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회 청사 앞에는 오전부터 사람들의 마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항만청의 방벽 예산 심사와 루멘의 보호 계약 재심사가 같은 날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청사 기둥에는 소금기가 섞인 바람을 막으려고 천막이 둘러쳐져 있었고, 출입문 양옆에는 경비가 서류 가방과 무기 휴대 여부를 검사했다. 누군가는 시의회가 항구를 더 안전하게 만들기를 바랐고, 누군가는 올해 세금이 얼마나 늘어날지만 걱정했다. 시민들이 의견을 내는 날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이유로 모이는 것은 아니었다.
진혁은 기다리는 동안 청사 앞 빵집에서 검은 보리빵을 사 먹었다. 손의 붕대는 전날보다 얇아졌지만 열이 오르면 다시 따끔거렸다. 카렌이 그의 빵을 보더니 인상을 썼다.
“또 그것만 먹어요?”
“식사비를 절약해야 합니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비싼 유물의 값을 알아봐도 자기 몸에는 값을 못 매기는군요.”
그녀는 삶은 달걀 하나를 그의 손에 쥐여 줬다. 라일은 그 광경을 보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저한테는요?”
“당신은 아까 빵 두 개 먹었잖아요.”
“그건 과거의 저고 지금은 다른 사람입니다.”
라일이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청사 문이 열렸다. 이사벨은 셋을 증거 검증실로 안내했다. 새 신청인은 아직 대중 앞에 나오지 않았고, 자신을 ‘제7봉인 관리권의 최종 승계인’이라고 소개한 문서를 먼저 냈다고 했다. 이름은 오르벤 칼스트. 마레온에 여러 창고를 소유한 투자 관리인이었다.
“그 사람이 검은 인장 상회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사업 관계는 확인되지만 불법 행위의 공모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어요. 유리섬의 벨로크와 돈을 주고받은 기록은 있어도 거래 목적을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이사벨은 변호인 참석하에 문서가 공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의회는 절차를 무시할 수 없었다. 상대가 수상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신청을 기각하면 정작 모라를 지키려는 결정마저 나중에 무효가 될 수 있었다.
심사장으로 향하는 복도에서는 항만민원 담당 서기들이 작은 상자를 안고 뛰어다녔다. 관리 계약 하나의 심사지만 그 내용에는 방벽 운영비, 항만 보험, 피난 계획, 경매장 고용 인력의 임금까지 얽혀 있었다. 항구의 보험조합에서는 모라의 마력 공급이 중단되면 누구에게 손실 책임이 돌아가는지 물었다. 방벽 정비 노동자 조합은 대체 시설을 설치한다면 새로운 교육과 안전 장비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진혁은 회의 자료 맨 위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모라 원권리자 확인.’ 그 한 줄만 읽으면 문서 하나를 찾으면 끝날 사건 같았다. 하지만 시민들이 실제로 묻는 것은 조금 달랐다. 내일 파도가 높으면 누가 경보 종을 울릴 것인가. 화물을 잃은 어부에게는 누가 보상할 것인가. 그리고 심실에 있는 생명은 동의하지 않은 일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가.
카렌은 방청석 끝에 앉은 사람을 알아봤다. 소금 계단에서 계약서에 서명하려다 멈췄던 하역꾼이었다. 그는 생활비 지원 신청서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오늘은 돈을 달라고 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왜 유혹에 빠졌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 사람도 증인으로 부를까요?” 진혁이 묻자 이사벨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심사는 소유권 증빙 심사니까요. 대신 별도 공개 토론회 진술로 받을 겁니다. 관련 있다고 모든 사건의 절차를 뒤섞으면 오히려 당사자를 보호하기 어려워져요.”
진혁은 또 하나를 배웠다. 정의로운 결론을 원한다고 해서 아무 방법이나 사용할 수는 없었다. 심사장은 경매대와 달리 박수의 크기로 판정하지 않는 곳이었다.
심사장은 오래된 극장처럼 생겼다. 계단식 나무 의자 앞에 둥근 심사대가 있고, 천장에는 햇빛을 분산하는 유리판이 달려 있었다. 방청석에서는 건조한 종이 냄새와 젖은 외투 냄새가 뒤섞였다. 진혁은 뒤쪽에서 세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늘 경매장의 사장이었지만 오늘은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증인으로 앉아 있었다.
오르벤의 등장에는 작은 연출이 따라붙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손에 든 서류를 가지런히 정렬했다. 때때로 방청석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도 누구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런 태도는 듣는 사람에게 이 사람이 이미 모든 답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진혁은 그 인상을 경계했다. 말투가 침착하다고 주장까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질문할 항목을 세 가지로 나누어 적었다. 기증과 소유는 다른가. 증서가 실제로 원본인가.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모라를 대신해서 동의할 자격이 있는가. 셋 중 하나만 증명되어도 나머지 둘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카렌은 그 종이를 보고 작게 끄덕였다. 레온이 남긴 검사 기록에도 언제나 질문이 먼저 있었다. 검을 가진 사람을 의심한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오래된 가르침이었다.
오르벤은 은빛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넘긴 중년 남자였다.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고, 손목에는 귀한 시계를 찼다. 그는 인사를 건네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자기 말이 한 문장씩 기록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처럼 천천히 말했다.
“제 증조부는 루멘의 심실 회로를 복구한 사람입니다. 당시 관리권을 받은 가문이 저희 집안입니다. 저는 그것을 입증할 원본 증서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제시된 증서는 낡은 양피지였다. 중앙에는 일곱 갈래 선이 둥글게 얽힌 제7봉인의 문양이 있었다. 심사장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세리아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진혁은 양피지를 바로 만질 수 없었다. 원본 감정은 신청인과 시의회가 공동 승인해야 했고, 오르벤은 서류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에게만 열람권을 줄 이유가 없다며 버텼다. 이사벨은 공증법상 원본의 물성 확인을 거절하면 그 자체로 효력이 약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긴 협의 끝에 심사대 유리함 안에서 관찰만 할 수 있게 됐다.
“감정할 수 있겠습니까?”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부터요.”
진혁은 돋보기로 증서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양피지의 가공 방식은 오래되어 보였다. 그러나 인장 주변의 붉은 도료는 유난히 매끄러웠다. 새 도장을 찍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낡은 도료 위에 보호제를 입혔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사벨에게 빛의 각도를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제7봉인 문양의 일곱 번째 선은 다른 여섯 선과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원래 도장은 누가 보관했죠?” 진혁이 물었다.
오르벤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이 관리권을 가진 가문의 비밀입니다.”
“그럼 심사관이 그 비밀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밀을 유지하면서 권리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비밀이라는 이유로 근거가 없어져도 되지는 않으니까요.”
방청석에서 작은 웃음이 났다. 오르벤은 웃지 않았다.
진혁은 공개 기록에서 더 오래된 문양을 찾아달라고 했다. 아벨이 유리섬 보존실에서 확보한 서명 장치 사진을 제시했다. 둘을 나란히 놓자 다른 점이 뚜렷해졌다. 유리섬의 제7봉인은 일곱 번째 선의 끝이 비어 있었다. 열쇠나 관리자 하나가 나머지 모두를 대신하도록 고안된 문양이 아니라, 아직 확인되지 않은 권리자를 위한 빈자리였다. 반면 오르벤의 증서는 빈자리를 완전히 채워 놓았다.
“서류가 다르군요.” 심사관이 말했다.
오르벤의 변호인이 반론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관리 양식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 자체는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진혁은 증서가 가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원본 제7봉인을 입증하기에는 비교 자료가 부족하다는 감정 의견서를 냈다.
오르벤은 진혁을 바라보다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서진혁 씨라고 했죠? 저는 당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저희 회사에 오시면 지금 받는 급여의 열 배를 드리겠습니다.”
순간 라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카렌은 팔짱을 꼈다. 진혁은 한동안 오르벤을 바라봤다.
“제 급여를 아십니까?”
“대략은요.”
“그렇다면 회계 자료를 어디서 얻었는지도 확인해야겠군요.”
심사장 뒤에서 헥터가 메모를 시작했다. 오르벤은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군요.”
“월급 이야기에서 농담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
오르벤의 신청은 그날 승인되지 않았다.
심사장이 비는 동안 오르벤의 보좌관은 방청석 끝으로 가 누군가에게 명함을 건넸다. 진혁은 그 사람이 소금 계단에서 금화 오백 닢 계약서를 나눠 준 인쇄소 직원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사람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증거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헥터에게 확인된 방문 기록과 출입 시각을 따로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방청석에서는 한 노인이 계약서를 다섯 번이나 뒤집어 보고 있었다. 노인은 루멘 창고를 수리했던 기술자로, 서류의 ‘원권리자’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는 그때 심실에서 나오는 물이 부식되지 않도록 관을 갈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생명 하나를 샀다는 말을 하진 않았어요.”
카렌은 그 진술을 받아 적었다. 누군가 기계를 고친 사실과 생명체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실은 이어 붙일 수 없는 두 이야기였다. 진혁은 오래된 인장의 어긋난 선을 다시 떠올렸다. 작은 차이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었다. 시의회는 보충 감정과 가문의 권리 이전 기록 제출을 요구했고, 보호 계약 심사 기한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사벨은 상호 합의 없는 임시 소유권 등록을 금지하는 보전 조치를 신청했다. 그러나 오르벤은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심사를 마친 뒤 세리아는 청사 회랑에 잠시 남았다. 그녀는 오르벤의 성을 듣는 순간 오래전 유나가 보여 줬던 공방 후원 명단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 명단에는 칼스트 가문에서 심실의 냉각 부품을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부품을 제공했다고 생명체의 주인이 될 수는 없지만, 누가 돈을 냈는지 감추면 상대의 거짓 주장을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일 수 있어.”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 사실까지 부정할 생각이 없어.”
“사장님은 이제 확인되지 않은 걸 확인된 것처럼 말하지 않으시네요.” 진혁이 대답했다.
세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계속 잔소리하니까.”
그녀는 카렌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시민들은 건물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세리아는 한때 그 사람들이 루멘에서 벌어들이는 돈에 관심이 많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돈으로 밥을 먹는 노동자와 방벽 아래 집을 둔 가족의 얼굴이 조금씩 보였다. 오래된 경매장에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일이 유나와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카렌이 물었다.
“모라에게는 늦었을 수도 있어. 그래서 더 빨리, 그러나 틀리지 않게 해야지.”
청사 밖에서 진혁은 그가 검은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장갑을 낀 손이 문 손잡이에 닿을 때 손등 아래의 화상 자국이 잠시 드러났다. 아주 작고 오래된 상처였다. 모양은 구리 반지의 열쇠 구멍과 닮았다.
진혁은 깜짝 놀랐지만 그 자리에서 상대를 쫓지 않았다. 1화에서 구리 반지를 가져간 노인도 비슷한 자국이 있었다. 같은 장치로 생긴 상처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같은 사람이나 한 조직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라일이 옆으로 다가왔다. “지금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아요.”
“뭔데요?”
“저 양반 집에 들어가서 서류를 훔쳐 오면 훨씬 빠를 거라는 생각.”
“절대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들켰을 때 제가 변호사 비용 내야 하잖아요.”
카렌이 둘 사이에 들어섰다. “이번에는 영장과 공개된 증거로 합시다.”
진혁은 시의회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제각기 서류를 들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누군가는 그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다. 그때 모라에게는 말을 전할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오르벤의 회사가 루멘에 정식 경매 의뢰서를 보냈다. 위탁품은 오래된 청동 열쇠 한 개. 설명란에는 짧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모라가 숨긴 첫 번째 출구를 여는 열쇠.’
제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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