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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2화
PAYLUA ORIGINAL · 제52화

52화. 찻잔을 팔지 않는 노파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315자

오프라인 책장
화령 동문 광장은 어둠이 내려도 금방 조용해지지 않았다. 상인들은 낮에 쓰던 차양을 접고, 그 자리에 등잔을 매달았다. 금속 상점의 문틈으로는 마지막 담금질의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짐꾼들은 경사진 골목을 오르며 등짐에 묶은 놋쇠 고리를 철컥거렸다. 광장 둘레의 수로는 낮 동안 모아 둔 빗물을 아래층 작업장으로 보냈다. 가끔 낡은 수문이 삐걱거리면 인근 가게들이 동시에 문을 닫고 물길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서진혁은 그 소리 사이에서 노파를 바라보았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네 이름이 적힌 방문 통지를 받았으니까.” 노파는 수레 아래에서 돌돌 말린 쪽지를 꺼냈다. 포장지는 낡았지만 종이 속은 새것이었다. 봉함끈에는 세 번 감은 황동 실이 매여 있었다. 카렌이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개봉해도 괜찮습니까? 발신자를 확인해야 합니다.” “마음대로 하렴. 단, 저 찻잔은 건드리지 말고.” 쪽지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31번째 후보에게 직접 보여 주되 팔지 말 것. 물건의 가격을 말한다면 시험은 실패.’ 발신인은 없었다. 도장은 루멘에 도착한 화령 위탁서와 비슷했지만 세리아가 알아본 폐기 도안보다 바깥 테두리가 한 겹 더 두꺼웠다. 라일이 노파의 수레바퀴를 슬쩍 살폈다. “시험이라니, 여기가 학교입니까? 입학금도 냅니까?” “낼 생각이 있다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공부는 오래전에 포기했습니다.” 노파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의 이름은 아란이었다. 젊었을 때는 화령의 공인 교환소에서 동전의 진위를 검사했고, 은퇴한 뒤에는 고장 난 생활 도구를 손질하며 시장을 지켰다고 했다. 혼자 사는 노인의 이야기는 차분하고 평범했다. 이상한 건 진혁을 기다렸다는 사실뿐이었다. 진혁은 찻잔을 다시 보았다. 옆면에 실처럼 가는 금이 가 있었고 손잡이는 누군가 반대 방향으로 힘을 주어 살짝 비틀어 놓았다. 바닥의 여섯 갈래 표시는 여러 해 사용하면서 거의 지워졌다. 찻잔을 감싸는 금속 띠는 순동이 아니라 녹을 방지한 합금이었다. “만져 봐도 될까요?” 노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해서 이름을 읽으려 하지 마. 네가 그걸 보면 아플 거라는 말도 들었어.” 진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감췄다. 누군가 자신의 능력과 부작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카렌은 옆에 섰고, 라일은 지나가는 행상들의 얼굴을 살폈다. 자리를 지키는 어른의 태도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경계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왜 보여 주시는 겁니까?” “이 찻잔이 무슨 물건인지 묻는 사람이 오면 이 질문을 하라고 했어. 이걸 본 사람은 전부 값을 알고 싶어 했지. 너는 그다음에 무엇을 묻겠니?” 진혁은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들킨 기분이었다. 그는 돈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경매장에서 허드렛일을 할 때에도 유물보다 물건의 낙찰표를 먼저 배웠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찻잔이 누구에게 소중한지, 왜 부서진 손잡이를 계속 고쳐 썼는지는 가격만으로 알 수 없었다. “누가 쓰던 겁니까?” 아란은 낡은 손수건으로 찻잔 입구를 닦았다. “이십 년 전에 제 딸이 저한테 준 선물이야. 불가에서 차를 끓여 주던 아이였지. 이 찻잔은 깨져서 두 번 고쳤어. 마지막에는 손잡이를 잘못 달아서 잡기도 불편해졌고.” “딸은 지금…” “멀리 있지. 살아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보냈다는 편지는 몇 번 왔는데 주소가 늘 달랐어.” 진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노파가 차를 내리는 동안 한적한 골목으로 따뜻한 곡물 냄새가 번졌다. 찻잔은 왠지 특별한 마법을 부릴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혁이 할 수 있는 일은 노파가 허락한 만큼 듣는 것뿐이었다. “말씀하신 시험이 끝난 건가요?” “그건 나도 몰라. 내 부탁은 여기까지니까.” 카렌은 쪽지와 봉함끈의 그림을 기록하고, 원본은 아란에게 돌려주었다. 아란은 물건과 종이가 자신 소유라는 확인을 받은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존중받는 것이라는 사실이 조금 늦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광장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찾았다. 저렴하다고 해도 마레온의 객주보다는 훨씬 비쌌다. 여관주인은 보증금을 금화로만 받고, 아침 식사는 별도였다. 진혁이 물 한 주전자의 가격까지 물어보자 여관주인은 처음 보는 짐승을 구경하듯 바라보았다. “화령에 처음 왔소?” “방금 왔습니다.” “그럼 꼭 알아 두시오. 우리 도시는 물건에 값을 매기는 곳이지만, 가장 비싼 건 서류를 모르고 서명한 사람의 실수요.” 방은 다락층에 둘 얻었다. 카렌은 복도 끝의 창가방을 사용했고, 진혁과 라일은 계단 옆 방을 나눠 썼다. 낮은 천장에는 낡은 나무 들보가 지나갔다. 금속 도시답게 창문 걸쇠만큼은 지나치게 튼튼했다. 창밖 회랑에는 야간 화물 수레가 올라가며 바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이 서류를 펼쳐 놓자 라일이 침대에 엎드렸다. “이 도시가 왜 ‘황금’도시인지 알아요?” “금화가 많아서?” “가진 사람에게는 금화가 도구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규칙이기 때문이죠.” “도둑이 철학을 하는군요.” “여긴 훔칠 금화도 등록되어 있어서 철학 말고는 할 게 없습니다.” 숙소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동안 진혁은 화령의 지도부터 펼쳤다. 물길과 도로를 동시에 그린 지도는 마레온의 항로도보다 복잡했다. 상부 회랑에는 은행과 대형 경매원이, 중부 회랑에는 보석 가공소와 인장 제작소가, 하부 골목에는 직물·목재·일반 기계 공방이 몰려 있었다. 종탑을 중심으로 거래 시각이 정해진다는 주석도 붙어 있었다. 정오의 종이 울린 뒤 이루어진 거래와 직전 거래는 보험료와 세금 계산이 달라졌다. “왜 시간을 이렇게 세세하게 나눴을까요?” 카렌이 물었다. “위험을 나누려고 시작한 제도겠죠.” 진혁이 말했다. “같은 날 물건을 납품해도 누가 손에 들고 있었을 때 사고가 났는지 가릴 수 있으니까요.” 라일은 지도의 북쪽 모서리를 짚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은 시간을 독점하고 싶어지겠죠. 물건 하나가 아니라 도시 사람 모두의 거래를 움직일 수 있으니까.” 진혁은 그 말을 적어 두었다. 위험한 음모를 떠올린 건 아니었다. 단지 어느 도시나 좋은 규칙을 만든 이유와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이유가 함께 있다는 걸, 지난 몇 달 동안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아란의 찻잔을 떠올리자 그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 찻잔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온다면, 그 사실만으로 주인이 팔 의사가 생길까. 아란에게는 딸이 손잡이를 잘못 달아 준 실수마저 추억이었다. 진혁에게는 기계의 흠집이 기능을 설명하는 단서였지만 아란에게는 그 흠집이 한 시절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그는 수첩에 별도의 문장을 남겼다. ‘숨겨진 가치가 반드시 판매 가치는 아니다.’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먼저 공인 교환소에 들렀다. 출장비 일부를 도시에서 통용되는 은표로 바꾸어야 공방에서 부품을 살 수 있었다. 교환소 안에서는 동전이 유리 통로를 굴러가며 맑은 소리를 냈다. 환산표는 시간마다 바뀌었고, 거래가 끝난 뒤에는 수수료가 영수증에 따로 적혔다. “한 닢을 바꾸는데 왜 두 번 내는 겁니까?” 진혁이 물었다. “화령의 현행 은표 보증료와 감별료는 별개입니다.” 창구 직원이 설명했다. “그럼 제 돈도 감별받고 저는 또 구경만 하는군요.” 카렌이 뒤에서 그를 살짝 밀었다. 뒤에 기다리는 대장장이 두 명이 벌써 발을 구르고 있었다. 교환소를 나오자 사람들이 북쪽 경매 회랑을 향해 모여들었다. ‘칠성 경매원 공개 사전 감정회’라는 깃발이 내걸려 있었다. 화령에서 가장 오래된 경매원 중 하나가 장인들의 가공품과 던전 유물을 함께 전시하는 날이었다. 미란이 요구한 회전축 제작사를 찾기에 좋은 기회였다. 경매원으로 가는 도중, 시장 한편에서 두 젊은이가 서로에게 소리를 질렀다. 한 사람은 금속 부품을 납품한 대장장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받아 가공한 공방의 관리인이었다. 관리인은 납품 시각이 마감보다 늦었다며 대금을 깎으려 했다. 대장장이는 물품을 제때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진혁은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 잠깐 섰다. 두 사람은 같은 종소리를 들었지만 서로 다른 시계를 보고 있었다. 관리인은 상부 회랑 시계를 기준으로 계산했고, 대장장이는 하부 골목의 벽시계에 맞춰 납품했기 때문이다. 결과를 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시장 감독원은 두 기록을 가져가 비교하겠다고만 말하고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부터 낮추라고 했다. “정오 종이 흔들리면 이 도시 전체가 싸우겠네요.” 진혁이 중얼거렸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전부 시간을 믿고 거래하니까요.” 카렌이 답했다. “그래서 종을 울리는 사람이 힘이 있어요.” 라일은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소매 안쪽에 빵 봉지를 숨기고 있었다. 진혁이 빵값을 묻자 그는 빈손을 펼쳤다. “정식 영수증 있습니다. 훔친 거 아닙니다.” “제가 묻기도 전에 대답하시네요.” “과거가 불리한 사람은 선제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카렌이 웃었다. 셋은 작게 나눠 먹은 빵으로 허기를 달래며 경매원 안으로 들어갔다. 진혁은 라일이 일부러 이곳에서 작은 돈도 정식으로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도 지금까지 만들어 온 삶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일 것이다. 경매원 앞마당에는 솜으로 싼 상자와 쇠붙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임시 감정대에서는 젊은 조수가 오래된 시계의 뚜껑을 열다가 태엽을 부러뜨릴 뻔했다. 감독 감정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손을 떼라고 외쳤다. 그 옆 바닥에는 ‘반품 유물, 사전 기록 부족’이라는 표지가 달린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진혁은 그 상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손바닥은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표지판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새것처럼 빛나는 다른 유물과 달리 이 상자 안의 녹슨 편자에는 사용 흔적이 정교하게 남아 있었다. 안쪽 고정 홈이 불규칙한 모양으로 닳은 것은 특별한 기계에 끼워 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건 왜 반품됐습니까?” 그가 묻자 감정 조수가 코웃음을 쳤다. “던전에서 나온 거라는데 반응이 없어요. 제철소에 가져가면 동화 열 닢이나 받을까 싶습니다.” 그 순간 뒤에서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화 열 닢은 너무 후한 평가군요.” 검은 감정복에 은색 견장을 단 남자가 걸어왔다. 넓은 회랑의 채광창 아래에서 그의 안경테가 차갑게 반짝였다. 가슴에는 칠성 경매원의 수석 감정사 표지가 달려 있었다. “그건 유물이 아니라, 오래된 바퀴의 부품입니다.” 남자가 진혁을 훑어보았다. “외지인이 경매원 감정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라면 이름부터 밝히시죠.” “루멘 경매장의 서진혁입니다.” 남자의 눈매가 아주 작게 움직였다. “아, 제31후보라 불린다는 그 사람.” 그는 웃지 않았다. “나는 윤담입니다. 화령에서는 물건보다 먼저 감정사의 자격을 증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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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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