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의 거래소들이 밤늦게까지 불을 밝힌 날, 서진혁은 객석이 아니라 경매장 뒤편의 작업대에 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늦은 바람이 종탑을 스쳐 지나갔다. 도시는 여전히 정오의 종을 둘러싼 소문으로 뒤숭숭했다. 황금거래연합은 제31후보의 출현 때문에 종탑이 고장 났다고 주장했고, 감찰소는 기술적 원인이 확인될 때까지 누구의 잘못도 단정하지 말라는 안내문을 붙였다. 사람들의 입은 안내문만큼 신중하지 않았다. 진혁이 여관 복도를 지날 때마다 누군가는 ‘시간을 빼앗는 감정사’라고 수군거렸다.
진혁은 그런 말에 항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항의하다 보면 정작 필요한 일을 하나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걸로 충분합니까?” 그가 물었다.
백조 공방의 소연은 작업대 위에 놓인 세 장의 설계도를 살폈다. 미란이 보내 준 마레온 대체 방벽 펌프 도면, 화령에서 제작 가능한 부품의 규격표, 그리고 공방 장인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견적서였다. 세 장을 합쳐도 완성품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 자금을 내고 기술 검증을 허락하면 실제 부품을 만들어 시험할 수 있는 출발점이었다.
“충분하다는 말은 여기서 못 하네.” 소연이 말했다. “마레온의 수압과 부식 환경을 내가 직접 확인한 게 아니니까. 대신 수명 시험을 통과할 시험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은 말할 수 있어.”
“얼마입니까?”
소연은 진혁에게 숫자가 빼곡한 종이를 내밀었다. 진혁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 금화로 환산하면 지금 그의 수당 수십 배였다. 벨라에게 설명하려면 적어도 두 장짜리 편지를 써야 할 금액이었다.
라일이 그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재벌이 될 줄 알고 온 사람이 다시 가난해지는 표정인데요.”
“저한테 원래 재산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손해 볼 것도 없잖아요.”
“희망을 잃었잖습니까.”
카렌이 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소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희망으로 공방을 돌릴 수는 없어. 장인들도 월세를 내고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지.”
진혁은 서류를 접었다. 잠시 뒤 그들에게 방법이 하나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황금도시에서는 권리와 물건뿐 아니라 미래의 생산 능력도 거래했다. 다만 사람의 기억이나 신원을 담보로 잡는 계약은 거절할 수 있어야 했다. 반면 정해진 규격의 부품을 제작하고, 검증에 성공하면 매입하겠다는 조건부 주문은 합법적인 상업 거래였다.
“그러니까 설계 자체를 팔자는 게 아니라, 시험 제작할 권리를 입찰에 내자는 거군요.” 윤담이 말했다.
그는 칠성 경매원의 수석 감정사로서, 경매원 내부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개인 수탁업무를 잠시 중단한 상태였다. 그래도 기술 감정과 공방의 주문 입찰을 연결하는 일을 조언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서류에는 그가 제30후보라는 이상한 초대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적지 않았다. 실제 능력과 거래 실적이 상관없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화령의 공방들이 제작에 참여할 기회를 경쟁하게 만드는 대신, 장인들의 임금과 시험 실패 비용을 보장하는 조건을 먼저 박아 넣는 겁니다.” 진혁이 말했다.
“그런 조건이면 투자자가 싫어할 텐데.”
“좋아하는 투자자만 참여하면 되죠.”
소연이 진혁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경계가 조금 누그러진 눈빛이었다.
오후가 되자 한적한 작업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백조 공방의 해고된 기술자, 물길 조절 장치를 만드는 작은 수리소 주인, 재료비를 외상으로 대 준 금속상, 그리고 수문 관리 일을 배운 젊은 견습공이 찾아왔다. 그들 중 일부는 소연에게 임금이 밀렸다고 불평했고, 어떤 이들은 황금거래연합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모인 이유는 복수심보다도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젊은 견습공 하나가 도면을 보고 말했다.
“만약 시험이 실패하면 저희도 돈을 못 받는 거죠?”
“아닙니다.” 진혁이 대답했다. “제작 노동에 대한 임금은 지급하고, 시험 성공 때 추가 대금을 지급하자는 겁니다. 실패하더라도 얻은 기술 자료를 어느 한 업체가 마음대로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도 넣었습니다.”
“그럼 누가 실패 비용을 내요?”
그 질문에 진혁이 잠시 숨을 멈췄다.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정작 위험을 부담할 사람을 밝히지 못하면 계약은 빈 껍질이었다.
“투자자가 비용 한도를 미리 예치해야 합니다. 투자자가 없으면 사업은 시작하지 않습니다.”
한숨과 실망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소연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는 오래된 공방에 햇빛이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다시 무책임한 약속으로 사람들을 묶을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열리는 공개 주문 입찰에 그들의 조건부 제작 계획을 올리기로 했다. 칠성 경매원은 상품 경매뿐 아니라 장인들의 작업 계약을 소개하는 행사도 정기적으로 열었다. 윤담이 기술적 가치 평가를 도왔고, 카렌은 동의와 임금 조건을 따로 확인했다. 진혁은 자신이 받은 공로 수당 중 일부를 감정 수수료로 선납했다.
“진짜 돈을 쓰는군요.” 라일이 말했다.
“장사하려면 일단 투자해야죠.”
“망하면요?”
“그때는… 루멘에 돌아가서 열심히 일해야겠죠.”
“이미 열심히 하고 있잖습니까.”
“더 열심히요.”
그날 입찰장에는 누가 자신들의 돈으로 꿈을 사는지, 누가 남의 돈으로 위험을 나누려 하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단순히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사람보다 실제로 정해진 날짜에 대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중요했다. 장인들은 판 아래쪽에 기술 보유자의 이름을 적었고, 견습공에게 지급할 임금을 따로 계산했다.
윤담은 소규모 주문 경매가 어떻게 성립되는지 하나씩 설명했다. 기술권 전체를 넘기는 것은 아니며, 특정 규격의 시제품에 대한 우선 제작 참여권을 제안하는 방식이었다. 발주자는 시험이 성공하면 후속 계약을 협의할 수 있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장인의 과거 기술까지 몰수할 수는 없었다. 품질 보증 범위와 시험 장소, 운송 중 파손 책임은 별도 조항으로 분리했다.
젊은 장인 하나는 서류를 읽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불합격일 때 다른 공방이 저희 도면을 그대로 가져가면요?”
“열람자마다 기록을 남깁니다.” 윤담이 답했다. “공동 심사에 필요한 범위만 공개하고 상세 가공법은 제작자 소유로 남깁니다.”
노련한 금속상이 팔짱을 꼈다. “비용이 꽤 들어가겠군.”
“맞습니다.” 소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싸게 만들자고 그동안 사람을 숨기고 책임을 넘긴 겁니다. 제대로 만들려면 제대로 값을 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은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한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의 감정 능력으로 모두가 놀라는 보물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나 질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생기니 거래가 조금씩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입찰장은 특별 출품회와 달리 소박했다. 목재 의자 위에 장인들이 앉았고, 상인들은 펼친 장부를 무릎에 올렸다. 천장 장식은 금박이 아니라 하얀 회반죽이었다. 그러나 진혁은 그곳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가격표가 물건의 진가를 대신 말하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누구의 손이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질문했다.
소연이 도면 앞에 섰다. 오른팔의 보조대가 움직일 때마다 금속이 작은 소리를 냈다. 그는 불필요한 미사여구 없이 설명했다. 마레온에는 물을 빼는 펌프가 필요하다. 기존 설비만으로는 부족하며, 모라라는 생명에게 더 많은 부담을 주는 방식은 안전 대안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사람이 수리할 수 있고 비용이 공개되는 장치다.
첫 번째 상인은 수익성을 물었다. 둘째는 운송비를 물었다. 셋째는 경비를 누가 보증하느냐고 물었다. 질문은 거칠었지만 정당했다. 소연과 진혁은 아는 것을 답하고 모르는 것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객석 끝에서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그는 화령 수로조합의 퇴임 회계사로, 오래전에 도시의 물길을 수리하는 채권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여운수였다. 그는 공공 시설에 투자하는 조합이 시험 비용 일부를 부담하고, 부품이 통과하면 마레온 항만청과 정식 납품 계약을 맺는 방식을 제안했다.
“전액을 즉시 내겠다는 말은 아니오. 실패 비용의 상한을 정하고, 장인들의 임금을 우선 지급해야 한다는 조건이라면 참여할 사람들이 있소.”
진혁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찾던 대답이 처음부터 황금거래연합의 비밀 금고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매일 물길을 고치는 사람들의 작은 투자에서 시작할 수도 있었다.
여운수는 계약안을 훑어보며 몇 가지 항목에 붉은 줄을 그었다. 자신이 퇴임한 뒤로도 수로조합에 남아 있는 기술자들이 있지만, 조합의 돈을 혼자 결정할 권한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투자 승인 조건을 분명히 적었다. 두 차례의 시제품 시험과, 모든 참가자가 읽을 수 있는 공개 결과 보고서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정직한 보고서는 좋은 결과만 담는 게 아닙니다.” 여운수가 말했다. “고장 날 수 있는 곳도 써야 해요. 그걸 안 쓰면 다음 사람이 고장 난 걸 고치지 못하거든.”
진혁은 마레온의 미란을 떠올렸다. 펌프가 막히는 바람에 밤새 수로에서 일하던 모습. 모라가 쉬어야 할 시간을 벌어 주는 장치라는 사실이 자꾸 중요하게 느껴졌다.
소연은 가죽 보조대를 풀고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 오랜만에 동료들 앞에서 기술을 설명하느라 손가락이 뻣뻣해졌다. 한 젊은 견습공이 조용히 물 한 잔을 가져왔다. 그는 차를 마시며 고개를 숙였다. 몇 달 전까지 공방에서 임금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제0호나 후보 번호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오늘의 의미는 내일 아침 다시 작업대 앞에 설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저런 걸 보니 어떻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금화가 없어도 사람이 기뻐하네요.”
“당신은 정말 끝까지 돈 이야기군요.”
“그래도 제 돈을 벌러 온 거였는데 남의 일자리부터 만들었습니다.”
카렌은 웃었다. “그게 꼭 손해는 아니겠죠.”
예비 의향서는 그날 밤 세 곳에서 들어왔다. 아직 계약이 아니었고 돈도 입금되지 않았다. 하지만 설계도는 더 이상 주인 없는 종이가 아니었다. 필요한 기술자와 검사 절차, 비용 부담자가 하나씩 연결되고 있었다.
입찰장을 나서려는 순간,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높은 종탑의 동판이 갑자기 흔들린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늦은 밤인데도 종탑의 정오 표시판이 갑자기 열렸다. 뒤이어 칠성 경매원 본관에서 반짝이는 글자가 솟아올랐다.
‘제31후보 불출석. 기억 담보 권한 임시 이전.’
진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은 어떤 기억도 담보로 맡기지 않았고, 그럴 뜻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이름으로 소유권을 선언하려 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보낸 전신 기억하죠?” 카렌이 말했다. “그 서류가 증거가 될 때예요.”
하지만 라일은 이미 본관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 높은 회랑의 그림자 사이로 회색 장갑의 사자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뒤돌아보며 웃었다.
“이쯤 되면 좀 훔쳐도 되겠죠? 사람 이름 말고, 그걸 훔치려는 놈의 장부요!”
제5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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