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의 이름이 새겨진 밀봉통은 손바닥보다 조금 길었다.
오랫동안 바다에 잠겨 있던 금속의 표면은 거칠었고, 접합부마다 하얀 소금 결정이 붙어 있었다. 통 자체는 낡았지만 밀봉선 안쪽은 비교적 깨끗했다. 바깥쪽에 새겨진 유나의 글씨는 물에 씻겨 흐려진 탓에 마지막 획을 정확히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카렌은 무턱대고 뚜껑을 돌리려는 라일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열기 전에 상태를 남겨야 해요.”
라일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제가 열겠다고 한 건 아닌데.”
“엄지손가락이 이미 걸쇠에 걸려 있잖아요.”
“오랜 직업 습관입니다.”
마테오는 젖은 갑판 위에 마른 나무판을 깔게 했다. 해상 구조대원이 밀봉통을 물에 헹구지 말고 그대로 수집용 천에 싸라고 조언했다. 겉에 묻은 퇴적물도 발견 장소를 추정하는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정조 시간이 끝나기 전에 탐침을 완전히 회수한 뒤, 일행은 잔조도로 돌아갔다.
섬 관리인은 시장 사무소 안쪽의 창고를 임시 보전실로 내주었다. 벽에는 오래된 저울과 곡물 수납장이 걸려 있었지만, 출입문 하나에 창문 둘인 구조라 감시가 쉬웠다. 카렌은 발견 시간과 수거 담당자 이름을 기록했고, 마테오는 선박에서 사용한 줄의 길이를 기록했다. 도르는 자신이 제공한 좌표의 출처를 증언했다. 진혁은 자신이 초자연적인 잔향으로 읽은 정보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 흔적을 구분해서 적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마테오가 물었다.
“제가 틀릴 수도 있잖습니까.”
“자네가 원래도 그렇게 신중했나?”
라일이 크게 웃었다.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화 두 닢짜리 반지 때문에 엄청난 일을 벌였어요.”
“그 반지가…” 진혁이 중얼거렸다.
“네, 엄청난 일이었죠. 덕분에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겁니다.”
다음 날 아침 마레온에서 파견된 아벨 공증인이 잔조도에 도착했다. 밤새 작은 우편선을 타고 온 그는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덜 마른 외투를 벗어 거는 동안에도 가져온 공증 도구를 확인했다. 인장, 봉인용 끈, 재료의 훼손 상태를 기록할 확대경, 그리고 서로 다른 종이에 같은 문서를 옮겨 적기 위한 세 묶음의 기록지가 있었다.
“왜 자네 일에는 늘 배를 타야 하는 것 같지?” 아벨이 진혁을 보고 말했다.
“출장 수당은 저만 받으니 화가 나시는 거죠?”
“내가 그런 식으로 일했다면 진작 은퇴했을 거다.”
밀봉통은 다섯 사람이 입회한 상태에서 열었다. 안쪽에는 얇은 금속판 세 장과 접힌 종이 하나가 있었다. 종이는 물기에 약한 재질이 아니었다. 빛을 비추면 섬유 사이로 짙은 실이 나타나는 특수 보존지였다. 아벨은 그것을 집게로 펼치며 읽었다.
‘회색 항로 청자 보관소 제1차 분리 보존 기록.’
그다음 줄에는 중요한 문장이 있었다.
‘루멘과 항만이 공동으로 보관한 협약의 원본은 단일 서류가 아니다. 권리 주장자에게는 사본을 제공하되, 생명 당사자의 동의 기록과 안전 설비의 작동 기록을 분리 보존한다.’
미란이 만든 독립 청자 장치와 놀랍도록 닮은 발상이었다. 보호 협약이 진짜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 서류 자체가 협약의 원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종이 끝의 서명이 손상되어 있고, 함께 들어 있던 세 장의 금속판은 각각 다른 보관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첫 번째 장소가 이곳인가요?” 카렌이 물었다.
“첫 번째는 청자 보관소의 외부 확인점일 뿐이오.” 도르가 설명했다. “아직 안쪽의 원본은 건드리지도 않았소.”
진혁은 금속판 하나를 들여다봤다. 작은 배와 세 갈래 종 그림이 있었다. 가운데 비어 있는 칸에는 누군가 숫자를 새겼다가 지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진혁의 손바닥에서 약한 열기가 올라왔다. 그는 장갑을 벗었다가 다시 꼈다. 더 깊은 감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두 판과 맞대어 보면 선의 방향을 비교할 수 있을 테니까.
세 장을 나란히 놓자 하나의 도형이 완성되었다. 바다 아래 놓인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서로 다른 문양이 있었다. 첫째는 항로 표지, 둘째는 청자, 셋째는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는 의자였다.
아벨이 말했다.
“이 도형은 서류가 모두 확인되어야 효력이 생긴다는 뜻일 수도 있네. 법적으로 단정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적어도 누가 서류 한 장을 들고 와 ‘내가 모라의 주인이다’라고 주장할 때 반박할 근거는 늘었어.”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중요했다. 낡은 기록 하나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지만, 문제를 함부로 끝내려는 사람을 막아 줄 수는 있었다.
도르는 세 장의 금속판을 바라보면서도 선뜻 손대지 않았다. 오래된 금속의 무늬 가운데 자신이 기억하는 선은 있었지만, 다른 선은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라일은 그 사실을 듣고 잠시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도르는 기억에 없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정직함 덕분에 진혁은 이 노인의 다른 진술도 조금 더 신중하게 믿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밀봉통에서 나온 마지막 종이를 펼치자 시체처럼 창백한 종이 위에 낯선 도장이 드러났다. 흰 배경의 검은 원. 그 아래에는 998이라는 숫자와 함께 사람이 앉지 않은 의자 그림이 있었다.
‘최초 낙찰자: 없음.’
라일이 눈을 깜빡였다.
“왜 낙찰자가 없습니까? 경매 기록 아니에요?”
아벨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경매로 넘길 수 없는 물건이라는 이의가 처음부터 있었다는 뜻일 수 있네. 누군가 가격을 부르기 전에 소유권 자체를 다툰 거지.”
그때 보전실 문밖에서 큰소리가 났다. 회색 장부 조합의 담당자가 섬 경비를 데리고 왔다. 니브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무적인 차림의 남자가 회색 봉투를 내밀었다.
“어제 경매에서 제998호 원부를 이만 금화에 낙찰받은 고객이 있습니다. 수상 경매장의 재고와 관련 자료는 모두 조합 재산이므로, 이번에 발견한 해저 보관품도 조합의 우선 인수 대상입니다.”
“누가 그런 규칙을 정했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낙찰 약관에 있습니다.”
“저희는 그 약관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같은 유산에 속하는 물건입니다.”
“같은 시대의 유물이라는 사실만으로 소유권이 옮겨지지 않습니다.”
남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도르의 낙찰표 사본이 있었다. 이만 금화. 단, ‘최종 지불 전 권리 검증 필요’라는 문구가 작은 글씨로 들어 있었다. 실제로는 결제가 끝나지 않은 보류 입찰이었다. 게다가 도르는 이 책을 살 의사가 없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진혁은 남자의 말을 그대로 기록해 달라고 아벨에게 부탁했다. 법률 판단은 시의회와 항만 심사관이 해야 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주장과 제출한 자료를 빠짐없이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여러분은 이걸 왜 그렇게 지키려 합니까? 제0호 감정사의 유산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걸 얻으면 루멘도 원하는 대로 운영할 수 있을 텐데요.”
진혁은 금속판 위의 빈 의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지키는 겁니다. 값 매기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너무 위험하니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한편 잔조도에서 오가는 소문은 이미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0호의 유산을 찾았으니 마레온이 막대한 재산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수상 경매가 무너지는 바람에 섬의 관광 수입이 줄어들 거라 걱정했다. 섬 관리인 노파는 어느 쪽에도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것은 선착장에 남은 쓰레기를 치우고, 야간에 사람을 유인하던 불법 영업자를 다시 들이지 않는 일이었다. 진혁도 그 일을 도왔다.
테오는 금화 열 닢을 벌 기회를 놓쳤다고 투덜거렸다. 어른들은 그가 협박을 받고도 정보를 숨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장 운반일을 맡겨 주었다. 금화 열 닢만큼 크지는 않지만 정당한 보수가 약속되었다. 테오는 하루치 일을 끝내고 동화 몇 닢을 받자 오히려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저한테 주는 거 맞죠?”
“네가 한 일의 값이지.” 노파가 대답했다. “네 이름을 파는 값이 아니야.”
진혁은 그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제0호 감정사의 유산을 쫓으면서 자신은 이름을 사고파는 계약을 계속 만나고 있었다. 반면 세상은 매일 작은 노동과 작은 대가를 통해 돌아갔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귀한 물건의 가격이 아니라,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사에 있는지도 몰랐다.
저녁에 도르는 라일과 작은 방에서 마주 앉았다. 도르는 자신의 기억을 고쳐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확실히 아는 것과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을 구분하고, 듣기 좋은 답을 만들어 주지는 않겠다고 했다. 라일은 잠시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거짓 기억보다 불완전한 진실이 낫다는 걸 이미 여러 번 배운 사람이었다.
아벨은 회색 장부 조합이 주장하는 권리를 별도 서류로 분리해 놓았다.
처음에는 선박의 소유권, 그다음은 조합이 경매 물품을 판매할 권한, 마지막은 해저에서 회수한 기록의 소유권. 서로 연결된 주장이라고 해도 하나가 인정되면 모두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혁은 그 설명을 듣고 조금 놀랐다. 누군가는 늘 하나의 계약서로 모든 것을 가져가려 했지만, 실제 세계에는 그보다 많은 경계가 있었다.
“만약 조합이 정말 해저 자료의 주인이었다면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을 숨기거나 사람의 이름을 빼앗을 권리까지 생기는 건 아니지.” 아벨이 말했다. “권리는 필요한 만큼 정확하게 나누어 살펴야 해.”
진혁은 세리아에게 보낼 중간 보고서를 작성했다. 유물을 찾았다고 쓰지 않고 밀봉통을 확보했다고 적었다. 보호 협약 원본을 얻었다고 쓰지 않고 분리 보존 규칙이 기재된 자료를 회수했다고 적었다. 그런 표현은 재미없었지만, 나중에 누구든 그 내용을 믿을 수 있게 하려면 정확해야 했다.
그날 오후, 해상 구조대가 경매선의 적재 기록과 통행 서류를 보전하기 시작했다. 회색 장부 조합의 책임자에 대한 조사는 이제 막 출발했을 뿐이었다.
보전실이 조용해졌을 때 도르는 낡은 나침반을 라일에게 밀어 주었다.
“내 기억은 믿을 수 없소. 하지만 이 안쪽 덮개에는 네가 처음 배달을 나갔던 날의 날짜가 적혀 있소.”
라일은 손을 떨면서 뚜껑을 열었다. 날짜 아래에 누군가 작은 글씨를 적어 놓았다.
‘돌아온 아이는 자기 이름을 돌려받을 수 있다.’
그 아래 칸은 뜯겨 있었다. 이름이 있었을 법한 자리에 칼로 긁어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라일은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가 그 이름을 되찾으면… 지금의 제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요?”
카렌이 그의 옆에 앉았다.
“이름이 사람의 전부는 아니에요. 하지만 누가 마음대로 가져갔다면 돌려받을 권리가 있죠.”
진혁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에게 시간을 주었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느리게 창문을 흔들었다.
그 순간 미란에게서 긴급 전언이 도착했다. 루멘 심실의 박동이 평소와 다르게 느려졌다는 연락이었다. 대체 방벽 펌프를 시험 가동하던 중 수위가 예상보다 높아졌고, 항만청이 야간 통행을 제한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누군가 유산 경매로 그들을 바다에 묶어 둔 동안, 마레온에서는 다른 문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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