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8호 원부를 본 순간 진혁은 입찰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최초 기록 보존본.’ 네 글자가 유난히 두껍게 찍혀 있었다. 서른한 명의 이름과 제7봉인, 모라의 보호 협약, 유나가 남겼다는 편지까지 서로 연결된 지금, 저 한 권이 진실을 밝혀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책의 표지는 최근에 다시 씌운 것처럼 깨끗했고 모서리만 기묘하게 닳아 있었다.
진혁은 경매장 중앙의 난로를 봤다. 방금 전 이름을 잊은 손님을 의무실로 옮기고서도 운영진은 경매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손님 일부가 항의하며 배에서 내렸지만 앞줄의 부유한 입찰자들은 남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의 고통보다 오래된 장부가 더 희귀한 상품이었다.
경매사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본품은 제0호 감정사의 유산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최초 계약을 증명하는 근거이자, 잃어버린 원본의 위치까지 가리키는 지도라고 전해지지요.”
“그럼 원본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진혁이 물었다.
경매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희는 ‘최초 기록 보존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보존본의 의미를 정의하지 않으면 복제품도 전부 보존본입니다.”
객석의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니브는 뒤쪽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매사는 시작가를 불렀다.
“천 금화.”
앞줄에서 손이 올라갔다. 이천, 삼천, 오천. 값은 단숨에 커졌다. 루멘이 마련해 준 정상 거래용 보증금 스무 금화로는 손가락도 내밀 수 없었다. 진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 오십만 금화의 값을 매긴 사람들이 천 금화짜리 장부를 팔고 있었다. 숫자들이 전부 남의 삶을 가져다 쓴 것처럼 가볍게 들렸다.
카렌이 팔을 잡았다.
“낙찰받을 생각 하지 마요.”
“알아요. 그 돈도 없어요.”
“돈이 있었어도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장부가 진짜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방금 직접 설명했잖아요.”
라일은 낙찰자의 손만이 아니라 주변 경비의 움직임까지 확인했다. 경매장의 높은 위치에 앉은 손님들은 작은 종이 한 장을 흔들어 수천 금화를 부르고 있었다. 반면 뒷줄의 직원들은 그 종이를 회수하고 잉크를 새로 채우느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라일은 평생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 때 그 손짓을 보았지만, 이제는 그 손짓이 기록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불쑥 진혁을 돌아봤다.
“합법적인 절차도 누군가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겠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겁니다.”
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언젠가 그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문득 들었다.
라일은 객석 뒤편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검은 표를 찬 사람들이 밖으로 나갈 때 신분 확인 때문에 발목 잡히는 모습을 기록했다. 선장이 약속대로 작은 배를 준비했는지 확인하러 나가고 싶었지만, 아직 여기에 남은 사람들을 두고 떠나기 어려웠다.
입찰이 계속되는 동안 진혁은 자신의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계산했다.
천 금화는 작은 화물선의 일 년 정비비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팔천 금화라면 북항의 집 여러 채를 수리할 수 있었다. 이 숫자가 허공에서 망치 소리와 함께 오르내리는 동안 이름을 잠시 잊어버린 관객은 작은 의무실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진혁은 화가 났지만 경매에 참가한 사람이 모두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자신처럼 각자의 사정과 집착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을 것이다.
맞은편에 앉은 붉은 머리의 상인은 손가락을 펼치며 입찰했다. 그는 분명 장부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카렌이 그의 옆자리 점원에게 위탁자에 관해 묻자 점원은 일관되게 모른다고 답했다. 사람을 몰아세워 고백을 받아내는 건 법적 증거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루멘에서는 이런 물건을 얼마에 시작합니까?” 카렌이 물었다.
“출처가 불분명하면 접수 보류입니다.”
“잘 아네요.”
“제가 경매사로 오래 일했다니까요.”
“수석 대행이 된 지 얼마나 됐죠?”
“그걸 왜 갑자기 정확하게 따지십니까?”
카렌이 작게 웃었다. 진혁도 웃었지만, 앞줄의 경비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고 표정을 고쳤다. 관객 몇 명이 앞서의 사고 때문에 환불을 요구하자 경매장의 직원들은 문 안쪽에 줄을 치고 그들을 바깥으로 보내려 했다. 사람들의 분노가 위험한 충돌로 번지면 장부를 살필 기회조차 사라질 수 있었다.
라일은 선박의 통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기억해 두었다.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두 개, 구명정은 후미에 네 척. 그러나 다른 직원은 후미의 창고문을 계속 잠그고 있었다. 그는 이 작은 불일치를 진혁에게 알려 주었다. 진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값이 얼마까지 올라가든 오늘의 첫째 목표는 고가의 장부를 손에 넣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무슨 기록을 가지고 사람들을 협박하는지 확인하고, 자신들이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값이 팔천 금화에 이르렀을 때,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만 금화.”
배의 후미 쪽에서 늙은 항해사가 손을 들고 있었다. 짙은 남색 외투에 소금때가 하얗게 앉아 있었고, 한쪽 다리에는 금속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그는 말할 때마다 숨을 짧게 쉬었다. 경매사는 그를 처음 보는 듯했지만 니브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만 이천.” 앞줄의 귀족이 불렀다.
“만 오천.” 늙은 항해사가 대답했다.
진혁의 눈은 그 남자의 가슴으로 향했다. 가죽끈에 걸린 낡은 나침반. 겉면에 작은 파도 세 줄이 새겨져 있었다. 라일이 그 문양을 알아보고 똑바로 섰다.
“그 사람이에요.”
“누구?”
“어릴 적 우리한테 길을 가르치던 항해사. 이름은 기억 안 나요. 하지만 손가락으로 바다의 깊이를 세는 버릇은 알아요.”
늙은 남자는 입찰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하나씩 굽히며 숫자를 세고 있었다. 배달인들은 그를 ‘이름 없는 길잡이’라고 불렀다. 왜 그런 호칭을 붙였는지는 라일도 몰랐다. 그가 기억하는 건 거친 손과 낡은 나침반, 남들이 잠든 새벽에도 배달인에게 길을 설명하던 낮은 목소리뿐이었다.
진혁이 고개를 돌려 라일에게 말했다.
“지금 달려가면 저쪽 경비가 바로 쫓아올 겁니다. 낙찰 끝나고 선장님 쪽에서 신분부터 확인해 봅시다.”
라일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도망가면요?”
“도망가는 사람을 잡기 위해 여기 남은 사람들의 안전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경매는 이만 금화에서 멈췄다. 그 이상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늙은 항해사가 마지막 입찰자였다. 경매사가 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세 번째 내려치기 직전, 객석의 젊은 상인이 소리쳤다.
“소유권 증명서를 보여 주시오!”
그 상인은 앞서 자신의 검은 표를 벗긴 사람이었다. 경매장 운영진이 제시한 물품 설명과 계약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다른 손님들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 틈에 늙은 항해사는 조용히 낙찰표를 내려놓았다.
“나는 물건을 사려고 부른 것이 아니오.”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경매사가 시간을 벌게 하려고 부른 거지.”
무대 뒤편에서 묵직한 충돌음이 났다. 누구도 손대지 않았는데 유리 보관함이 흔들렸다. 조명용 마력석이 차례로 꺼지고, 객석 가장자리의 황동 관에서 김이 솟았다. 니브가 뒤문을 닫으려 하자 카렌이 그 앞을 막아 섰다.
“문을 열어 두세요. 비상 통로를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경비 둘이 달려들었지만 카렌은 칼날이 아니라 검집으로 그들의 팔을 쳐냈다. 통로에서 넘어지면 뒤쪽의 관객들이 다칠 수 있었다. 라일은 당황한 사람들을 출구 쪽으로 안내했다. 진혁은 반대로 무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 상자는 오래된 장부를 보호하는 진열함이 아니었다. 책 아래에 새겨진 얇은 금속선이 황동 관으로 이어졌다. 장부 위쪽에 종이 조각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객석에서 제출했던 접수표의 글자가 한 장씩 사라지고 있었다.
[계약 전사 장치의 외장.] [전사 대상: 명부의 기재 일부.] [장치 상태: 불안정.] [원부의 진위: 확인 불가.]
진혁은 능력을 끊고 한 발 물러났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 순간 늙은 항해사가 다가와 진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을 더 대면 안 됩니다. 지금 보고 있는 건 책이 아니라 책 밑의 기계니까.”
“누구십니까?”
“그 질문을 들으러 온 사람이오.”
늙은 항해사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였다. 한쪽 뺨에는 오래된 상처가 있었고, 눈가에는 밤새 바닷바람을 맞는 사람 특유의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는 책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멈췄다.
“나는 내 이름을 오래전에 빼앗겼소. 항구 기록에는 나를 ‘이름 없는 항해사’로 적어 놓았지. 그걸 되찾으려고 이 장부를 찾고 있었소.”
“라일 씨를 아십니까?” 진혁이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객석 사이에서 관객을 돕던 라일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았을 때, 늙은 항해사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 배달하는 아이 가운데 그런 눈을 가진 아이가 있었소.”
진혁은 숨을 참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적어 놓은 종이가 있었지. 이름을 잃기 전에는 내가 보관했소.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오.”
남자는 자신의 나침반을 꺼내 보였다. 바늘은 북쪽이 아니라 오래된 등대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장부가 진짜라면 바다 밑에서 가져온 게 아니오. 바다 밑의 원본을 가리키는 모조품이겠지. 원본은 아직 제자리에 있소.”
“어딘데요?”
늙은 항해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난로 뒤의 좁은 관을 가리켰다. 그 아래에는 바닷물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먼저 사람부터 밖으로 내보내시오. 이 배는 지금 떠다니는 경매장이 아니라, 물을 들이기 시작한 창고요.”
도르의 말투에는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긴 시간을 돌아와도 여전히 다 알지 못한다는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라일이 그에게 다가와 오래전에 들었던 암호를 하나씩 말했다. ‘소금은 물을 기억한다.’ ‘빈 배는 손님을 싣지 않는다.’ 도르는 첫째 문장에 반응했지만 두 번째 문장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서로 다른 시대의 배달인들이 같은 규칙을 조금씩 다르게 외우고 있었던 것처럼. 두 사람은 기억이 만나는 지점을 찾다가도 어느 순간 멀어졌다.
“내가 너를 알았다고 해서 네 모든 과거를 보증할 수는 없다.” 도르가 말했다. “미안하구나. 오래된 얼굴은 기억해도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라일은 비웃지 않았다. 그가 흘리듯 대답했다.
“괜찮아요. 남들이 저를 뭐라고 불렀는지보다, 왜 그 이름을 숨겼는지부터 알고 싶으니까요.”
도르는 나침반의 뚜껑을 열어 보여 주었다. 나침반 안에는 원래 제작자가 새긴 작은 글씨가 있었다. ‘방향을 잃어도 동료를 버리지 말 것.’ 진혁은 그것이 대단한 마법보다 값진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선체 아래의 충돌음이 다시 났다. 오래된 기억을 들여다볼 시간은 끝나 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들자 바닥의 금속판 아래에서 둔탁한 울림이 올라왔다. 배의 바닥이 잠기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수면 아래에서 잠금 장치를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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