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은 자신의 초대장을 불에 태우려 했다고 말했다.
칠성 경매원 위층의 작은 자료실이었다. 벽마다 빛바랜 거래 등록표가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햇빛에 바싹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커튼을 들추면 화령의 중심 회랑이 보였다. 거래소 옥상에서는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종소리에 맞춰 상점의 값을 표시한 기계식 판이 일제히 뒤집혔다.
“처음 받았을 때는 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윤담이 말했다. “발신인 주소도 없고, 사람을 물건처럼 번호로 부르다니요.”
“그런데 왜 가지고 있었죠?” 진혁이 물었다.
“타지에서 오는 감정사를 감시하라는 문구가 있었어요. 누가 장난치는지 알아보려고 기록했습니다. 그 전에 같은 종이가 여러 사람에게 배달됐는지도 조사했고요.”
윤담은 쪽지 사본 다섯 장을 꺼냈다. 수신인은 모두 감정사이거나 기록 보전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숫자는 제26, 제28, 제29, 제30. 그중 두 사람은 몇 달 전부터 소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윤담은 실종이라고 단정하지 않았지만, 계약업무를 중단한 날짜가 초대장 발송 날짜와 거의 겹쳤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진혁은 문서를 만지지 않았다. 대신 필체와 인장의 차이를 살폈다. 어떤 것에는 사자의 이빨이 빠져 있었고, 어떤 것에는 화령의 최신 교환소 문양이 덧씌워져 있었다. 조작한 사람이 한 명인지, 오래전부터 같은 도장을 이어 사용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화령 안에 있었다면 등록 기록이 남았을까요?” 카렌이 물었다.
“정식 상업 자격을 가진 사람이면 그렇겠죠. 다만 이름을 바꿔 신고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건 공적 등록 기록을 대조해야 합니다. 개인이 몰래 명부를 가져가면 증거가 오염되니까요.”
윤담은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곳에서 수석 감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외부 감찰기관처럼 행동할 권한은 없었다. 화령의 영업법이 엄격한 만큼 자료를 함부로 열면 역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었다.
라일이 창가에서 돌아섰다.
“서류는 내버려 두고 배달한 사람을 찾죠. 이런 초대장은 반드시 누군가 손으로 전달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을 건데요?”
라일은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배달인은 물건을 받는 순간보다 돌려주지 못했을 때를 더 선명하게 기억하거든요.”
그날 오후, 라일은 진혁과 카렌을 화령의 오래된 배달인 조합 건물로 데려갔다. 장인길의 붉은 벽돌 공방들을 지나 북쪽 수로를 넘자 갑자기 좁은 골목이 펼쳐졌다. 햇빛은 옆집의 금속 차양에 가려 절반만 내려왔고, 낮은 창문마다 젖은 가죽 가방이 걸려 있었다. 작은 아이들이 종이 꾸러미를 안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물건을 나르는 일이 도시의 피처럼 흐르는 곳이었다.
조합 건물 벽에는 종 세 개가 달려 있었다. 첫 번째 종은 우편물 도착, 두 번째는 분실 신고, 세 번째는 위험 물품의 회수를 알리는 것으로 설명돼 있었다. 그러나 벽 아래쪽에 오래된 안내문 조각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세 번 울릴 때는 배달을 멈추고, 사람부터 확인하라.’
라일은 그 글자를 손끝으로 짚었다. 잔조도에서 들었던 말과 같았다. 도르가 기억하는 세 줄 파도와 종의 신호도 위험을 알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회색 장부 조합은 그 소리를 사람을 불러 모으는 신호로 사용했다.
“왜 웃지 않아요?” 진혁이 물었다.
“이 골목에서는 웃고 싶지 않아서요.”
라일은 조용히 대답했다. 마레온에서 도둑질을 하던 시절에도, 남의 물건을 훔칠 때와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쓸 때의 감정은 달랐다. 전자는 손이 먼저 움직였지만 후자는 온몸이 굳었다.
조합 입구에는 배달인이 물품을 등록하는 작은 창구가 있었다. 소년 하나가 허름한 책가방을 내려놓고 무게를 재는 저울 위에 올렸다. 서기는 봉투가 하나라도 빠졌는지 세고, 목적지마다 다른 색의 끈을 묶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산 위쪽 회랑으로 보내는 물품과 수로 아래쪽으로 보내는 물품은 배달 비용이 달랐다. 길은 좁고 오르막이 많아서였다.
진혁은 창구 옆의 경고문을 보았다. ‘불명확한 품목명은 배달 거절 가능. 이름이 아닌 번호로 등록된 인체 물품 접수 금지.’ 적혀 있는 문장은 평범했지만 화령에서 겪은 일들과 겹치자 낯설었다.
“저 규정은 언제 생긴 겁니까?”
안내원이 장부를 넘겨 보더니 말했다. “몇 해 전 사고 이후에요. 그전에는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나르는 게 좋은 예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요즘도 개인정보는 비밀로 지킵니다. 다만 위험 물품을 숨긴 채 책임을 떠넘기는 건 막아야 하니까요.”
라일은 벽에 걸린 낡은 가죽 가방을 만지려다 손을 거뒀다. 어린 시절 자신도 저런 가방을 멘 채 돌계단을 오르내렸을지 몰랐다. 그는 그때 길을 잃었는지, 누군가에게 팔렸는지, 자기가 스스로 달아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명확하지 않은 기억에서 멋대로 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혹시 옛 배달인들이 숙소로 쓰던 곳도 남아 있나요?” 라일이 물었다.
안내원은 골목 끝의 낮은 건물을 가리켰다. “지금은 물건 보관실이지만 지하에 공동침실이 있었대요.”
라일은 그 건물을 오래 바라봤다. 문 앞에 세 번 두드린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수선 흔적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그를 여기로 데려온 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조합의 서기장인 자우는 두꺼운 렌즈를 쓴 중년이었다. 발밑에 우편 주머니를 세 개나 두고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는 카렌의 신분증과 아벨이 작성한 조사 협조 문서를 한참 읽은 뒤 회랑 한편의 방문객 대장을 펼쳤다.
“보관 연한이 지나면 명부는 폐기합니다. 다만 분실된 고가 물품의 송장 사본은 보험 분쟁 때문에 오래 남죠.”
“세 줄 파도 표식이 달린 송장이 있습니까?” 라일이 물었다.
자우의 손이 멈췄다.
“그건 누구에게 들었지?”
“도르라는 항해사에게요.”
“그 이름을 여기서 꺼내는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자우는 두꺼운 장부를 꺼냈다. 종이는 바스라질 듯 노랗고 양쪽 가장자리는 쥐가 갉은 자국으로 들떠 있었다. 각 행에는 날짜, 인계자, 목적지, 수취인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십수 년 전의 기록 가운데 한 장만 결손되어 있었다. 칼로 깔끔하게 도려낸 흔적이었다.
라일이 그 자리를 보자 숨이 빨라졌다. 도르의 나침반에 있던 긁힌 이름 자리와 크기가 비슷했다. 그는 무심코 서랍을 열려고 했다. 자우가 손목을 붙잡았다.
“허락 없이 기록은 만지지 않네.”
라일은 손을 떼었다. 여느 날 같았다면 농담으로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변명도 하지 못했다.
카렌이 낮게 말했다.
“필요한 부분의 열람 절차를 밟죠. 원본은 조합에서 보관하고, 우리가 확인한 내용만 공동 기록하겠습니다.”
자우는 한참 망설이다가 방문객 대장 아래쪽의 작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종 대신 작은 금속 이름표가 보관돼 있었다. 대부분은 빈칸이었고, 하나에는 이름 대신 세 자리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031’.
진혁의 뒷목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후보 번호와 같았다. 라일도 그 숫자를 바라봤다. 누구 것이냐고 묻기 전에 자우가 말했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배달 구획의 번호일 수도 있어. 당시 쓰던 번호 체계가 지금과 달랐으니까. 모든 31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안 되네.”
그 말은 오히려 진혁에게 위안이 되었다. 세상에 남은 모든 숫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자우는 금속표를 놓고 문서의 반대편을 보여 주었다. 물건을 찾지 못했을 때 책임을 지는 ‘배달 보증인’ 칸에는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다만 도장을 찍은 사람의 손가락 자국만 남아 있었다. 종이의 앞면에 칼자국이 있었지만, 뒷면의 잉크는 일부가 눌려 내려갔다. 표면을 빛에 비추면 아주 작은 곡선이 드러났다.
라일은 그 곡선이 익숙했다. 어릴 적 좁은 숙소의 나무벽에 누군가 그려 주던 그림. 세 줄의 파도와 하나의 종. 그리고 종 아래를 휘감던 기묘한 글자 하나.
“누가 지웠는지 기억하십니까?”
자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때 여기 없었네. 대신 당시 기록실 직원이 쓴 사고 보고서는 남아 있지. 그걸 보려면 조합 심의를 거쳐야 해. 누구도 네 과거를 빨리 되찾게 하겠다고 서둘러 줄 권리는 없어.”
라일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창밖 배달인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벼워지고, 어느새 저녁 시장의 종이 울렸다. 화령은 이름표 없이 하루를 끝내는 물건들을 모아서, 다음 날 또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도시였다.
조합을 나서려는 순간, 자우가 라일을 불렀다.
“자네는 출발 전에 세 번째 종을 누가 울렸는지 알고 싶겠지.”
라일이 돌아보았다.
“알 수 있습니까?”
“당일 종지기 목록은 남아 있어. 하지만 그 종지기는 일주일 뒤 일을 그만뒀고, 지금은 동쪽 공방가에 있다더군.”
“이름이 뭐죠?”
자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연. 백조 공방에서 일하던 장인이야. 얼마 전 공방이 닫혔다지.”
진혁은 즉시 미란의 설계도와 대장장이가 알려 준 공방을 떠올렸다. 잃어버린 이름의 단서는 우연처럼 펌프 부품의 행방과 만났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화령의 비는 마레온의 비와 달랐다. 바다 냄새 없이 뜨거운 먼지를 적셔 진한 흙냄새를 만들었다. 돌계단마다 가느다란 물길이 생기고, 배달인들은 서둘러 종이 꾸러미를 기름천으로 감쌌다. 창 아래 서 있던 라일은 머리카락 끝으로 떨어지는 물을 가만히 맞았다.
카렌이 자신의 망토를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라일은 난처한 얼굴로 벗으려 했다.
“이 정도 비는 맞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추워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지금 길 한가운데에서 멈춰 서 있잖아요.”
진혁이 곁에서 말했다. “비 오는데 감상에 젖으시면 숙박비가 늘어납니다.”
라일은 한숨을 쉬다가 웃었다. 그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는 말을 믿고 싶습니다. 그게 지금의 라일을 버리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고요.”
카렌은 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도 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지만, 진실이 반드시 좋은 모습일 거라고 믿을 수 없었다. 대신 짧게 말했다. “그때는 저희가 지금의 당신을 기억해 줄게요.”
진혁은 평소처럼 장난을 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망토 하나를 번갈아 머리 위로 걸치며 좁은 골목을 나왔다.
그런데 골목 입구에는 낯선 사람이 한 명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장갑을 낀 남자가 손에 자그마한 금빛 봉투를 들고 있었다.
“서진혁 감정사님.”
그가 허리를 숙였다.
“황금도시의 주인이 당신에게 인사를 전하랍니다. 내일 정오, 칠성 경매원에서 열리는 특별 출품회에 참석해 주십시오.”
진혁이 봉투를 받아 들지 않자 남자가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입장료는 아주 적습니다.”
“얼마나 적은데요?”
“당신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하루 하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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