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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37화
PAYLUA ORIGINAL · 제37화

37화.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686자

오프라인 책장
카렌은 아버지의 필체를 보고도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항만청 지하의 문서실은 낮에도 축축했다. 창문이 없는 대신 천장에 작은 공기 구멍을 냈고, 책장 사이마다 석회 덩어리를 놓아 습기를 잡았다. 오래된 양피지와 새로 바꾼 기록지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도면 위에는 희미한 물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잉크의 끝이 갈라지는 습관은 분명 레온의 것이었다. 카렌은 아버지가 집에서 편지를 쓸 때도 마지막 글자에 힘을 주던 모습을 기억했다. 어린 자신이 활자를 따라 그리면 레온은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웃곤 했다. ‘검을 쥘 때만큼 펜을 쥘 때도 조심해라. 한 줄 잘못 쓰면 남의 인생이 다친다.’ 그때는 엄한 잔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이게 그날 작성된 겁니까?” 카렌이 물었다. 아벨은 기록 접수일과 도면 제작일을 구분해 설명했다. 문서실은 십이 년 전 정리 작업을 하면서 자료를 옮겼고, 작성 시기는 도면의 물성 조사로만 대략 추정할 수 있었다. 레온이 언제 어디서 이 문장을 적었는지는 별도 조사가 필요했다. “말투는 아버지답네요.” 카렌이 말했다. “중요한 말을 꼭 누군가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하셨어요.” 진혁은 그녀 옆에서 기록을 읽었다. 도면에는 복잡한 회로보다 네 개의 빈칸이 더 눈에 띄었다. ‘요청’, ‘대상 반응’, ‘중단 가능 여부’, ‘독립 확인’. 앞의 세 칸에는 조개 모양의 작은 신호판이 그려져 있었고, 마지막에는 아흔여덟 번째 의자와 같은 둥근 무늬가 있었다. “원래 장치는 모라가 싫다고 하면 멈출 수 있도록 설계했나 봐요.” “그런데 지금은 왜 반응을 모르는 겁니까?” 미란이 물었다. 진혁은 한참 생각하다 답했다. “의사 표현을 듣는 부분만 사라졌을 수도 있죠. 혹은 남아 있는데 저희가 그 언어를 모르는 거고요.” 카렌이 도면 뒷면을 펼쳤다. 흐린 잉크로 낯익은 말이 쓰여 있었다. ‘바다를 빌리는 자는 물이 돌아갈 길을 막지 말 것.’ 그 문장은 어부들의 오래된 격언이었다. 바다 위에서 살아남으려면 해류를 거슬러 싸우기보다 퇴로를 남겨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레온은 그것을 모라에게도 적용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조사단은 다음 날 루멘 심실에서 비강제 반응 검증을 진행하기로 했다. 거대한 결론을 내기 위한 실험은 아니었다. 일정한 소리와 빛을 주고, 모라가 언제 어떤 반응을 하는지 충분히 기록한 다음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지 비교하는 과정이었다. 도시 방벽에는 우회 출력 회선을 붙였고 항만청은 만약의 경우 점검을 중단할 수 있도록 안전 신호를 준비했다. 실험을 앞둔 저녁, 카렌은 동생 이안의 집에 들렀다. 마레온 남부의 작은 골목에는 빨랫줄이 건물 사이로 이어졌고, 빵을 구운 냄새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이안은 치료받은 손목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예전처럼 웃고 있었지만 큰 소리가 나면 잠깐 어깨가 움츠러들곤 했다. “누나, 나 이제 짧은 운반 일은 할 수 있대.” “치료사가 허락했어?” “응. 무거운 건 아직 안 되고.” 카렌은 식탁 위에 국을 내려놓았다.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물었다. “아버지 기록을 또 찾았어?” “응.” “살아 있을까?” 카렌은 쉽게 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매일 같은 질문을 했다. 그 질문에는 답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아직 모르겠어. 그렇지만 왜 그곳에 갔는지는 조금씩 알 것 같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누나에게 무조건 아버지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남은 국을 작은 그릇에 덜어 주었다. “그럼 오늘은 밥부터 먹어.” 그 말에 카렌은 웃었다. 조사실에서 어떤 문서보다도 쉽게 자신을 붙잡는 말이었다. 카렌은 동생이 숟가락을 잡을 때마다 손목을 조심히 쓰는 모습을 보았다. 이안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국그릇을 들다 잠깐 손을 내려놓았다. 구출된 이후에도 몸이 기억하는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카렌은 도와주겠다고 먼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동생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 언제나 친절은 아니었다. 이안은 천천히 국그릇을 옮긴 뒤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해 볼게.”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에게 거절할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동생에게는 모든 일을 대신해 주려고 한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그녀는 물컵을 동생 가까이 밀어 놓았다.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그러나 억지로 받지는 않도록. “그런데 누나는 언제 쉬어?” 이안이 물었다. “이번 조사가 끝나면.”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누나는 어릴 때도 숙제가 끝나면 쉬겠다고 해 놓고 다음 숙제를 찾았잖아.” 카렌은 웃었다. 가족은 그녀의 거짓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튿날 심실에는 작은 긴장이 흘렀다. 심실에서 보내는 신호를 두 종류로 분리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같은 종소리라도 벽과 관의 울림 때문에 모라에게 도달할 때는 모양이 달라졌다. 미란은 신호가 들어가는 관과 나오는 관의 시간차를 측정했고, 헤르만은 전날 야간 점검에서 관 압력이 평소보다 높았다는 기록을 보여 줬다. 그 차이를 무시하면 모라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 기계가 울린 것을 대답으로 착각할 수 있었다. “원인을 하나씩 빼야 해요.” 미란이 말했다. “사람 목소리도 방마다 다르게 들리잖아요.” 진혁은 그 말을 듣고 감정의 원리를 떠올렸다. 눈앞에 떠오르는 본질 감정 문구는 매우 유용했지만, 어떤 물건이 언제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늘 다 보여 주지는 않았다. 보조 감정으로 원인을 확인하고, 기록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이 같은 결과를 내는지 살피는 일이 필요했다. “능력을 무작정 쓰지 않으니까 손이 덜 아프죠?” 카렌이 물었다. “네. 그런데 그 대신 머리가 아픕니다.” “차라리 낫네요.” “뭐가요?” “손은 아직 낫는 중이잖아요.” 진혁은 뜻밖에 다정한 말에 잠깐 대답을 잃었다. 마침 미란이 계측기의 바늘을 가리켰고, 그는 고맙다는 말을 놓친 대신 수치를 적었다. 카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놓치지는 않았다. 방벽 담당자들은 한쪽 벽에 임시 회선을 붙였고, 의료술사는 감정사의 손과 기술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세리아는 실험 계획을 공지했다. 모라가 반응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결과라고 기록하고, 어떤 경우에도 반응을 강제로 끌어내지 않겠다고 했다. 첫 신호는 세 번의 낮은 종소리였다. 모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유나의 편지에 쓰인 ‘조개 세 개’라는 신호였다. 심실의 빛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세 번째는 회로 일부의 작동 중단을 요청하는 표준 신호였다. 그때 모라의 박동이 정확히 두 번 빨라졌다. 미란은 숨을 죽이고 측정판을 읽었다. “반복해 볼까요?” “잠깐만요.” 진혁이 말했다. “그다음에는 반대되는 요청도 시험해야 합니다. 같은 반응이면 단순한 자극일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충분히 쉬었다가 ‘계속 작동할까요’라는 뜻의 다른 표준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는 박동이 느려졌다. 세 번 반복해도 완전히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었다. 방벽 출력의 변동과 심실 온도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중단’과 ‘유지’ 요청에 모라가 다르게 반응할 가능성은 나타났다. “이건 아직 언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미란이 말했다. “그래도 구분해야 할 신호가 생겼네요.” 그 순간 지하에서 오래된 쇠판 하나가 스스로 움직였다. 판에는 조개 모양의 작은 구멍이 세 개 있었다. 세리아는 그것을 보고 옛날 일을 떠올렸다. 유나가 실험을 할 때마다 빈 식탁에 조개 세 개를 놓았던 것이다. 하나는 묻는 사람, 하나는 답하는 사람, 하나는 서로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사람을 뜻했다. “유나는 기술이 아니라 대화를 만들려 했던 거야.” 그녀가 말했다. 모라의 반응은 이번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벨의 기록 수정에는 새 문장이 추가됐다. ‘모라의 의사 반응을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 독립 검증 전까지 소유권 주장에 사용 불가.’ 루멘 바깥의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경매장 앞에서는 방벽 자금이 줄까 걱정하는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오르벤의 회사에서 배포한 전단을 든 사람도 있었다. 전단에는 모라가 자유로워지면 항구 방벽이 무너질 거라고 적혀 있었다. 진혁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항구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돈이 많은 경매 손님이 아니라 낮은 곳에 사는 일꾼과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모라의 자유와 안전을 서로의 적처럼 만들어서는 안 됐다. 공개 설명회를 준비하면서 루멘은 심실을 구경하겠다는 요구를 거절했다. 모라가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야 한다는 이유로 당사자의 동의 없이 몸을 보여 줄 수는 없다는 결정이었다. 대신 기술자들이 사진 대신 개략도를 만들어 가져왔다. 흐르는 물의 양과 방벽 공급량, 비상시 대체 가능한 설비의 용량이 서로 다른 색의 선으로 표시돼 있었다. 마틴 어부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마지막 줄에 앉았다. 그의 배 파도새호는 아직 위조 인양권 사건의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일에만 집중할 수도 있었지만 방벽이 불안정해지면 다음 폭풍에 모든 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돈을 조금씩 내면 되는 겁니까?” 그가 물었다. 이사벨은 간단한 답을 주지 않았다. 현재 방벽 중 일부는 모라와 연결되어 있고, 대체 장치를 만드는 비용은 일시금과 지속 관리비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누구에게 얼마를 부담시킬지는 예산 심의를 거쳐야 했다. 마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적어도 결정을 누가 어떻게 내리는지 알게 됐다. 진혁은 자료를 넘기며 가슴이 답답했다. 진심을 담은 말만으로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배의 보험료와 하루 식비를 계산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숫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루멘 회계 장부의 일부를 공개하고, 그동안 모라의 도움으로 절약한 유지비를 독립 회계사에게 검토받기로 했다. 어려운 숫자가 오히려 믿음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 설명회장 뒤편에서 라일은 마을 아이들과 종이배를 접었다. 긴 회의를 기다리기 지루해하는 아이들에게 종이배 경주를 열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아이 하나가 제일 빠른 배에는 금화 한 닢을 달라고 했고, 라일은 즉시 조건을 확인하겠다고 농담했다. “또 계약 얘기예요?” 아이가 물었다. “좋은 계약도 있어. 서로 무엇을 할지 미리 약속하는 건 나쁘지 않거든.” “그럼 일등 하면 금화 줘요?” “상금은 따뜻한 쿠키 두 개.” 아이들은 항의했지만 결국 쿠키 쪽을 택했다. 라일은 스스로 만든 배가 가장 먼저 가라앉는 것을 보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짧은 웃음소리에 딱딱한 분위기의 주민들도 입가를 풀었다. 사람들이 걱정 속에만 모이면 가장 어려운 질문을 끝까지 듣기 힘들다는 사실을 라일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열린 공개 설명회에서 그는 커다란 도면 앞에 섰다. “지금 당장 모라를 떼어 내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도 모라를 강제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중단 권한을 만들자는 겁니다. 방벽은 별도의 설비와 공동 관리로 안전을 확보해야 합니다.” 한 상인이 소리쳤다. “그 비용은 누가 냅니까?” “그래서 회계 자료를 공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라가 무상으로 담당한 비용도 포함해서요.”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 공짜라고 생각했던 방벽 마력에도 누군가의 부담이 있었다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설명회가 끝난 뒤 헥터가 진혁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북부 부두의 어린 심부름꾼이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안에는 낡은 검집의 얇은 금속판이 들어 있었다. 금속판에는 레온이 그렸던 회로의 마지막 부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대답을 듣게 하고 싶다면, 증인이 아니라 청자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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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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