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순풍이 불지 않았다.
청솔호는 잔조도를 떠나기 전 선저 판재를 다시 점검했고, 물통을 채우고 밧줄을 교체하느라 반나절을 썼다. 이전 항해에서 생긴 틈은 보수했지만 큰 파도에 다시 열릴 가능성이 있어 속도를 줄여야 했다. 선장은 진혁의 조급한 표정을 보고도 출발 시간을 당기지 않았다.
“바다는 네 사정 듣고 조용해지지 않아.”
“우리 경매장은 가끔 듣는데요.”
“그건 건물이 살아 있어서 그렇지.”
진혁은 그 말이 농담인지 진지한 설명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마테오가 씩 웃자 그제야 어깨의 힘을 풀었다. 도르는 배의 갑판에서 라일과 한참 동안 마른 밧줄을 엮었다. 두 사람은 잃어버린 이름에 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대신 매듭을 고르고 바람의 방향을 맞히는 평범한 일을 했다. 묵은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데에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회색 항로를 빠져나왔을 때 북쪽 등대의 불빛이 보였다. 마레온의 지붕들은 새벽빛 아래에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항구 입구에는 배들이 길게 늘어섰다. 파도보다 사람들의 불안이 먼저 다가왔다. 물자가 늦게 들어오면 식료품 값이 오르고, 방벽이 불안정하다는 소문이 돌면 보험료가 오른다. 어부와 운송업자는 언제 출항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부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혁이 배에서 내리자 벨라가 달려왔다.
“고생했어요. 그런데 짐은 왜 이렇게 많아요? 장부에는 출장비 스무 금화라고 했잖아요.”
“스무 금화 전부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큰 쇳덩이는 뭐죠?”
“금화 세 닢에 구입한 잠수 장비입니다. 사실 부품으로 쓰려고…”
“수리비는?”
“별도입니다.”
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은 아직 총비용을 모른다는 뜻이군요.”
진혁은 옆에 있던 카렌을 바라봤다. 카렌은 그를 구해 줄 생각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했다.
“제가 분명히 영수증 챙기라고 했죠.”
“다 챙겼습니다!”
라일이 뒤에서 웃었다.
“이 양반이 이제 도둑한테도 영수증을 요구합니다.”
세리아는 루멘 정문까지 마중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시의회 청사의 회의실에 있었다. 모라 보호 협약 재심사를 위한 긴급 안전 회의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진혁 일행은 아벨과 함께 그 자리로 향했다. 도르는 항로와 보관소 위치를 직접 증언하기로 했다. 라일은 사무소에 적힌 자기 과거의 흔적을 품에 넣고도, 그것을 자랑처럼 꺼내 보이지 않았다.
회의실은 창가까지 사람이 가득했다. 항만청 기술자, 시민 대표, 시의원, 루멘의 회계 담당자가 긴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 누구도 쉽게 웃지 못했다. 항만 방벽의 보조 펌프가 시험 중 예상보다 적은 출력을 내자 북항이 일부 침수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기 때문이다. 모라의 강제 출력 밸브를 다시 열자는 의견까지 있었다.
미란이 먼저 설명했다.
“현재 보조 펌프가 실패한 건 설계 자체가 불가능해서가 아닙니다. 염분이 높은 곳에서 금속 밸브가 고착되었고, 구형 배수관의 압력이 예측값과 달랐어요. 부품을 교체하고 계측을 다시 하면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밤 만조를 완전히 막는다는 보장은 못 합니다.”
한 시의원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럼 모라의 힘을 쓰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기존 설비를 유지하는 것과 강제 출력을 더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우리가 약속한 건 모라를 희생시켜 모든 비용을 숨기는 방식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그런 이상론으로 북항이 잠기면 누가 책임집니까?”
세리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루멘도 책임집니다. 그래서 비용을 감추지 않고 협조하러 온 겁니다.”
진혁은 회의실 옆에서 가져온 낡은 잠수관의 밸브를 내려놓았다. 항만청 기술자들이 흥미를 보였다. 구형 배수관과 맞지 않는 압력 차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완화하는 구조였다.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설비는 아니지만, 부품의 작동 원리를 바탕으로 시험용 변환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이걸 어디서 구했죠?” 미란이 물었다.
“잔조도 수리소요. 제대로 감정받지 못한 물건이었습니다. 아마 현행 장비와 결합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요.”
“수리비는?”
벨라가 뒤에서 헛기침했다. 진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직 계산 중입니다.”
잠깐 회의실에 웃음이 퍼졌다. 모두가 조금씩 긴장을 놓았다. 하지만 웃음이 안전 대책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미란과 기술자들은 새 밸브의 효율을 재기 위한 별도 수조 시험을 제안했다. 시의회는 필요한 자재비의 일부를 긴급 지원하고, 오늘 밤은 모라의 기존 출력 한도 내에서 조류를 조절하며 북항의 취약 지역에 임시 차수벽을 세우기로 했다. 위험한 주택에는 대피 안내를 내렸다.
오후가 되자 회의의 두 번째 안건이 시작되었다.
아벨은 잔조도에서 회수한 밀봉통과 세 장의 금속판을 소개했다. 그가 먼저 강조한 것은 한계였다. 원본 전체를 찾은 게 아니고, 작성자와 시점의 진위도 추가 대조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분리 보존 규칙과 최초 낙찰자 공란 기록은 모라의 독점 소유를 주장하는 어느 쪽에도 유리하게 단정할 수 없는 자료였다.
오르벤 칼스트도 회의실에 출석했다. 그는 검은 장갑을 벗지 않은 채 자료를 살폈다.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있었지만 곧바로 서류가 가짜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제 승계 신청이 거부되었다는 겁니까?”
이사벨 감찰관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독점 관리권 등록 보류를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선생님의 주장도 독립 검증을 받게 됩니다. 이번 자료는 검증할 기록이 더 존재한다는 근거지, 특정인이 승리했다는 판정이 아닙니다.”
오르벤은 종이를 접었다.
“그럼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혁이 말했다.
“적어도 모라를 물건처럼 팔 수 없다는 점은 계속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방벽 비용을 걱정했다. 그들의 걱정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도시를 안전하게 운영하려면 예산과 설비가 필요했다. 진혁은 자신이 해저에서 찾은 기록 한 장으로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청자 보존 자료가 도착하자 시의회는 검증단을 새로 구성하기로 했다.
검증단에는 법률가만이 아니라 고문서 감정사, 항만 기술자, 중립 시민 대표가 포함되었다. 진혁은 왜 직접 심사 위원이 될 수 없느냐고 물었다가 이해관계자라는 대답을 들었다. 루멘의 직원이며 제7봉인의 생체 열쇠라는 주장을 받는 사람인 이상, 모든 판단을 혼자 내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이사벨은 그에게 회의 뒤에 따로 말했다.
“아쉬워하지 마세요. 감정사에게 필요한 건 늘 최종 판정권이 아니에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하게 구분하는 일이 훨씬 중요할 때도 있죠.”
“최종 판정권이 있으면 월급도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건 사장님께 물으세요.”
진혁은 반쯤 진담이었던 말을 삼켰다. 그래도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자신의 손바닥에 나타나는 문장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의 판단만 기다리는 순간이 무서웠다. 그럴 때 틀린 결론을 낸다면 누군가의 권리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들지도 몰랐다.
저녁 무렵 북항에서는 임시 차수벽을 세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루멘의 경비대장 헥터는 직원들을 둘씩 나누어 모래주머니를 옮겼다. 이안도 회복 중인 몸으로 가벼운 물품을 운반하겠다고 나섰다가 카렌에게 한참 잔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이 모래주머니 위에서 장난을 치려 하자 어른들이 다가가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
진혁은 마지막 물자 창고에서 오래된 발판을 끌어내며 자신이 경매장 직원인지 항만 인부인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가 잡아당긴 밧줄 끝에는 방벽 펌프에 연결할 새 밸브가 매달려 있었다. 어제 금화 세 닢에 산 고철이 오늘은 어쩌면 항구의 물길을 바꾸는 실마리가 될 수 있었다.
만조가 시작되자 바다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방벽의 황동관에서 빛이 일렁였다. 미란의 새 변환기는 시험 수조에서 확인한 범위 안에서만 작동했고, 부족한 곳은 임시 펌프와 차수벽이 보완했다. 모라의 박동은 강제로 끌어올리지 않았다. 밤새 곳곳에 물이 새어 들어왔지만 예상했던 큰 침수는 피했다.
새벽이 왔을 때 시의회는 시험 결과와 손상 지역을 공개하기로 했다. 완전한 성공이라고 발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이번에는 누구의 부담으로 항구가 지켜졌는지 장부에 남게 되었다.
사람들이 돌아간 뒤에는 청자 장치가 내는 낮은 소리만 복도에 남았다. 진혁은 심실 쪽으로 난 창문을 바라봤다. 모라가 오늘의 소란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턱대고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미란이 기록한 신호와 사람들의 조치를 나란히 보관하는 것이었다. 모든 영웅담의 끝이 거창한 승리일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누군가를 강제로 더 소모시키지 않고 항구를 지켜 냈으니까.
루멘 경매장 사무실로 돌아온 진혁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출장 정산서를 발견했다. 벨라가 적어 놓은 금액 아래에 세리아의 필체가 덧붙어 있었다.
‘사고 수습 공로 인정. 출장 수당 지급. 수리비는 별도 심사.’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수당 항목을 읽었다.
“사장님이 드디어 제 가치를 알아보셨군요.”
세리아가 문턱에 기대서서 말했다.
“자네 가치에 값을 붙이는 게 아니야. 자네가 한 일에 임금을 주는 거지. 둘은 다르네.”
진혁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꽤 좋은 말이네요.”
“그리고 고철 수리비는 영수증 제출 전까지 승인 불가야.”
“나쁜 말도 바로 하시는군요.”
세리아는 웃었지만 오래 웃지는 않았다. 그녀는 잔조도에서 가져온 금속판의 탁본을 진혁 앞에 펼쳤다. 아벨과 이사벨이 원본을 보관하는 동안 비교 연구를 위해 만든 사본이었다.
금속판의 빈 의자 문양 뒤에는 아주 가는 글씨가 있었다. 현미경 같은 확대경으로 여러 번 비춰야 겨우 보이는 문장이었다.
‘제0호 감정사란 최초의 구매자가 아니라, 팔 수 없는 것을 처음으로 감정한 자를 뜻한다.’
진혁의 눈이 커졌다.
“제0호가 사람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직책이거나 기록 번호일 수도 있어.” 세리아가 대답했다. “확실한 건 아직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찾던 유산이 금화로 사는 물건이 아닐 가능성이 생겼어.”
진혁은 자신이 처음 루멘 지하 창고에서 보았던 구리 반지를 떠올렸다. 동화 두 닢이라는 가격표와 그 반지를 지키다 죽은 아흔일곱 사람의 기억. 그때 자신에게 보인 ‘본질을 본다’는 문장은 어쩌면 값이 아니라 어떤 거절을 배우게 하려던 것일까.
그날 밤, 누군가 루멘의 접수함에 새 위탁서를 넣고 갔다. 서류는 진짜로 보이는 공증 인장을 갖추고 있었지만 위탁품 칸이 비어 있었다. 대신 수취인란에 다음 문구가 적혀 있었다.
‘31번째 후보에게. 제0호의 자리가 비었음을 알린다. 다음 경매지는 내륙 황금도시 화령. 입장료는 당신이 끝내 잊지 않은 것 하나.’
진혁은 위탁서를 접지 않은 채 세리아에게 보여 주었다.
“이런 건 경매 신청서가 아니죠?”
“그렇지.”
“그럼 반송해도 됩니까?”
“보낸 사람부터 찾아야지.”
진혁은 피곤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마레온의 부두에는 다시 아침을 준비하는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제분소에서는 곧 쇠바퀴가 돌아갈 것이고, 갈매기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도시를 깨운다고 떠들 것이다.
그는 장부의 마지막 칸에 오늘의 수입과 지출을 정리했다. 고철 수리비가 미정이고 수당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에 잠시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작게 다른 문장을 적었다.
‘이번 경매의 낙찰자: 없음. 살아 돌아온 사람들: 전원.’
그리고 책을 덮었다.
제5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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