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자국은 계단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젖은 나무판 위에 작은 발 하나가 찍혔다가 사라지고, 그보다 조금 앞에 두 번째 발이 생겼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아이가 갑판 한가운데를 걷는 것처럼. 선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물통을 차는 바람에 물이 쏟아졌고, 자국은 그 물 위로도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바다 반대편의 검은 배에서는 여전히 세 번씩 종을 치고 있었다.
카렌은 진혁을 갑판 계단 쪽으로 밀어 놓았다.
“저쪽은 사람을 넘기라는 게 목적이에요. 우리를 겁주려고 이런 현상을 만든다면, 방법을 파악할 시간을 벌어야 해요.”
“귀신한테 시간을 달라고 해도 될까요?”
“귀신이라는 증거부터 찾아요.”
검집에서 카렌의 검이 미끄러져 나왔다. 강철의 검날에는 해무가 얇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자국이 향하는 방향을 눈으로 좇으면서도 무턱대고 휘두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검을 휘두르면, 겁먹은 선원이 먼저 다칠 수 있었다.
“돛 밑으로 모두 물러나!” 마테오가 외쳤다. “밧줄 당기지 마라! 방향을 잃으면 암초에 걸린다!”
그는 한손으로 키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나침반을 두드렸다. 바늘이 북쪽을 가리켰다가 서쪽으로 꺾였다. 선장은 악담을 뱉었다. 회색 항로의 마력 조류가 배를 붙잡기 시작한 것이다.
라일이 무릎을 꿇고 갑판을 살폈다. 그는 발자국 하나 옆에서 물기를 손가락에 묻혔다. 손끝에서 희미한 은빛 가루가 번졌다.
“이게 몸에서 나오는 건 아닙니다.”
“뭔데요?”
“유리 가루 같아요. 아래쪽이 아니라 위에서 떨어졌어요.”
셋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돛을 지탱하는 높은 활대 끝, 갈매기가 앉아도 눈에 띄지 않을 좁은 틈에 반짝이는 물건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은빛 반사판이었다. 누군가 작은 유리조각을 촘촘히 붙여 만든 판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바닥에 닿는 습기를 일정한 모양으로 응축시키고 있었다.
진혁의 눈에 짧은 잔향이 떠올랐다.
[마력 응결판. 원래 용도: 밤바다의 길 표시.] [현재 용도: 발자국 형태로 수증기를 응축.] [기록 손상. 제작자 미확인.]
그는 능력을 깊이 읽지 않았다. 어젯밤의 통증이 아직 남아 있었다. 대신 위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걸 떼어야 해요. 겁주는 데 쓰는 장치예요.”
라일이 이미 돛대에 매달리고 있었다. 거친 밧줄 위를 고양이처럼 올라가던 그는 검은 배를 돌아봤다. 여자는 갑자기 종을 멈추더니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곧 검은 배의 선원들이 일제히 작은 쇠구슬을 던졌다.
쇠구슬은 청솔호에 닿기도 전에 바닷물에 빠졌다. 그러자 물 아래에서 청백색 빛이 번졌다. 반사판의 각도가 바뀌고, 갑판에 떠오른 발자국이 세 갈래로 늘어났다. 선원들은 서로 부딪치며 물러났다.
“저건 협박이에요.” 카렌이 말했다. “미리 준비한 위협을 초자연 현상처럼 보이게 만든 거죠.”
라일이 활대 끝에 도착했을 때 배가 크게 기울었다. 그는 두 팔로 나무를 감싸 안은 채 욕설을 내뱉었다. 반사판을 붙인 매듭에는 세 줄 파도 모양의 매듭끈이 들어 있었다. 라일은 순간 손을 멈췄다. 낯익은 방식이었다. 손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혁이 외쳤다.
“라일! 훔치는 게 아니라 장치 제거예요! 밑으로 떨어뜨리지 마세요. 증거입니다!”
“알아요! 꼭 이런 때에는 규칙을 잘도 찾으시네!”
라일은 매듭을 끊는 대신 끈을 풀었다. 장치를 품 안에 넣고 내려오자 진혁이 천 조각으로 감쌌다. 바닥의 맨발 자국은 마지막 한 발을 남기고 사라졌다.
하지만 바다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해무가 갑자기 짙어졌다. 검은 배는 종 소리만 남기고 멀어졌으며, 물속에서 번진 청백색 빛 때문에 암초의 윤곽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을 받은 청솔호가 우현으로 밀렸다. 마테오는 곧장 키를 돌렸지만 선체 아래에서 나무가 돌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암초 옆을 스쳤다! 전원 아래로, 물 샌 곳 확인해!”
카렌이 먼저 하부 선실로 뛰어 내려갔다. 진혁도 뒤따랐다. 다리보다 가슴이 먼저 흔들렸다. 배가 침몰하면 경매고 유산이고 전부 바다 밑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래도 손에 든 봉인함부터 안전한 선반에 묶었다.
하부 창고에서 배 밑바닥을 살피던 선원은 물이 스며드는 판재를 발견했다. 큰 파손은 아니지만 계속 항해한다면 문제가 될 틈이었다. 마테오는 닻을 내릴 수 있는 얕은 만까지 후퇴하겠다고 판단했다.
“경매에 늦습니다!” 진혁이 외쳤다가, 선장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늦는 건 괜찮다.” 마테오가 말했다. “죽은 사람은 입찰을 못 해.”
방향을 되돌리는 동안 갑판의 질서는 이전과 달랐다.
처음에는 누구나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피하느라 서로를 밀쳤지만, 반사판을 회수하고 나자 선원들은 맡은 일을 다시 찾았다. 다브가 물을 퍼냈고 요셉은 젖은 돛줄을 정리했다. 마테오는 선체의 기울기를 확인하면서 지나가는 암초마다 해도 위에 표시했다. 청솔호가 안전한 만에 들어오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진혁은 전보다 해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경험으로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종이 위의 좁은 선은 실제로는 물살과 암초, 소금기와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선 하나를 잘못 읽으면 손님도 선원도 무사하지 못할 수 있었다. 경매장 감정서의 작은 오차가 엄청난 거래 손실을 부르는 것과 닮은 점이었다.
“손은 괜찮아요?” 카렌이 물었다.
진혁은 붕대 아래가 여전히 아프다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은 곧장 알아차렸다.
“아픈 걸 숨기면 치료 시기를 놓쳐요.”
“전혀 안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믿을 것 같아요?”
그녀는 선실의 작은 구급함을 열어 소독한 천을 꺼냈다. 진혁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의 문장은 희미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글자를 읽는 대가가 손의 통증이라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계속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을 생각했다.
진혁은 돛대 위에서 내려온 라일의 손바닥이 벗겨진 것을 발견했다. 라일은 아픈 기색을 내지 않았지만 장갑을 벗자 붉은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카렌이 새 붕대를 내밀었다.
“두 사람 다 손을 너무 함부로 써요.”
라일이 웃었다. “저는 원래 손으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그 손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라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 자신이 풀어 낸 매듭 하나가 사람을 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청솔호는 해도를 거슬러 작은 만으로 돌아갔다. 해무가 조금 걷힌 뒤에야 뱃사람들은 암초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위에 분명 누군가 닦아 놓은 금속판이 있었다. 해도에 표시된 표지판 방향과 정반대로 빛을 반사하도록 설치된 것이었다.
검은 배가 나타난 뒤 우연히 길이 틀어진 게 아니었다. 누군가 그들을 잘못된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날 밤 일행은 만 안쪽의 작은 어촌 선착장에 묵었다. 선착장에는 다섯 채 남짓한 집과 그물을 말리는 빈터가 있었다. 저녁이 되면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왔고, 젖은 장갑을 말리려는 사람들이 연통 근처에 몰렸다. 카렌은 선원들의 손에 물집이 잡힌 곳을 살폈고, 진혁은 마테오와 배 수리 비용을 계산했다. 라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촌의 종탑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종 세 번.” 그가 말했다. “어릴 때 듣던 소리와 같습니다. 첫 번째는 도착. 두 번째는 물건 확인. 세 번째는 위험하다는 뜻이었어요.”
진혁은 몸을 돌렸다.
“그럼 아침에 선장님이 말한 ‘세 번째 종’도 위험 신호였습니까?”
“아마도요. 그런데 누가 그걸 협박에 쓰고 있습니다. 배달인들에게는 원래 경고였던 소리를요.”
라일은 주먹을 폈다. 손바닥에 조그만 황동 종의 혀가 놓여 있었다. 어촌 종탑의 낡은 부품과 형태가 같았다. 다만 안쪽에 ‘마지막 배달인은 증인이 아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훔친 겁니까?” 진혁이 물었다.
“버려진 걸 주웠습니다. 마을 어른한테 기록과 함께 건네받았어요.”
“그럼 영수증은요?”
“서진혁 씨는 어쩌다 종보다 영수증을 더 사랑하게 됐습니까?”
카렌이 빙긋 웃었다.
“저도 그건 궁금하네요.”
진혁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경매장은 물건을 팔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가 지난 한 달 동안 목격한 일은 정반대였다. 누구나 자기 물건을 팔 수 있다는 자유를 내세워 누군가의 이름과 심장까지 거래하려 했으니까. 그때마다 물건 하나가 어떤 손을 거쳐 왔는지 적힌 기록이 사람을 지키는 마지막 근거가 되었다.
“값보다 먼저 주인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 대답에 라일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촌의 밤에는 항구와 다른 정적이 있었다.
마레온에서는 늦은 시간에도 마차가 달리고, 높은 건물에서 시계가 울리고, 사람들은 불이 켜진 창문을 보며 누가 아직 깨어 있는지 짐작했다. 이곳에서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고, 집과 집 사이의 어둠은 불빛 하나로도 쉽게 걷히지 않았다. 선원들이 배를 수리하는 동안 주민들은 낡은 방파제 뒤에 작은 화로를 놓고 손님들에게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진혁은 그 자리에서 선박 수리비를 따로 적었다. 판재 두 장, 방수용 수지, 밤새 작업하는 선원들의 추가 보수. 비용은 생각보다 컸다. 마테오는 여행 계약에 모든 수리비를 승객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선박의 기본 유지보수는 선주의 책임이고, 이번 항해에서 발생한 추가 손상만 협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진혁이 너무 쉽게 지불하겠다고 나서자 오히려 손을 저었다.
“가격을 잘 보는 놈이 정작 자기 돈 쓸 때는 왜 그러냐?”
“일을 맡겨 놓고 선장님 손해를 보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 마음은 좋은데, 책임을 구분하는 게 먼저지.”
카렌은 그 말을 듣고 장부에 두 항목을 따로 표시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감정과 무엇을 정당하게 부담해야 하는지는 같은 일이 아니었다. 진혁은 자신이 계약이라는 단어를 경계하면서도, 정당한 계약이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곤 했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라일은 어촌 노인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노인은 오래전 밤배가 실종되던 시절을 기억했다. 배달인들이 종 세 번을 치면 길을 열어 주었다는 말도 했다. 그들은 물건을 전달하는 대가로 돈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의 이름이나 몸을 인수한다는 식의 문구에는 절대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그런 종이 다 사라진 줄 알았어요.” 노인이 말했다. “옛날에는 길을 잃은 뱃사람들을 찾아 주는 소리였는데 말이지.”
라일은 종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이 오로지 도둑질과 도망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정말 사람을 구하려고 항로를 오갔다. 그 사실만으로도 어둠에 묻힌 기억의 모양이 조금 달라졌다.
한밤중, 배를 수리하던 마테오가 낡은 반사판을 들고 왔다. 판의 뒷면에는 육안으로는 희미한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마테오는 그것을 등잔에 비추었다.
“이건 배를 침몰시키려는 장치가 아니라, 원래 안전한 수로를 알려 주던 장치일 수도 있어. 제대로 돌리면 말이지.”
그가 눈금을 맞추자 반사판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뻗었다. 해도 위의 ‘부서진 등대’를 정확히 가리켰다.
빛이 닿은 자리에 글자가 떠올랐다.
‘제0호 감정사의 유산. 예비 감정 장소: 잔조도 옛 등대. 입장 서명 금지.’
진혁은 멍하니 문장을 읽었다.
경매장으로 부르는 초대장과 달리, 누군가는 그 장소에 가되 절대로 서명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제4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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