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섬에서 마레온으로 돌아오는 배는 새벽 물때를 기다려야 했다.
겨울이 가까워진 항구의 밤은 길었다. 선착장 돌계단마다 소금기가 하얗게 말라 있었고, 바람을 피해 걸어 놓은 등불은 유리 덮개 안에서 작은 벌레처럼 떨렸다. 서진혁은 두툼한 외투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전날 뜨거워진 오른손 바닥에는 의사가 발라 준 연고가 남아 있었다. 감정사의 손을 쉬게 하라는 지시를 들은 지 불과 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앞에는 이미 새 감정품이 놓여 있었다.
마을 회관에서 회수한 봉투였다. 받는 사람은 루멘 경매장 사장 세리아. 보내는 사람은 유나.
“열면 안 되는 편지도 있나요?”
선실 맞은편에서 카렌이 물었다. 그녀는 검을 무릎 사이에 세워 두고 젖은 머리카락을 묶고 있었다. 유리섬의 밤샘 조사로 눈 아래 그림자가 짙어졌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열 수는 있죠. 다만 ‘누가 언제 어떤 상태에서 열었는가’가 나중에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 말투는 사장님에게도 하세요. 혼자 개봉했다가 후회하지 않게.”
“제가 살아남으면요.”
카렌이 눈썹을 올리자 진혁은 얼른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사장님은 제가 그보다 훨씬 비싼 실수도 하는 걸 용서하셨거든요. 월급에서 제하고요.”
배 뒤편에서는 라일이 선장과 어선의 매듭 묶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훔쳐 온 밧줄 대신 정식으로 빌린 밧줄을 돌려주며 영수증까지 받아 적는 모습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라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영수증을 코앞에 흔들며 말했다.
“보셨습니까? 저는 이제 합법적인 인간입니다.”
“어제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선실 설탕통이 왜 없어진 겁니까?”
“바다가 흔들어서 제 주머니에 들어왔습니다.”
“바다는 참 재능이 많군요.”
두 사람의 말다툼에도 카렌의 시선은 봉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유나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 레온의 목소리가 남아 있던 유리섬의 빛기둥에서, 그 젊은 여성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레온, 그 문은 닫으면 안 돼. 안쪽에 아직 사람이 있어.’
루멘에 도착한 것은 해가 창고 지붕 위로 걸릴 무렵이었다. 경매장 정문 앞에서는 벌써 사람들이 번호표를 받고 있었다. 북부 던전에서 나온 철갑게 껍질, 서부 산맥의 화염석, 침몰선의 청동 종이 이날 오전 일반 위탁품이었다. 시장의 기대와 달리 그 물건들은 대단한 전설을 품고 있지 않았다. 짐수레 바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 계산원의 주판알 소리, 마차를 세우라는 경비의 호각 소리가 루멘을 하루 더 살아 있는 사업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진혁은 경매장 바닥 아래에서 뛰는 낮은 박동을 느꼈다.
모라.
지난번에는 그 박동이 건물 전체를 삼킬 듯 두려웠다. 지금은 누군가 잠들지 못한 채 천장 너머 발걸음을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멘의 경리 담당 벨라는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출항 확인서를 내밀었다. 유리섬으로 간 조사비는 공적 예산과 경매장 자체 예산을 나눠 정산해야 했고, 선장에게 지급한 야간 대기료는 승선 인원과 시간이 맞아야 했다. 실종된 노동자를 되찾고 이름 표지 여섯 개를 지켜 낸 모험이었지만 회계 장부에는 선박 사용료, 축전석 점검비, 간이 의료비라는 건조한 항목으로 남았다.
“이번에 식사비는 세 명분이 맞나요?” 벨라가 물었다.
진혁은 라일을 흘끗 보았다. “네 명분입니다. 라일이 두 사람 몫을 먹었습니다.”
“세 명이었잖아요.”
“왜요? 마지막 생선 꼬치는 바닷새가 먹었다고 우기실 겁니까?”
라일은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벨라는 장부 아래에 ‘식대 기준 초과’라고 적다가 결국 웃었다. 직원들이 농담을 나눌 수 있을 만큼 루멘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경매장 대홀에서는 다음 달 위탁 일정을 조정하는 회의가 이어졌다. 최근의 사건 때문에 항구 밖 상인들이 계약을 취소한다는 전언도 들어왔다. 세리아가 사적인 감정에 흔들리더라도 직원과 손님의 생활이 함께 흔들릴 수 있었다. 진혁은 그 생각에 이르러 봉투를 더 조심스럽게 들었다. 이 편지는 누군가의 과거이자 지금 일하는 수십 사람의 미래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세리아는 이층 사무실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평소처럼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차를 따르는 손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진혁이 증거 봉투를 꺼내기 전에 그녀가 먼저 물었다.
“유나 이름이 맞아?”
“봉투에는 그렇게 적혔습니다. 하지만 이름과 발신인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알아.”
그녀가 짧게 답했다. 너무 빨리 대답하는 사람은 가끔 이미 수십 번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해 본 사람이다.
이사벨 감찰관과 아벨 공증인이 한 시간 뒤 도착했다. 봉투는 유리섬 마을 기록원, 시의회, 루멘이 각각 서명한 임시 봉인 안에 들어 있었다. 아벨은 책상 한편에 방습 천을 펴고 봉인 상태를 그렸다. 이사벨은 분 단위로 시간을 기록했다. 진혁은 그제야 유리섬에서 가져온 피로가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한 사람의 가슴 아픈 기억이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의 장사 도구가 되지 않게 할 절차가 있었다.
“봉투 자체의 마법 감정은 하지 마세요.” 이사벨이 말했다. “피부에 인장이 남았잖아요.”
“겉면의 물성만 보겠습니다. 내용은 눈으로 확인하죠.”
진혁이 장갑 낀 왼손으로 편지 가장자리를 비췄다. 보통의 종이는 파란 검사광 아래에서 펄프의 결이 드러난다. 이 봉투에서는 유리섬 기록관이 쓰는 방습 수지가 아주 얇게 빛났다. 그러나 접힌 선 위에는 최근에 바른 풀 자국이 두 개 겹쳐 있었다.
“오래된 봉투에 최근 새로 봉한 흔적이 있어요.”
세리아가 숨을 들이켰다. 아벨이 봉인의 왼쪽 가장자리만 잘라 내용물을 꺼냈다. 편지는 낡은 종이 한 장과 신선한 종이 한 장으로 나뉘었다. 낡은 종이에는 작은 손글씨가, 새 종이에는 인쇄한 듯 반듯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낡은 편지의 첫 줄을 세리아가 읽었다.
‘세리아. 네가 이걸 읽는 날까지 루멘이 서 있다면, 우리는 전부 틀린 것은 아닐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유나는 세리아의 동생이 아니었고, 연인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십삼 년 전 루멘이 화재를 겪었을 때 경매장의 최초 공적 보존 규칙을 만들던 동료였다. 세리아는 경매 운영을, 유나는 심실과 기록 보존 설계를 맡았다. 견습생 시절부터 붙어 다닌 둘은 커다란 일을 해내면 새벽 항구에 나가 싸구려 생선 수프를 먹곤 했다. 유나는 젓가락을 쓰지도 못하면서 세리아가 먹을 생선을 먼저 발라 놓았다. 싸운 다음 날에는 꼭 빵집에서 설탕이 가장 많이 묻은 것을 사 들고 왔다.
세리아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편지의 두 번째 문장 때문이었다.
‘부디 기억해. 모라에게 주인이 필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사무실 시계추 소리만 들렸다.
“이 필체는 제가 알던 유나의 것과 같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진짜 편지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 베껴 쓸 수도 있으니까.”
아벨은 낡은 종이의 먹색을 먼저 기록했다. 세리아가 즉시 문장을 읽었다고 해서 이 종이가 십삼 년 전에 쓰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종이 결은 예전 방식이었지만 접힌 선 가운데 한 줄은 최근에 눌린 흔적이 있었고, 오래된 봉투의 바깥면에는 바닷물에 젖었다가 마른 얼룩이 있었다. 오히려 두 시간대를 구별할 수 있는 그 불일치가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카렌은 유나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세리아의 손이 멈추는 것을 봤다. 자신도 레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러나 자기가 아버지의 흔적 앞에서 서둘렀던 일을 떠올리자 세리아에게 확인되지 않은 희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 이 글씨를 아는 다른 사람도 있습니까?” 카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시 보존 연구실 직원들은 대부분 떠났어.” 세리아가 답했다. “한 명은 산악 도시로, 두 명은 항구 밖으로. 이름과 마지막 근무지를 기억해. 그 사람들 중 누가 원본을 본 적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이사벨은 즉시 면담 요청서를 작성했다. 편지를 믿을지 말지 결정하는 데 필요한 일이 하나 늘어났다.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잉크가 마르도록 기다렸다. 오래전 같았으면 사람을 보내기 전에 자신의 기억을 먼저 믿었겠지만 이제는 증언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확인을 기다리는 편이 더 어려우면서도 올바른 일이라는 걸 알았다.
새 종이에는 장소 하나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북부의 소금 계단. 새벽 종이 두 번 울리기 전. 모라의 첫 증인을 데려와라.’ 끝에는 검은 원 모양이 찍혀 있었다. 제0호 감정사의 표식과 닮았다.
진혁은 입술을 다물었다. 낡은 편지와 새 종이의 지시가 한 봉투에 들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수상했다. 유나의 말로 보이는 구절은 모라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최근의 글은 누군가를 특정 장소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편지를 두 개로 나눠 취급해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증거도 두 개, 의도도 두 개. 누가 넣었는지 아직 몰라요.”
카렌이 책상 끝의 지도에 소금 계단을 표시했다. 그곳은 오래된 해수 배수관과 연결된 북항 보수 통로였다. 낮에는 생선 염장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지만 새벽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근처 창고에는 스물네 시간 감시자가 없는 대신, 항만청 점검 종소리가 물때마다 두 차례 울렸다.
“함정일 수 있어요.”
“예.” 진혁이 말했다. “그래서 가더라도 공개된 조사로 가야 합니다.”
세리아는 여전히 낡은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문장 사이를 따라가다가 맨 아래에 적힌 작은 단어를 발견했다.
‘조개 세 개.’
그것은 두 사람이 다투고 화해할 때 쓰던 암호였다. 세리아가 먼저 조개를 하나 그리면 유나가 두 개를 그려 답했다.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세 개를 그린 날에는 상대가 어떤 변명도 묻지 않기로 했다.
세리아는 그 암호가 생긴 날을 아직도 기억했다. 루멘에 불이 났던 해, 견습 직원들이 밤새 창고 물품을 옮기던 때였다. 유나는 서류 보관실의 작은 유리병들을 구하려다 팔을 데었고, 세리아는 왜 사람보다 물건을 먼저 챙기느냐며 화를 냈다. 다음 날 유나는 조개 두 개가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하나는 네가 잃지 않은 사람의 몫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살려 낸 기록의 몫이라고 했다. 그때 세리아가 조개 하나를 더 넣었다. 서로 사과할 길을 하나 더 마련해 놓자고.
그 기억은 유나의 생존을 입증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아에게 무엇을 되돌려야 할지 알려 주는 데는 충분했다. 그녀는 편지의 잉크 냄새를 맡지 않았다. 종이를 가슴에 품지도 않았다. 슬픔의 힘으로 증거를 손상시키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신 종이 앞에 앉아 유나가 자기 앞에 있었더라면 가장 먼저 물었을 질문을 조용히 떠올렸다.
‘그동안 모라를 잘 돌봤니?’
세리아는 그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답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에 제가 유나에게 소리쳤어요.” 세리아가 말했다. “모라 때문에 도시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 셈이냐고. 사람을 지키려면 가끔은 계약에 묶어야 한다고. 유나는 계약보다 먼저 묻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죠.”
그녀가 종이를 놓았다.
“그날 유나는 사라졌어요. 그래서 줄곧 제가 틀린 쪽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혁은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감정서를 쓰는 일이었다면 ‘미확인’이라는 말을 적으면 됐다. 그러나 지나간 날의 후회에는 그런 칸이 없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죠. 유나 씨가 실제로 무엇을 원했는지 확인하려면, 먼저 누가 지금 그 말을 이용하는지 알아야 해요.”
창문 아래에서 경매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세리아는 조금 웃었다.
“오늘 경매는 자네 없이 진행하지. 손 치료받는 사람을 또 부려 먹었다고 기록에 남기긴 싫어.”
“그럼 병가 수당은…”
“서진혁.”
“아닙니다.”
그러나 진혁이 사무실을 나서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경비대장 헥터가 뛰어 올라왔다. 그는 땀이 밴 모자를 벗고 숨을 골랐다.
“사장님. 북부 소금 계단에서 이상한 물건이 발견됐습니다. 오늘 오전 위탁품 명부에 없는 물건인데, 누가 접수증을 붙이고 갔답니다.”
“무슨 물건이지?”
“손바닥만 한 조개껍데기입니다. 값을 적은 칸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헥터는 구겨진 접수증을 펼쳤다.
‘시작가: 증인 한 사람의 이름.’
진혁의 손바닥이, 의사가 감아 준 붕대 아래에서 다시 뜨거워졌다.
제3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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