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은 세 번째 계단을 오르다가 멈춰 섰다.
칠성 경매원 본관 뒤편의 서비스 회랑은 낮의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벽은 손때가 묻은 회색 석재였고, 천장에는 수증기를 빼는 낡은 배관이 지나갔다. 바닥에는 물품 운반 수레의 바퀴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밖에서는 종탑의 동판이 거칠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간 경비들은 갑작스러운 경보에 몰려가고 있었다.
라일은 난간 아래에서 회색 장갑의 사자를 발견했다. 그는 금빛 서류가방을 한쪽 팔에 끼고 어두운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따라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라일의 몸은 평생 그런 일을 위해 움직여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이 먼저 나가지 않았다.
‘남의 이름을 훔친 놈의 장부.’
자신이 그렇게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상대가 수상해도 물건을 훔치면 기록의 출처가 꼬이고, 오히려 동료들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카렌이 있는 방향으로 손짓했다. 따라온 헥터의 경비 지원 인원과 화령 감찰소 직원들이 계단 양 끝을 지키도록 했다. 도망로를 통제하되 강제로 누군가를 쓰러뜨리지는 않았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라일이 외쳤다.
사자가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의 당황이 비쳤다.
“당신은…”
“제가 누구인지는 아직 찾는 중입니다. 그런데 당신 이름은 확인 좀 해야겠군요.”
사자는 물러섰다. 계단 아래에는 이미 카렌과 감찰관 유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은 사전에 제기된 의혹과 새로 발생한 표시판 조작을 근거로 정식 현장 보전 요청서를 보여 주었다. 사자가 가방을 내주지 않자 유진은 그 자리에서 강제로 빼앗지 않았다. 대신 경비를 배치하고 소지품이 바뀌지 않도록 봉인 절차를 시작했다.
진혁은 뒤늦게 도착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손바닥에는 다시 통증이 올라왔다. 그는 난간을 붙들고 한참 숨을 골랐다.
“여러분… 사람 좀 기다려 주세요.”
라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매장에서 가장 비싼 사람이라면서 왜 체력은 동화 열 닢짜리죠?”
“동화 열 닢이면 심장도 살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배웠잖습니까.”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사자는 서류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한참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로칸. 황금거래연합의 계약 전달 담당자였다. 그는 초대장을 보낸 것과 후보 번호를 관리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종탑 표시판 조작은 지시를 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누구한테 지시받았습니까?” 유진이 물었다.
로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경비 뒤편의 어두운 복도로 향했다. 누군가 그를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감찰소 직원들은 서류가방 안의 문서를 목록에 올렸다. 금빛 사자 인장이 찍힌 계약서, 후보 번호가 적힌 표, 허가되지 않은 별도 회상의 동의서 여러 장이 있었다. 그리고 한 장의 붉은 종이가 있었다. 거기에는 서진혁의 이름과 함께 ‘불출석 시 기억 담보 권한 이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카렌은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서명란이 비어 있네요.”
“거래 관례상 묵시적 동의가…” 로칸이 말을 시작했다.
“아닙니다.” 윤담이 끼어들었다. 그는 칠성 경매원의 책임 감정사 신분으로 야간 출품 기록을 가져왔다. “이 문서에는 정식 경매 번호도 없고, 참가 자격 확인도 없습니다. 우리 경매원의 관례를 적용할 근거가 없어요.”
진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낙찰하려던 시도가 일단 멈춰 있었다. 그러나 종탑 표시판의 글자는 여전히 도시 사람들의 눈에 남아 있었다. 계약이 불완전하다고 해도, 소문은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었다.
“종탑의 표시를 내릴 수 있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기술자들이 이미 현장에 있었다. 고장 원인은 동판을 조종하는 줄에 작은 금속 쐐기가 끼워진 것이었다. 쐐기는 종을 제시간에 울리지 못하게 하고, 연결된 경매장 표시판을 다른 시각에 열리게 했다. 기술자들은 물리적 원인을 기록하고 쐐기를 봉인했다. 누가 설치했는지는 여전히 조사 중이었다. 진혁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물증이었다.
“이제 자네가 도시 시간을 훔쳤다는 말도 조금은 조용해지겠군요.” 윤담이 말했다.
“그런 칭호는 평생 필요 없습니다.”
도시감찰관은 정식 발표를 준비했다. 감정사의 불출석만으로 사람의 기억을 담보로 이전할 권리는 성립하지 않았고, 문제의 표시판은 공인 거래 기록이 아니라 조작된 광고 문구에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또한 회상판과 사진 이용에 관한 조사는 계속하기로 했다. 모든 범죄를 하룻밤에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진혁이 이름만으로 팔렸다는 소문에는 공식적인 반박이 가능해졌다.
감찰관 유진이 발표문을 준비하는 동안 마르코도 경매원 앞에 왔다. 그는 딸의 웃음소리가 들렸던 회상판을 직접 보고 싶어 했지만, 조사관은 아직 기계를 가동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마르코는 잠시 실망한 얼굴을 했다가 자기 손에 들린 사진을 바라봤다.
“저 목소리가 진짜 제 딸 목소리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누가 제 슬픔을 이용해 장사를 했다면 그 이유만은 알고 싶어요.”
유진은 조사 일정과 자료 열람 절차를 안내했다. 마르코는 사진을 돌려받는 대신, 자신이 제출했던 사본이 어디까지 전달됐는지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진혁은 그가 당장 해답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도 강제로 돌아가는 위험한 장치가 멈춘 것은 분명했다.
윤담은 진혁 옆에 서서 말했다. “그대가 기대한 통쾌한 낙찰은 없었군요.”
“돈으로 치면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엔 잃을 뻔한 걸 하나 지켰는데요.”
진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러면 오늘의 수입은 적자로 잡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악수했다. 경쟁자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악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같은 물건을 감정할 때 정직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얻었다.
같은 시각, 다른 장소에서도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화령의 수로조합은 백조 공방의 시험 제작 의향서를 정식 심의에 올렸다. 소연과 장인들은 비용 한도와 임금 우선 지급을 조건으로 한 공동 계약안을 다시 작성했다. 마레온의 미란은 전신을 통해 시험 규격을 확인했고, 세리아는 루멘 소유권이나 모라의 권리가 담보로 묶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기술 검토를 허락했다. 아직 생산이 시작된 것도, 항만청이 제품을 주문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작은 설계도 한 장이 거대한 거래연합의 허락 없이도 사람들의 손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화령 동문의 노파 아란이 진혁을 다시 찾아왔다. 노파는 손에 그 낡은 찻잔을 들고 있었다. 이틀 전에는 팔지 않겠다고 했던 물건이었다. 그녀는 숙소 앞 작은 탁자에 앉아 진혁에게 차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시험이 끝났다며?”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내가 보낸 쪽지가 더는 필요 없다는 전갈이 왔어. 나는 누가 무슨 시험을 치렀는지는 몰라.”
진혁은 노파 앞에 앉았다. 그는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물건을 사지 않고 누군가와 차를 마셨다. 찻잔의 금 간 손잡이는 여전히 삐뚤어져 있었고, 차는 조금씩 흘렀다. 아란은 오래전 딸이 만든 것이라서 계속 쓴다고 했다. 진혁은 그것을 특별한 유물로 감정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감정할 수 있다는 사실과 무엇이든 감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달랐다.
“아직 딸을 찾고 계신가요?”
“찾고 있지. 그런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애를 남이 마음대로 찾아 준다고 하면 쉽게 믿을 순 없잖니.”
그 말은 진혁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세리아가 유나를 잃은 이유, 카렌이 아버지의 흔적을 쫓는 이유, 라일이 자기 이름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모두 그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점심 무렵, 윤담이 연락을 보내왔다. 제30후보로 초대받았던 그는 칠성 경매원 내부 감정위원회에서 후보 번호와 사전 감정 지시가 어떻게 전달됐는지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자신이 예전부터 알던 업무 권한을 넘기지 않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진혁에게는 그 말이 낯선 동료의 인사처럼 들렸다.
라일은 소연에게서 작은 종 모양의 나무표를 받았다. 그것은 이름표가 아니었다. 배달인 조합이 과거 어린 견습생들에게 주던 안전 귀환 표식이었다. 소연은 그가 옛날 그 아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증거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본명을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서두르지 말고 돌아오렴.” 소연이 말했다.
라일은 나무표를 가만히 쥐었다.
“이제는 제가 돌아올 곳을 고를 수 있겠죠?”
“그럼. 네가 고르는 거지.”
그날 오후 진혁은 화령 도시감찰소에서 발급한 확인서와 경매원 감정 보고서를 따로 묶었다. 한 봉투에는 화령의 불법 의심 출품물에 대한 조사 자료, 다른 봉투에는 백조 공방의 제작 의향서가 들어갔다. 같은 여행에서 얻었지만 두 자료는 한데 섞을 수 없었다. 도둑맞은 사람의 기억을 추적하는 일과 시민을 위한 부품을 만드는 일은 서로 다른 책임을 요구했다.
미란에게 보낼 편지에는 자세한 기술 수치를 적었다. 진혁은 첫 줄에 ‘제가 드디어 일을 했습니다’라고 썼다가 지웠다. 대신 ‘시제품은 시험 조건 충족 전 사용 금지. 보조 펌프 안전 승인과 모라 보호 조건은 별도 유지’라고 적었다. 벨라에게 보낼 정산표에는 여관비, 교환 수수료, 감정비, 수당, 남은 돈을 금화와 은표로 나누어 썼다. 서로 단위가 달라 환산표를 붙여야 했다.
라일이 문가에서 그 서류 뭉치를 바라봤다. “옛날에는 장부만 보면 무조건 훔칠 생각부터 했는데요.”
“지금은요?”
“저 장부가 없어지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할지 먼저 생각합니다.”
카렌이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갱생하는군요.”
“아닙니다. 나중에 돈 많은 사람 장부를 훔치는 방법은 여전히 압니다.”
셋은 웃었다. 오래된 빚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화령에서 보낸 며칠 동안 서로가 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는 전보다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 일행은 화령을 떠나기 위한 짐을 정리했다. 황금도시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하기엔 수당이 적었다. 회상판 문제는 조사 중이고, 공방의 경영권 다툼도 남아 있었다. 화령 위탁서의 진짜 발신인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진혁은 이번 출장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 수 없는 것에 값을 매기라는 요구를 거절했고, 다른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첫걸음을 놓았기 때문이다.
벨라에게 보낼 정산표를 작성할 때 그는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아직 공방 시제품 제작비가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통장의 숫자는 늘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은 중개 수당과 실험비 정산으로 자신의 돈은 전보다 조금 많아져 있었다. 진혁은 그 숫자를 보고 혼자 웃었다. 세계를 구할 유물을 찾는 사람이 하루 수당에 기뻐하다니 우습기도 했지만,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마지막 짐을 묶으려는 순간, 여관주인이 작은 봉투 하나를 전해 주었다. 발신인도 주소도 없는 회색 봉투였다. 겉에는 금빛 사자 인장이 없었다. 대신 세 갈래 금속판에 있던 것과 같은 여섯 줄 무늬가 있었다.
‘제31후보에게. 정답은 감정에 있지 않다. 열쇠는 거절할 권리를 지키는 자에게만 열릴 것이다.’
봉투 안에는 동전만 한 얇은 금속 조각이 들어 있었다. 한쪽에는 ‘제0호 감정사’라는 글자가, 다른 쪽에는 낡은 좌표와 숫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북쪽 폐광, 일곱 번째 기록실. 제32후보는 아직 살아 있다.’
진혁은 종이를 덮지 않았다. 카렌과 라일을 불러 손대지 않은 상태로 함께 읽었다.
“31 다음은 32군요.” 라일이 중얼거렸다.
“순서대로 번호를 붙였으면 좋겠네요.” 진혁이 말했다. “세상이 그렇게 친절한 건 아니지만.”
카렌은 오랫동안 금속 조각을 바라봤다. 그 숫자가 진실인지, 다음 함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검증할 장소가 하나 생겼다.
다음 날 정오, 일행이 성문 앞 출발 마차에 짐을 실을 때 화령의 정오 종이 오랜만에 정해진 시각에 울렸다. 종소리는 금빛 회랑을 지나 높은 장인길로 퍼졌고, 마침내 사람들이 일하는 골목까지 내려왔다.
진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이번 여정의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정상 성사된 경매: 한 건. 매각된 사람: 없음. 다음 감정 대상: 살아 있다는 제32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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