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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7화
PAYLUA ORIGINAL · 제57화

57화. 이름을 지운 장인의 도장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445자

오프라인 책장
백조 공방은 화령의 동쪽 끝, 햇빛이 가장 늦게 닿는 골목에 있었다. 이름은 우아했지만 건물은 그렇지 못했다. 세월에 그을린 검은 벽돌과 거친 철문, 기름이 스며든 돌바닥이 낡은 작업장의 나이를 말해 주었다. 외벽에는 날개를 펴는 백조 문양이 붙어 있었고, 문양 아래의 쇠사슬에는 새 자물쇠 세 개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안쪽 굴뚝에서는 아주 가는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아직 작업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라일은 철문을 바라보며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요.” 카렌이 말했다. “도망가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뭘 기다리는 건데요?” 라일은 심호흡을 했다. “내 이름을 말해 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도둑으로도 잘 살았는데… 이름을 알면 그동안 잘 살았던 시간들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진혁은 그 말을 듣고 철문의 자물쇠를 보았다. 세 개 중 하나만 새것이었다. 나머지 두 개는 실제로 잠겨 있지 않았다. 노동자를 막기 위해서라기보다 누군가가 출입문을 봉쇄했다고 보여 주기 위한 장치 같았다. “이름이 바뀌어도 제가 받은 빵값까지 없어지진 않겠죠.” 그가 말했다. 라일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걸 위로라고 하는 겁니까?” “적어도 제가 당신한테 빵을 사 준 기록은 남아 있으니까요.” 카렌이 손바닥으로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안쪽에서 날카로운 쇠 긁는 소리가 났다. 노인의 목소리가 나왔다. “공방은 닫았어.” “소연 장인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공식 조사 요청서를 가져왔어요.” “난 아무것도 서명 안 해.” “그럼 서명 안 하셔도 됩니다. 말씀만 들을 수 있을까요?” 긴 침묵이 이어졌다. 문틈 아래로 뜨거운 쇳가루 냄새가 새어 나왔다. 진혁은 골목 끝에 서 있는 경비들의 움직임도 보았다. 그들은 칠성 경매원의 경비복을 입지 않았지만 구두에 금빛 사자 문양이 붙어 있었다. 이윽고 철문 한쪽이 열렸다. 안쪽에 선 여자는 예상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소연은 머리카락이 거의 희고 오른쪽 팔에는 단단한 보조대를 차고 있었다. 눈가에는 금속 먼지를 오래 본 사람 특유의 잔주름이 촘촘했다. 그녀는 세 사람을 안으로 들이지 않고 먼저 라일을 바라봤다. “살았구나.” 라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를 아십니까?” 소연은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기쁘면서도 미안하고, 믿기 어려워서 손을 뻗지 못하는 표정. “네가 여기까지 온다면 반드시 세 번째 종부터 물을 줄 알았다.” “누가 울렸죠?” “나였어.” 소연은 그 말을 가볍게 꺼내지 않았다. 십수 년 전 화령의 배달인 조합에서 위험 화물을 인계하던 날, 한 아이가 정식 송장에 적힌 주소 대신 다른 곳으로 보내질 뻔했다고 했다. 소연은 인수자가 사람을 화물처럼 취급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위험 신호를 울렸다. 세 번의 종이 울렸지만 제복을 입은 관리자들은 화물 마차를 그대로 출발시켰다. “네가 그 아이였다는 증거는 없어요.” 카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고 있네.” 소연이 대답했다. “나는 얼굴을 알아볼 뿐이야.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닮은 사람일 수도 있지.” 라일은 그 신중함에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던 사람이 무턱대고 그의 이름을 선언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공방 안은 기계들로 가득했다. 벽에는 오래전 주문 제작한 수차 축들이 걸려 있었고, 바닥의 홈을 따라 기름이 흘렀다. 작업대 위에는 손잡이가 날아간 망치와 반쯤 완성된 수정 베어링이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작은 수정 면에 부딪치며 벽에 무지개처럼 퍼졌다. 화령에서 이런 정밀도를 가진 공방이 문을 닫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왜 문을 닫으셨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소연은 의자에 앉아 손바닥을 폈다.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공방이 망한 건 아니야. 경영권을 넘겼지. 황금거래연합이 새 장비를 들여주고 원재료를 싸게 공급하겠다고 했거든. 그런데 계약 뒤에 실제 작업은 하나도 시키지 않았어.” “일거리가 없어서요?” “오히려 반대야. 주문서는 산더미인데 모든 주문을 기술 승인 심사에 묶어 놨어. 우리 장인들이 도면을 보면 쓸 수 있는 대체 부품을 만들 수 있거든. 그게 누군가에겐 불편한 모양이지.” 미란이 보내 준 펌프 도면을 펼치자 소연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안경을 바꾸어 쓰고 자로 회전축의 간격을 재었다. 오래된 손가락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수로는 마레온의 것이군.” “압니다?” “십칠 년 전에 비슷한 도면을 봤어. 모라의 박동과 별개로 물을 빼는 대체 설비였지. 그때도 납품 직전에 취소됐어.” 진혁은 전날 세리아의 전신을 떠올렸다. 오래된 계약이 수상한 이유는 돈이 아니라 ‘기억 확인 권리’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 계약을 기억하십니까?” “전부는 아니야. 당시 나는 작은 하청 공방에서 일했으니까. 다만 이상한 게 있었지. 납품검사를 담당한 감정사의 이름을 계약에서 지우라고 했어. 물건은 존재하는데 만든 사람과 검사한 사람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더군.” “그래서 거절했나요?” 카렌이 물었다. “그때는 거절했지. 나중에 조합으로 돌아가 세 번째 종을 친 것도 같은 이유였어. 사람은 지우고 물건만 남기려 했으니까.” 소연은 공방 구석의 궤짝에서 낡은 나무 도장을 꺼냈다. 상단의 문양은 날개를 펼친 백조였다. 옆면에는 반듯한 필체로 ‘제0호 보존 시험, 작업 참여자 성명 유지’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누군가 우리 공방에 맡긴 도장이야. 당시에는 검사 담당자의 이름을 말소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들었지.”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0호 감정사는 사람이 아닌 직책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직책이 한 일은 가치를 발견하는 것뿐 아니라 물건을 만든 사람과 사용자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소연은 도장을 다시 궤짝에 넣었다. 그 눈빛은 단호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는 이유로 자네들한테 넘겨줄 수는 없어. 이건 공방의 기록이고, 지금 경영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다툼 중이니까.” “사진과 확인서만 받아도 됩니다.” 카렌이 말했다. 소연은 오래된 직공들이 사용하던 임금 지급 장부도 내보였다. 계약 당시 경영권을 넘기면서 장비 유지비는 투자자가 부담하고, 기존 장인들의 노동계약은 자동으로 종료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주문서는 대기 상태였고 기술자들은 정식 해고 통지를 받지 못했다. 일을 시키지 않으면 임금도 지급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시간을 끈 것이다. “저 사람들이 왜 가만히 있나요?” 진혁이 물었다. “새 공방을 열 돈도 없고, 여기서 배운 기술이 전부니 떠나기도 어렵지.” 소연이 답했다. “싸우는 사람은 많았어. 그런데 소송비만큼 계약금이 쌓이질 않았지.” 라일은 작업장에 걸린 낡은 작업복들을 보았다. 각 옷에는 이름표가 있었고, 끝이 해진 소매마다 누군가의 생활이 남아 있었다. 훔치는 기술만 배우며 떠돌던 자신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한 자리에서 같은 일을 오래 해 왔다는 사실이 부러우면서도, 그 오래된 시간이 부채처럼 묶여 있는 모습에 화가 났다. 카렌이 임금 장부를 한 장씩 넘겼다. 그는 업무를 맡은 사람이 모두 서명한 기록은 공증받은 사본으로 제출하고, 개인 식별 정보가 있는 부분은 외부에 무단 공개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직원 중에는 지금도 연합에서 임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무턱대고 이름이 드러나면 그들의 일자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당장 정의로운 말을 해도 누군가가 월세를 잃을 수 있어요.” 카렌이 말했다. “그래서 확인하는 순서가 필요합니다.” 소연은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검사인데도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군.” 카렌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예전에는 단순한 답이 좋았어요.” 한때 아버지 레온도 기록을 남기고 사람들의 이름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가 어디에서 실패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카렌은 같은 일을 마주할 때 조금은 다르게 선택하고 싶었다. 그때 공방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금빛 사자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경비를 대동하고 계약 위반을 주장했다. 소연이 공방에 외부 감정사를 들여 기술 자료를 보여 주었다는 이유였다. “이곳은 황금거래연합의 관리 자산입니다!” 진혁은 서둘러 도면을 접었다. 라일이 소연 앞에 섰다. 카렌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지만 화령에서 마레온 검사 신분만으로 경비를 지휘할 수는 없었다. 소연은 비웃지도 겁먹지도 않았다. “나를 쫓아낼 수는 있겠지.”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술까지 너희 것이 되는 건 아니야.” 경비 책임자가 서류를 내밀었다. 소연은 글을 읽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한 계약상의 허점이 있었다. ‘공방 장비의 관리’라고 되어 있어야 할 항목이 ‘모든 생산 기술의 독점 사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혁이 조용히 물었다. “저 변경 내용은 언제 합의한 겁니까?” “정식 이전 계약과 함께…” 책임자가 말하다가 멈췄다. “그럼 변경 서명본과 원본 대조 기록이 있겠네요.” 책임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소연이 장갑을 벗고 손가락의 오래된 흉터를 보여 주었다. 소연의 오른손 중지에는 아주 가는 쇳가루 화상이 있었다. 작은 종처럼 둥근 자국이었다. 밖의 경비들이 억지로 문을 밀었을 때 소연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경영권을 넘겼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계약서에 기록된 범위와 관리자가 새로 주장하는 독점 기술권은 따로 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렌은 화령 감찰소에 이미 상담을 신청했다는 접수 확인서를 보여 주었다. 경비 책임자는 그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도 지시를 받고 온 겁니다.” “그래서 지시가 적힌 서류부터 보자는 거예요.” 카렌이 대답했다. 옆에 서 있던 젊은 경비 하나가 소연의 굽은 손을 바라봤다. 그는 잠깐 표정이 바뀌더니 금속문을 더 세게 잡지 않았다. 소연이 예전에 고장 난 수문 앞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이라는 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경비가 모두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니었다. 결국 책임자는 외부인 출입을 기록하고 다음 날까지 문서를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들이 물러나자 소연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단단하게 버텼던 사람의 무릎이 그제야 조금 떨렸다. 라일이 다가가 의자를 밀어 주었다. 소연은 그 의자를 잡고 한참 숨을 골랐다. “어릴 때 넌 언제나 문 앞에 서 있었지.” 그가 낮게 말했다. “누가 들어오면 도망갈 준비부터 하면서.” 라일은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막연하던 꿈속의 복도가 조금 선명해졌다. 하지만 그 기억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누군가의 말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진 장면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그는 무턱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소연의 허리에 고정된 보조대의 나사가 풀렸다고 알려 주었다. 서로가 지금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한 것이다. 라일이 그 손을 보며 숨을 삼켰다. 자신의 어린 시절 꿈속에, 누군가 똑같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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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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