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 당일 아침, 마레온에는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다.
북항의 등대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불을 켰고, 선박들은 방벽 안쪽에서 속도를 줄였다. 부두를 오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경매장 지붕의 금빛 장식은 하얀 습기에 가려졌고, 정문 앞에는 새로 붙인 경고문이 물기를 머금었다. ‘모라 관리권 관련 심사는 오늘 정오. 심실의 독립 검증 결과가 제출될 때까지 모든 관련 매매 중지.’
진혁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밤새 장부를 검토해서가 아니었다. 오래된 청자 장치를 루크가 정해진 시간에 보낼 수 있을지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준비한 장치와 증거를 차례대로 공개하는 것이었다. 모라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원하는 답으로 바꿔서는 안 됐다.
시의회에서는 방벽 위험을 이유로 공개 시연에 반대한 의원도 있었다. 이사벨은 시연 장소를 루멘 내부로 제한하고, 심사위원들이 원격 관찰 수정으로 기록을 확인하는 절충안을 마련했다. 긴급 중단 권한은 독립 기술자에게 두고, 항만청은 별도 출력 회선의 상태를 계속 감시했다.
루멘의 시계는 오전 열한 시를 가리켰다. 식당에서는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심실 근무자들에게는 따뜻한 수프를 작은 주전자에 담아 내려보냈다. 벨라는 실험 인원에게 무리하게 일하지 말고 교대로 식사하라고 했다. 그 말은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정도로 단호했다.
진혁은 수프를 마시며 창고 쪽 계단을 바라봤다. 출입대장에는 실험 참여자뿐 아니라 외부 참관인까지 각각 서명했다. 이전에는 소수의 관리자만 심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은 독립 기술자들이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안쪽에 들어가 모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출입 허가는 필요한 역할에 한정됐고, 기록은 공개할 수 있는 부분과 보호해야 할 부분을 나누었다.
“모라가 대답해 주면 정말 계약이 끝나요?” 경비대원 하나가 물었다.
“그렇게 간단하면 좋겠죠.” 진혁이 말했다. “대답을 듣는 건 출발이고, 계약을 고치는 건 우리 몫이니까요.”
경비대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심실을 위험한 지하 시설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그 시설 안에 자기 의견을 가진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진혁은 그 변화가 거창한 영웅의 승리보다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자는 정오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루크는 밤새 납땜을 한 듯 손가락에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미소가 있었다. 그는 상자 안의 장치를 꺼내며 말했다.
“이 기계는 말을 만들어 내지 않아. 신호를 기록하는 거지. 해석할 권리는 우리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마.”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란과 항만청 기술자가 먼저 장치를 검사했다. 가짜 신호를 주입하는 회로는 없었다. 모든 반응은 시간표와 함께 세 장의 독립 기록지에 남게 되어 있었다. 세리아는 처음으로 심실 안쪽에 앉는 대신 바깥 통로에서 대기했다.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얻고자 모라 앞에 서는 것이 부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르벤은 시의회 청사에서 자신의 주장을 발표했다. 그는 루멘이 모라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는 상태라면 전문 관리인에게 권리를 넘겨야 한다고 했다. 모라의 의사가 불분명하므로 과거 관리 계약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모두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도시의 방벽을 지키려면 어떤 형태로든 책임 있는 운영 주체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모라가 원하는 바와 도시의 책임을 구분하려 합니다.”
이사벨은 그렇게 대답하고 청자의 시험 결과를 기다렸다.
심실에서는 먼저 지난주와 동일한 신호 검증이 진행됐다. 종소리 세 번, 빛의 전환, 중단 요청 신호. 이번에는 청자에 기록이 남았다. 첫 두 신호에는 일관된 답을 볼 수 없었고, 세 번째에서 다시 두 번의 빠른 박동이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측정판을 보며 시간을 적었다.
“다음에는 누구의 중단을 묻습니까?”
미란이 물었다.
진혁은 두 가지 구분된 요청을 준비했다. 하나는 ‘지금 방벽에 필요한 최소한의 마력 흐름을 유지해도 되는가’, 다른 하나는 ‘외부 계약자의 명령에 따라 마력 출력을 늘려도 되는가’였다. 전자는 실제 출력을 바꾸지 않는 시험 신호였고, 후자는 오르벤이 제시한 관리 계획의 핵심이었다.
첫 요청에는 미약하지만 일정한 박동이 이어졌다. 두 번째 요청에서 모라는 갑자기 한 번 길고 거친 신호를 보냈다. 측정판의 바늘이 크게 떨렸다.
루크는 손을 들어 장치를 멈췄다.
“이걸 거절이라고 부를지는 아직 논의해야 해.”
진혁이 물었다. “하지만 두 요청에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건 기록할 수 있죠?”
“그렇지.”
그들은 같은 조건으로 반응을 여러 번 확인하려 했지만, 세 번째 시험 직전 외부 회로에서 갑작스러운 간섭이 발생했다. 누군가 청자와 연결된 보조 회선에 낯선 신호를 밀어 넣은 것이다. 루크는 즉시 주 전원을 차단했다. 공적 기록에는 ‘제삼자 간섭으로 시험 종료’가 적혔다.
모라의 심실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위협적인 어둠은 아니었다. 외부 명령을 끊자 박동이 서서히 느려졌기 때문이다. 항만청은 방벽 출력이 안정적이라고 보고했다.
헥터는 간섭 신호의 출처를 추적했다.
그가 펼친 경비 배치도에는 시계탑으로 가는 길이 세 개 표시되어 있었다. 손님들이 쓰는 중앙 계단, 정비공들이 쓰는 벽 안쪽의 나선 계단, 그리고 오래된 화물 승강기 위로 이어지는 비상 통로였다. 헥터는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뒤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지붕에서 누군가 도망치다 떨어져도 받아 줄 준비가 필요했다.
미란은 마지막으로 신호가 기록된 시간과 심실 반응의 시각을 비교했다. 초 단위의 차이가 뚜렷했다. 기계 간섭이 들어온 뒤 모라의 박동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있었지만, 앞서 기록한 모든 반응이 가짜라고 말할 근거는 없었다. 진혁은 두 부분의 기록을 색이 다른 봉투에 넣었다. 나중에 누군가 하나의 결과로 합쳐 주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발신점은 루멘의 오래된 옥상 시계탑이었다. 경매장 운영이 시작된 뒤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장소였다. 라일과 카렌이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헥터는 시계탑 아래의 시민 통행로를 먼저 비우도록 했다. 낡은 옥상에는 신호 증폭 장치뿐 아니라 떨어질 위험이 있는 기와가 많았다. 무턱대고 쫓으면 범인을 잡기 전에 길을 걷던 사람이 다칠 수 있었다. 경비들은 종탑 사다리 아래에 안전망을 설치했고, 지붕에서 누군가 떨어져도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나눠 배치했다.
진혁은 아래에서 경비와 통신을 맡았다. 그는 감정 판에 남은 발신 신호를 보고 옥상으로 향하는 은선을 추적했다. 손바닥 능력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기술자에게 간섭 장치가 아직 작동하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장치는 이미 멈췄지만 전원 일부가 남아 있었고, 선을 끊는 순서를 잘못 정하면 심실 회로로 잔류 신호가 흘러갈 수 있었다.
“여기를 먼저 끊어야 합니다.” 기술자가 말했다.
진혁은 헥터에게 해당 지점을 알렸다. 카렌과 라일이 범인을 뒤쫓는 동안 장치의 위험을 낮추는 일도 중요했다. 검을 잘 쓰는 사람과 기계를 아는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였을 때야 경매장의 손님과 직원들이 다치지 않았다.
시계탑 문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손잡이만 깨끗했다. 라일은 잠금장치에 새로운 긁힘이 있는 것을 봤다. 누군가 최근에 열었다는 뜻이었다. 카렌이 조심스럽게 문을 밀자 가느다란 은색 선이 안쪽 바닥으로 이어졌다. 그 선은 건물 외벽을 타고 심실 보조 회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역시 누군가 손댔군.” 카렌이 말했다.
그들이 줄을 따라가던 순간, 시계탑 안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났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작은 체구의 사람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일행을 보자 바깥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멈춰요!”
카렌이 외쳤다. 라일이 먼저 난간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비에 젖은 기와가 미끄러웠다. 라일은 무모하게 뒤따르지 않고 아래쪽 비상 사다리로 뛰었다. 도망자는 시계탑 외벽을 따라 내려가다 오래된 관측대에 착지했다.
그곳에서 헥터의 경비가 길을 막았다. 도망자는 체포되기 직전 주머니에서 종이 뭉치를 바다 쪽으로 던졌다. 카렌이 몸을 내밀어 일부를 붙잡았지만 몇 장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종이에는 제0호 감정사의 표식과 낯선 작업 지시가 적혀 있었다.
‘반응을 뚜렷하게 만들어라. 진짜 거부보다 선명한 거부를 만들어라.’
진혁은 그 문장을 듣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간섭을 보낸 사람은 오르벤에게 유리하게 만들려던 것일까. 아니면 모라가 거부한다는 증거를 너무 분명하게 만들어 조사단의 신뢰를 무너뜨리려 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 확보한 반응과는 분리해야 했다.
그는 이사벨에게 전언을 보냈다.
“시험 결과를 과장하지 말아 주세요. 실제 반응과 인위적 간섭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 보고해야 합니다.”
그날 심사장은 떠들썩했다. 일부 의원은 시험이 오염됐으니 결과 전체를 버려야 한다고 했고, 다른 의원은 바로 그래서 관리권 이전을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르벤은 침착하게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사벨은 어느 쪽에도 곧장 동의하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먼저 인정된 사실을 분리했다. 모라가 서로 다른 신호에 반응한 경향이 있다는 사실. 외부 간섭으로 시험 일부가 무효가 됐다는 사실. 과거 관리 계약이 당사자의 자유 의사를 얼마나 반영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 결과 단 한 가지 결정은 가능했다.
최종 운영권 이전은 보류한다.
결정문이 낭독될 때 시민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어떤 사람은 즉시 환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왜 박수를 치느냐고 속삭였다. 세리아는 두 의견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모라는 여전히 심실에 연결되어 있었고, 방벽 대체 장치는 공사 일정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새로운 소유권을 등록하는 일만큼은 막았다.
오르벤의 변호인은 정식 이의 신청 가능성을 언급했고, 이사벨은 그 권리도 기록했다. 진혁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절차가 적용되어야 했고, 그래야 모라를 보호하는 결정 역시 누군가의 기분에 따라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옳은 결과를 얻으려는 사람에게도 규칙이 필요한 이유였다.
카렌은 의자에 앉아 아버지의 도면 복사본을 접었다. 레온의 의도를 완전히 안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무엇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는지 조금은 이해했다. 안개 너머에서 항구 종이 울렸다. 대피 경보가 아닌 정오 시각을 알리는 평범한 종이었다.
그러나 시의회는 더 긴 기한을 연장하지 않았다. 남은 기간 안에 항만 방벽의 안전 대책과 모라 보호 방안을 함께 제출하라고 했다. 진혁은 그 결정이 승리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모라가 오늘 무언가를 거절했을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어떻게 법으로 적어야 할지 몰랐다.
심실 밖에서 세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진혁은 오래 생각한 뒤 대답했다.
“모라가 알아서 우리 대신 답을 써 주길 기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듣는 건 첫 번째 일이고, 들은 뒤 책임지는 건 저희 몫이겠죠.”
그날 밤 체포된 시계탑 침입자의 소지품에서 얇은 금속 열쇠 하나가 발견됐다. 오르벤이 위탁하려던 청동 열쇠와 크기도 재질도 달랐다. 대신 열쇠 머리에는 아흔여덟 번째 의자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진혁의 감정 보조판에 한 문장이 나타났다.
[제998호 원부: 비상 보존 출입권.]
[현 사용자 명부: 공란.]
새로운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제3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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