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65화
PAYLUA ORIGINAL · 제65화

65화. 이름을 훔친 적 없는 도둑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457자

오프라인 책장
젖은 장갑에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손목 안쪽에 작은 종 세 개가 한 줄로 수놓아져 있었다. 라일은 그 장갑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어제 밤 여관 복도에서 발견된 물건은 카렌이 종이 봉투에 넣어 봉인해 두었다. 젖은 가죽은 하루가 지나도 완전히 마르지 않았고, 손가락 끝에는 검은 광물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진혁이 확대경으로 보려 하자 라일이 먼저 말했다. “이거 배달인 조합의 물건입니다. 다만 화령에서 쓰던 것은 아니에요.” 카렌이 물었다. “어떻게 압니까?” “소연 할머니가 나한테 준 나무표의 뒤를 보세요.” 작은 나무표 뒷면에는 종을 세 번 두드리는 기호가 있었다. 바깥 종 둘의 방향이 다르고 가운데 종 아래에는 짧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젖은 장갑에는 같은 형태의 자수가 있었다. 하지만 바늘땀은 더 굵었고 실은 오래전 방식으로 꼬여 있었다. “비슷한 조직의 물건일 수는 있겠네요.” 카렌이 말했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이걸 기억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내 과거를 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라일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차분했다. 그는 예전이라면 손목 문양 하나만 보고 상대를 따라갔을 것이다. 이름을 찾고 싶다는 욕망이 매번 그를 서두르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사건들은 그에게 똑같은 교훈을 남겼다. 성급한 확신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원까지 훔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을의 아침 시장은 역참 맞은편에 열렸다. 광산이 멈춘 뒤에도 사람들은 산나물과 감자, 가죽 수선 도구를 사고팔았다. 작은 금속 상점에서는 예전 채굴 인부들이 쓰던 장비를 고쳐 팔았고, 빵집 굴뚝에서는 어두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령처럼 상점마다 입찰 공고가 걸리지는 않았지만, 누가 무엇을 고치고 누구에게 맡겼는지 주민들이 서로 알고 있었다. 라일은 그곳에서 장갑의 제작자를 찾았다. 짙은 갈색 실과 세 종 자수는 오래된 역전 수선집에서만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주인은 은퇴한 재봉사 오진백이었다. 그는 탁자 아래에서 오래된 주문장을 꺼내고는 말없이 장갑을 살폈다. “내가 바느질했군.” “누구한테 팔았습니까?” 라일이 물었다.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어. 주문장을 보려면 주문한 사람의 동의가 있어야 하니까.”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준입니다.” 진백은 뒤늦게 라일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백이 두꺼운 주문장을 꺼내는 동안 라일은 수선집 안을 둘러봤다. 벽에는 다른 사람의 장갑과 멜빵, 어린아이의 작은 신발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작업대에는 같은 굵기의 실을 감은 실패가 색깔별로 놓여 있었고, 창문 가까이에는 바늘 끝을 닦는 기름병이 있었다. 라일은 자신이 이런 곳에 와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숨을 죽였다. 그러나 생각을 따라가려 하자 기억은 금세 흐려졌다. 눈앞의 수선집은 이 도시의 어느 수선집과도 비슷할 수 있었다. 따뜻한 풀 냄새와 가죽 냄새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가 어릴 적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그 냄새만으로 증명할 수 없었다. “제가 예전에 이 물건을 맡겼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진백은 라일의 손을 바라봤다. “주문장이 있다고 해도 사람 얼굴을 지금 것과 비교하는 건 쉽지 않지. 더욱이 저런 장갑은 여러 사람한테 만들어 줬어. 광부에게도, 배달인에게도.” 라일은 자신이 장갑을 기억한다고 거짓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일을 정확히 안다는 말보다, 모른다고 말할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됐다. 진혁은 가게 구석의 작은 물건에 눈길을 주었다. 반짝이는 보석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래된 구두끈에 묶인 가느다란 금속 고리였다. 가격표에는 동화 세 닢이 적혀 있었다. 그는 저 고리의 크기가 화령 배달인 조합의 안전 귀환 표식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봤지만, 함부로 집지는 않았다. “저건 무엇에 씁니까?” “상자에 끈을 걸 때 쓰는 거야. 짐이 떨어져도 손목을 잡아당기지 않도록 끊어지게 만든 고리지.” 라일이 그 말을 듣고 급히 돌아봤다. “끊어지게 만든다고요? 보통은 안 끊어지게 만드는 거 아닙니까?” “무거운 짐을 손목에 매면 낭떠러지에서 사람이 같이 끌려가거든. 오래전 배달인들은 값비싼 짐을 놓지 못하다 다쳤어.” 진혁은 처음으로 금속 고리의 약한 부분이 결함이 아니라 기능일 수 있음을 알았다. 가느다란 홈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가공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윤담이 있었다면 파단 시험을 하라고 했을 것이다. 진혁은 고리를 구매하지 않고 제작법만 물었고, 진백은 누가 처음 그 구조를 만들었는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왜 아직 팝니까?”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비싼 끈보다 끊어질 때를 아는 고리를 찾지.” 가게 바깥으로 나가면서 라일은 그 고리를 돌아봤다. 그의 기억 어디엔가 사람 손목에 묶인 끈이 사라지는 장면이 떠오를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그 장면을 자신의 과거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다만 진혁에게 말했다. “저런 물건이 있었다면 예전의 나는 일을 조금 덜 망쳤을지도 모르겠네요.” “물건 하나로 인생이 다 바뀌면 좋겠지만, 대개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죠.” 라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부터 좋은 말만 하시네요. 장부에 제 이름 적어서 돈 빌릴 작정입니까?”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습니까?” 두 사람은 웃었다. 웃음 사이에 남은 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손에 든 장갑 봉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천천히 시장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입술을 다물고 다시 장갑을 내려놓았다.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오래전에 이곳에서 아이 하나가 길을 잃었지. 열 살쯤 됐나. 자기는 다른 도시에서 왔다고 했는데, 데리고 온 어른은 아이 이름 대신 세 자리 숫자를 불렀어.” 라일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무슨 숫자였습니까?” “그건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하네. 몇 달 전에 도시에서 조사하러 왔던 사람도 같은 질문을 했어. 정작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건 아이가 배고프다고 울었다는 것뿐이야.” 진혁은 라일을 바라봤다. 당장 숫자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얼굴에 나타났지만, 라일은 오히려 장갑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어떤 빵을 좋아했는지는 기억하십니까?” 진백은 잠깐 놀라더니 미소 지었다. “못생긴 호밀빵이었어. 모양이 나쁘다고 사람들이 안 사던 걸 아이가 두 개나 먹었지.” 라일은 피식 웃었다. “참 안목이 좋았네요.” “그 아이가 너인지 나는 몰라. 사람 얼굴은 세월이 지나면 바뀌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억이 변하기도 하거든.” 라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백의 말은 이름 하나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하지만 라일은 처음으로 자신이 찾아야 할 것이 숫자보다도 구체적인 삶의 흔적임을 느꼈다. 배고파했던 아이, 빵을 먹었던 장소,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준 누군가. 그런 일들은 후보 번호보다 훨씬 사람답게 남았다. 그날 오후, 카렌은 회색 장갑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설관리소의 허가된 방문 기록을 신청했다. 진백은 장갑을 수리한 사실만 공증한 별도 문서를 작성했고, 의뢰인의 이름은 비공개로 남겼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얻기 위해 사생활을 함부로 열람할 수는 없었다. 진혁은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라일에게 물었다. “예전처럼 남의 장부를 훔치면 빨리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그런데 왜 안 합니까?” “내가 이름을 빼앗긴 게 싫었으니까요.” 진혁은 더 묻지 않았다. 기록을 기다리는 동안 일행은 마을의 작은 물품 반환 행사에 들렀다. 광산 폐쇄 뒤 창고에 남은 개인 물품을 가족에게 되돌려주는 자리였다. 이름표가 남은 모자, 유리가 깨진 회중시계, 사용하지 않은 도시락통이 탁자 위에 놓였다. 누구도 경매 망치를 들지 않았다. 대신 주민들은 물건의 주인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노파가 낡은 장화를 보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남편이 신던 것과 비슷했지만, 밑창 수선 자국이 달랐다. 그녀는 잠시 장화를 들고 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내 남편 것은 아니네요.” 라일은 노파의 선택을 오래 지켜봤다. 기억이 닮았다는 이유로 가져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물건을 놓아줬다. 자신의 외로움보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혁은 반환 행사 기록을 정리하는 데 손을 보탰다. 과거 경매장의 물건 목록을 만들던 버릇 덕분에 물품 설명을 정확히 적을 수 있었다. 그가 낡은 도시락통에 ‘반환 불명’이라고 쓰려 하자 서희가 대신 ‘수취인 확인 중’이라고 수정했다. “글자 하나가 다르네요.” “다릅니다. 불명이라고 하면 나중에 버려도 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확인 중이라 적으면 누가 계속 찾아야 한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 한 줄은 라일에게도 오래 남았다. 그 역시 누군가가 부른 ‘이름 불명’이 아니라, 아직 확인 중인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행사 끝에 주민들은 소액의 보관료를 놓고 다퉜다. 물건을 오래 관리하려면 창고비가 들었지만 가족에게 그 돈을 모두 청구하면 반환을 포기할 사람이 많았다. 진혁은 비용을 숨기지 않고 공제조합의 공동 예산으로 어디까지 부담할지 정하자고 제안했다. 상인으로서 할 수 있는 조언이었고, 마을이 결정할 몫이었다. 그 과정에 완벽한 답은 없었다. 그래도 작은 물건의 가치를 다루는 일에 처음으로 누군가의 사정을 계산에 넣을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오자 태문 역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누렇게 변한 수송 장부 사본을 가져왔다. 광산에서 사용하던 공용 장비가 폐쇄되기 전 마지막으로 이동한 기록이었다. 최근 누군가 그 장부를 연구용으로 열람했는데, 열람자가 자신을 ‘제32후보’라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어디에 그 이름을 썼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이름란이 아니라 참고란에. 서명은 없었어. 대신 오래전 쓰던 장비 목록에 빨간 동그라미를 쳤지.” 진혁은 사본을 펼쳤다. 표시된 항목은 일곱 개의 종과 수차 관리소 등불, 그리고 같은 모양의 방진광 시료였다. 목록 아래에는 별도 재고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 번호가 그들이 받은 금속판의 좌표와 연결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태문은 마지막 장을 넘겼다. 장비를 받았던 사람의 서명 대신 작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수리 후 반환 예정. 발신인 부재. 수취인 권리 포기 아님.’ 카렌이 잠깐 숨을 멈췄다. 화령에서 진혁의 기억을 묵시적으로 넘기려던 문구와 정반대였다. 부재가 권리 포기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선언. “누가 이걸 적었을까요?” 진혁이 물었다. 태문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광산 마을의 골목에는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 산 사람들은 한 여자를 기억하지. 남들처럼 금을 찾지 않고, 누가 무엇을 돌려받아야 하는지만 기록하던 여자. 사람들은 그 여자를 ‘빛값을 재는 사람’이라고 불렀어.” “지금도 살아 있습니까?” 라일이 물었다. “그걸 알고 싶으면 그녀가 일하던 기록 창고에 가 보게. 다만 살아 있다는 말과 그 사람이 제32후보라는 말은 같은 질문이 아니야.”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는 장부 사본 맨 아래에 조용히 적었다. ‘다음 거래의 시작가는 동화 열두 닢.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사는 값은 없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65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6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