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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6화
PAYLUA ORIGINAL · 제56화

56화. 사장의 지워진 장부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336자

오프라인 책장
화령의 정오는 한 번 울리지 않은 종 때문에 길어졌다. 칠성 경매원 손님들은 좌석에서 쏟아져 나왔고, 도우미들은 각 출구에서 밀리지 않도록 사람들을 나누었다. 특별 출품회의 주최자는 장치 오작동이라고 설명했지만 아무도 쉽게 믿지 않았다. 회상판에서 들린 아이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은 사람들이 있었고, 벽의 수정 기둥을 끄자 소리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 진혁은 홀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 아무 유물도 감정하지 않았는데 손바닥이 뜨겁게 저렸다. 제31후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라일이 물통을 건넸다. “마시죠. 물은 아직 계약서 없이 먹을 수 있는 도시입니다.” “그 말도 한 달 뒤에는 틀릴 것 같습니다.” 카렌은 웃지 못했다. 그는 회상판 시험 피해를 주장한 남자의 진술을 기록하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마르코였다. 화령 외곽에서 목공소를 운영했고, 오래전에 딸을 잃었다. 실제로 어떤 기억이 도용됐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몇 주 전 금빛 사자 인장을 찍은 사람이 찾아와 사진 한 장을 빌려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때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가족 사진의 사본을 건넸다는 것이다. “사진 한 장을 빌린 걸로 목소리까지 재현할 수 있을까요?” 진혁이 물었다. “모릅니다.” 카렌이 말했다. “사진과 기억을 연결하는 기술이 있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 녹음된 소리를 준비했을 수도 있죠. 중요한 건 이 사람이 동의하지 않은 방식으로 딸의 이미지를 사용했는지예요.” 마르코는 종이컵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등의 굳은살은 오래 나무를 만진 사람의 손이었다. 그는 딸의 사진을 되찾고 싶다고 했지만 원본은 집에 있었다. 빌려준 사본이 어디에 쓰였는지 알고 싶었다. 진혁은 이 낯선 사람의 사연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름을 사고파는 계약들을 보며 이미 수없이 들었던 말과 같았다. 누군가가 ‘조금만 빌리겠다’며 사람의 일부를 가져가고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윤담은 경매원 기술감찰관에게 회로도와 행사 계약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위층 관람석에 있던 투자자들은 차례로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빠져나가는 동안 경비원이 금빛 사자 도장을 찍은 봉투들을 회수하려 했지만, 카렌이 손을 뻗어 막았다. “회수 근거를 남기세요. 증거라고 판단되는 걸 일괄 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경매원의 물품입니다.” 경비원이 대답했다. “그럼 귀 경매원의 책임으로 보관 기록을 남기면 되겠군요.” 윤담이 직접 카렌의 말에 동의했다. 직원들이 봉투 번호를 적고, 봉인된 상자에 넣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경매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날 오후 수십 장의 종이 번호를 빼먹지 않는 일이었다. 진혁은 그전에 윤담과 함께 회상판을 감정실 바깥의 대기 창고에서 살폈다. 정식 개봉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유리판을 꺼내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밀봉 상자의 외부 치수와 행사장의 수정 기둥을 연결했던 회로 자료를 대조했다. 윤담이 준비한 기록에는 수정 기둥이 설치된 날짜와 담당자의 서명이 남아 있었다. “이 장치는 원래 경매사의 목소리를 객석 뒤쪽에 전달하는 보조 장치입니다.” 윤담이 말했다. “아이 목소리를 재생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겠죠.” “그러면 본래 기능을 악용했을 가능성이 있군요.” 진혁이 대답했다. 둘은 기술자를 불러 경매사 목소리가 전달되는 경로를 확인했다. 기술자는 제어판을 끄면 회상판 근처뿐 아니라 객석 벽의 소리도 함께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음성은 수정의 진동을 타고 전달됐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소리를 준비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기계가 그렇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과 범인이 누구인지를 특정하는 일 사이에는 긴 거리가 있었다. 윤담은 서류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경매장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사람의 슬픔을 쓰다니.” “사람들이 꼭 갖고 싶어 하도록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죠.” 진혁이 말했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없앨 물건을 팔면 되니까요.” 그는 마르코가 보여 준 사진을 떠올렸다. 목수는 잃어버린 아이의 웃음소리 때문에 정상적으로 항의하기도 어려웠다. 진혁이 가진 능력이 아무리 특이해도 그 슬픔을 대신 설명할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은 숙소로 돌아왔다. 낮의 열기가 돌벽에 남아 방안은 숨이 막힐 만큼 더웠다. 여관주인은 저녁 통행이 제한될지도 모른다고 알려 주었다. 진혁은 창가에 앉아 루멘에서 온 전신지를 펼쳤다. 세리아는 화령의 행사 기록을 대략 알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의 전신 내용이었다. ‘금빛 사자 인장은 오래된 화령 계약에만 쓰인 것이 아니다. 루멘 창립 전 기록에도 있다. 조심하라.’ 진혁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루멘 경매장은 살아 있는 고대 괴수 모라를 품고 있었다. 그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누군가는 사람의 이름과 책임을 계약으로 묶어 놓았다. 세리아가 사장으로 일하기 전의 기록까지 그 사자 인장이 나타났다는 것은, 두 도시는 생각보다 오래된 길로 이어져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날 오후 진혁은 회계 수첩의 앞장과 뒷장을 비교했다. 앞장에는 화령으로 올 때 받은 열두 닢 한도의 출장비가 적혀 있었고, 뒷장에는 이미 지출한 보증 등록비와 여관비가 늘어나 있었다. 중간에 들어온 감정 수당 덕분에 간신히 균형이 맞았다. 비밀스러운 초대장의 진실을 밝히는 동안에도 식사는 해야 하고 말에게 건초를 먹여야 했다. 아무도 그 사소한 비용을 대신 사라지게 해 주지 않았다. 그는 벨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고서를 읽고 나면 틀림없이 영수증 한 장이 비어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참견이 싫었다. 지금은 자신이 해낸 일이 누군가의 장부 속에서 검증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세리아의 회신을 기다리던 시간은 유난히 길었다. 진혁은 천장에 떠 있는 나무 들보를 바라보며 루멘에서의 첫날을 떠올렸다. 그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는 상층 객석이 얼마나 번쩍이는지보다 지하 직원 식당의 밥값을 더 신경 썼다. 사장은 무섭고, 선임 감정사는 인색하고, 폐품 창고에서는 먼지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 낡은 경매장이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카렌은 그에게 따뜻한 찻잔을 밀어 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요?” “사장님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막상 과거 계약까지 나오니 화가 나서요.”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을 거예요.” “그 이유 때문에 저희가 위험해졌다면요?” “그래도 직접 들어 봐야죠. 저도 아버지에게 따지고 싶은 게 많아요.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듣지 않고 결론부터 내리진 않을 겁니다.” 진혁은 컵을 들어 올렸다. 찻물 표면에 창밖의 불빛이 흔들렸다. 카렌의 얼굴에는 피곤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곁에 있어 주려는 마음도 보였다. 그는 그 마음을 농담으로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무엇을요?” “제가 머리가 나쁠 때 기다려 주셔서요.” 카렌은 컵을 놓고 웃었다. “그건 앞으로도 계속 필요하겠네요.” 진혁은 대꾸하지 못했다. 카렌이 돌아앉는 순간 오래전에 끊어졌던 심장 박동이 다시 뛰는 것처럼 묘하게 가슴이 움직였다. 그가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은 가격표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늦게, 세리아에게서 추가 설명이 왔다. 긴 전신은 비용이 비싸서 보내기 어렵다며, 그는 마레온의 오래된 거래 장부에서 찾아낸 사실을 조목조목 적어 보냈다. 장부를 보관한 벨라의 필체로 목록이 옮겨져 있었다. ‘십칠 년 전, 화령 황금거래연합이 루멘에 심실 유지용 기계 부품을 납품한 기록 있음. 계약 중단 이유: 공급자가 대금과 별도로 사용자의 기억 확인 권리를 요구함. 당시 루멘 책임자는 계약 거절. 원래 장부의 반쪽은 훼손됨.’ 진혁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그는 모라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계와 사람의 권리를 별개의 문제로 여겼다. 하지만 누군가는 부품 하나를 납품하면서 사람의 기억에 접근하려 했던 것이다. 물건의 가격표 아래 보이지 않는 다른 값을 요구하는 방식은 오래전부터 반복됐다. 카렌이 전신지를 읽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온이 왜 루멘과 화령을 오갔는지, 그가 남긴 검집에 왜 낯선 봉인 규칙이 기록됐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아직 추정일 뿐이었다. 레온의 생사와 과거의 선택을 한 줄의 장부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사장님은 왜 이 사실을 이제 말했을까요?” 카렌이 물었다. 진혁이 곧장 답하지 못했다. 그도 세리아에게 여러 번 의문을 품었다. 특히 유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세리아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모르고 있었거나, 알고도 말 못 한 이유가 있거나.” “당신답지 않게 신중하네요.” “저도 가끔 성장합니다.” 카렌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제 아버지가 남긴 말도 그랬어요. ‘빚은 갚을 수 있지만 사람을 대신 갚아 줄 수는 없다.’ 어릴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죠.” “지금은요?” “아직도 완전히는 몰라요. 다만 누군가 그 말 때문에 위험해졌다는 건 알겠어요.” 진혁은 카렌이 허리에 맨 검을 바라봤다. 레온의 검은 한때 봉인의 표식으로 이용되었지만, 지금 카렌에게는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증거였다. 카렌은 검집 손잡이에 손을 얹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때 라일이 밖에서 돌아왔다. 그의 신발에는 동쪽 장인길의 검은 흙이 묻어 있었다. 그는 백조 공방을 찾으러 갔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고 했다. 대신 안쪽에서 노인이 기계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앞마당에는 장부를 불태운 흔적이 있었고, 그 근처 벽에 아주 작은 종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문을 두드렸더니 안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라일이 말했다. 그는 노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입술을 오므렸다. “‘이름을 찾으러 온 아이냐. 늦었다.’” 카렌이 벌떡 일어났다. “그 사람이 소연이에요?” “확인하기 전에 문이 닫혔어요. 괜히 문을 부수진 않았습니다.” 진혁이 라일의 얼굴을 살폈다. 장난기 많던 눈동자에 오래 묵은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 앞에 설 용기가 아직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일 같이 가죠.” 진혁이 말했다. “제가 혼자 가도 됩니다.” “알아요. 그런데 저는 펌프 부품 견적도 받아야 하거든요.” 라일이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더니 웃었다. “정말 계산적인 사람.” “정산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날 밤, 진혁은 영수증을 정리하다가 경매원 일반 입장권 뒷면을 발견했다. 원래 아무 글씨도 없었는데, 열기에 드러나는 잉크로 작은 숫자가 올라왔다. ‘대기번호 31. 다음 정오 전까지 기억의 대가를 제출하라.’ 돈을 내고 산 합법 입장권이 자신도 모르는 별도 계약의 초대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진혁은 입장권을 태우지 않았다. 카렌과 라일을 깨워 함께 확인하고 날짜를 적었다. 화령의 밤이 깊어지는 동안, 먼 회랑의 종은 단 한 번도 제시간에 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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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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