“나흘 전….”
“뭐가요?”
“이 서류는 아버님이 죽었다고 알려진 날보다 나흘 먼저 작성됐습니다.”
카렌의 입술이 굳었다.
“말도 안 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확인할 게 있습니다.”
진혁은 표찰의 제작 연도와 잉크의 종류를 비교했다. 바깥 서류의 잉크는 당시 시청에서 쓰던 푸른빛 먹물이었지만 안쪽으로 스며든 자국은 검은색이었다. 누군가 처음 쓴 문서 위에 새 글씨를 씌웠다. 자세히 보니 종이 가장자리에 아주 가는 바늘구멍이 있었다. 원본을 옮겨 붙이는 데 쓰는 관공서의 제본 방식이었다.
“여기 아래에 다른 종이가 있습니다.”
그때 라일이 뒤에서 말했다.
“찾아도 놀라지 마. 그게 꼭 기쁜 소식은 아닐 테니까.”
라일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선반 뒤편의 낡은 벽돌 하나를 눌렀다. 벽돌이 뒤로 들어가며 손바닥 크기의 틈이 열렸다. 그 안에는 봉인된 갈색 봉투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카렌이 물었다.
“아주 오래전에 여기서 비슷한 걸 훔친 적이 있어서.”
“정말 물건을 훔친 겁니까?”
“처음엔 그래야 하는 줄 알았죠.”
라일이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겉에는 ‘시의회 비공개. 레온 하르트 관련 보관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카렌이 봉인을 뜯으려 하자 진혁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잠깐. 혹시 함정이면….”
“함정이면 내가 손을 댈게요.”
카렌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에게 관련된 문서를 타인이 대신 뜯게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진혁은 손을 거뒀다.
봉투에는 서로 다른 세 통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는 시청에 보낸 경비대의 보고서였다. 두 번째는 루멘에서 발급한 금지 구역 출입증. 세 번째는 이름과 주소가 지워진 채무 계약서였다. 그 계약서에는 레온 하르트가 보증인으로 서명해 있었다.
‘담보: 친족의 신원과 자유. 대금 미납 시 회수.’
카렌은 턱을 가늘게 떨었다.
“이게… 이안의 빚이에요?”
“아버님이 도박을 하거나 돈을 빌린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혁이 말했다.
“누군가 봉인을 지키게 하려면 가족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카렌은 벽을 한번 세게 쳤다. 소리가 지하에 오래 울렸다.
“그럼 우리 가족이 겪은 일이 전부….”
말끝을 잇지 못했다.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위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서류들 사이에는 작은 지도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마레온 지하 수로와 루멘의 배수관을 이어 그린 도면이었다. 우측 아래에는 현장 책임자 다섯 명의 도장이 찍혀 있었고, 가장 마지막 서명은 레온 하르트였다. 낡은 잉크였지만 도장은 분명했다.
“아버지는 경비대원이셨는데, 왜 하수도 도면에 서명하셨을까요?”
카렌이 물었다.
진혁은 도면을 등잔에 비춰 보았다. 계단처럼 이어진 선들은 항구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길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루멘 아래에는 일반 배수관보다 훨씬 넓은 빈 공간이 그려져 있었다. 그 주위에는 일곱 개의 고리가 있었다.
“이곳은 배수관이 아니라 봉인실입니다.”
“시청 문서에는 그냥 배수 시설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겠죠.”
진혁은 도면 오른쪽의 수정 이력을 짚었다. 배수관을 처음 설치한 날짜보다 뒤늦게 ‘확장 공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같은 위치에 누군가 새로운 관을 연결하고, 기존의 물길을 일부 막았다는 표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하의 거대한 몸과 마레온 바닷물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공사로 보였다.
“그렇다면 누가 이 공사를 지시한 겁니까?”
라일이 기다렸다는 듯 도면 밑의 작은 칸을 가리켰다.
“시의회 특별 거래 위원회. 이름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인장은 남아 있지.”
카렌의 얼굴이 굳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조사하던 기관이에요.”
그 말이 세 사람 사이에 가라앉았다. 레온 하르트는 단순한 무기 도둑을 쫓은 것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를 움직이는 비밀 거래의 중심을 조사하다가 사라진 사람이었다.
진혁은 서류들의 순서를 그대로 유지해 봉투에 넣었다. 증거를 제멋대로 바꾸면 나중에 누군가 위조했다고 몰아붙이기 쉬웠다. 라일은 그가 접는 순서를 지켜보다 혀를 찼다.
“내가 훔친 물건을 저렇게 예쁘게 정리하는 사람은 처음 봐.”
“이건 훔친 게 아니라 확인하는 중입니다.”
“아, 그렇군요. 야간 허가 없이 들어와 확인하는 중.”
카렌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둘 다 입 다물어요. 지금 웃을 때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엄했지만 눈동자에는 조금 생기가 돌아왔다.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자기 손으로 찾아냈다는 안도감이 뒤늦게 밀려온 듯했다.
라일은 봉투에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 네 번째 서류였다. 그곳에는 어린아이의 필체처럼 삐뚤빼뚤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라일.’
진혁이 돌아보았다.
“당신 이름인데요.”
“지금 쓰는 이름이지.”
라일은 건성으로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릴 때 나는 루멘의 배달 아이였어. 사람이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지. 그래서 장부를 훔쳐 봤어. 그날 이후 아무도 내 진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됐고.”
“그럼 라일은….”
“내가 정한 이름이야. 훔친 것도 아니고, 팔린 것도 아닌 이름.”
진혁은 서류를 다시 살폈다. 라일은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빼앗긴 이름을 되찾으려는 사람이었다. 그는 도둑이면서도 고가의 금은보화를 건드리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라일은 봉투 안쪽의 작은 붉은 인장을 가리켰다.
“이런 식으로 문서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거래가 확정되기 전에 신원과 동의를 함께 빼앗는 자들이지. 검은 인장 상회는 그런 거래를 전문으로 해.”
진혁은 문서에 손을 얹었다.
[거래 기록 일부.]
[미완료 결제 잔액: 한 사람의 이름.]
[채권 양수인: 검은 인장 상회.]
[상환 대상 변경: 서진혁.]
그는 한동안 글씨를 바라봤다. 어젯밤부터 자신을 향해 모이는 이상한 계약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누군가 루멘을 깨우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 책임을 떠안을 사람으로 말단 직원을 선택했다.
“저를 미끼로 쓰는군요.”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라일이 대답했다.
그때 지하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 철제 장화 굽이 일정한 간격으로 돌바닥을 두드렸다. 기록관의 야간 경비와는 달랐다. 무겁고 조용하게 걷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의 걸음이었다.
“이쪽으로 와!”
라일은 봉투를 접어 진혁의 품에 넣었다. 세 사람이 선반 사이로 몸을 숨기자 입구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에는 서로 겹쳐진 두 개의 인장이 달려 있었다.
카렌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검은 인장 상회.”
진혁은 숨을 낮췄다. 갑옷 입은 남자가 동료에게 말했다.
“계약 회수 대상 확인. 이름은 서진혁.”
등잔불이 흔들렸다.
“살아 있는 상태로 데려와라. 남은 수명까지 출품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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