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감정사가 나타나기로 한 날, 루멘의 아침 회의는 평소보다 길었다.
헥터는 입구마다 경비를 배치했고, 이사벨은 시의회 조사관 두 명을 대홀 뒤편에 대기시켰다. 세리아는 계약서에 적힌 시각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유리창을 점검했다. 그러나 오전 아홉 시가 지나도 누군가는 오지 않았다. 아홉 시 십 분, 복도 벽시계가 조용히 울렸다. 아홉 시 이십 분, 경매장 종업원들은 견본품을 정리하느라 계단을 오르내렸다.
진혁은 기다리는 동안 사과를 한 개 먹었다. 사과를 깎지 않고 통째로 베어 물자 세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님을 기다리는 태도가 그게 뭐야?”
“초대받지도 않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식사까지 굶을 수는 없잖아요.”
“손님이 아니라 용의자지.”
“그럼 더더욱 밥을 먹어야죠. 범인을 만날 땐 배고프면 안 됩니다.”
카렌은 사과를 씹는 그를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 하지만 눈은 계속 문을 향해 있었다. 아버지 이름을 위조한 계약서가 바로 그 문을 통해 들어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전 루멘 바깥 골목에서는 경매 참가자들이 어제 보류된 지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륙 서쪽에서 온 탐험가는 지도가 진짜라면 고대 던전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고, 조합 상인은 출처가 불분명한 물건을 팔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루멘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옆에서 차를 팔던 노인은 그들의 말을 듣다가 투덜거렸다.
“지도 하나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데, 왜 제일 먼저 값부터 묻는 거야.”
대홀에 들어온 진혁은 그 말을 떠올렸다. 지도가 유리섬의 숨겨진 길을 알려 준다는 사실보다, 누가 그 길을 숨기고 누구에게 팔려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었다. 그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고객의 호기심에 기대어 비싸게 파는 것이 경매장에 얼마나 쉬운 유혹인지 새삼 깨달았다.
세리아는 대홀의 긴 탁자에 따뜻한 홍차를 놓았다. 사람마다 손이 가기 쉬운 위치에 잔을 놓았지만 아무도 제대로 마시지 않았다. 카렌의 손은 차갑게 식은 잔 옆에서 줄곧 움직이지 않았다. 진혁은 그녀가 아버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다리는 사람이 꼭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죠.” 그가 말했다.
카렌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기다려야겠어요. 누가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적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진혁은 아무 위로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필요한 서류를 손 닿는 곳으로 밀어 줬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때로는 조용히 앉아 있을 자리라는 걸 조금씩 배워 가는 중이었다.
아홉 시 반에 도착한 사람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아니었다. 낡은 파란 작업복을 입은 여성이 작은 운반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회색 먼지가 묻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잉크 얼룩이 있었다.
“제0호 감정사의 대리인입니까?” 헥터가 물었다.
여성은 고개를 저었다. “루멘에서 요청한 수리공입니다. 이름은 미란이에요. 유리섬에서 왔고요.”
“우리가 수리를 요청했다고요?”
세리아가 표정을 굳혔다. 미란은 품에서 정식 발주서를 꺼냈다. 발주자는 세리아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고, 보수 대상은 지하 봉인실의 ‘제7소유권 연결관’이었다. 세리아는 그런 발주를 한 적이 없었다.
“누가 이걸 보냈습니까?”
“전달인은 얼굴을 안 보여 줬어요. 제0호 감정사의 의뢰라고 했습니다.”
미란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저도 이곳에 처음 와 봅니다. 아무리 유명한 경매장이라도 본 적 없는 설비는 함부로 만지지 않아요.”
미란은 자신의 작업 상자 한쪽을 열어 보여 줬다. 안에는 나사와 고무 패킹, 두께가 서로 다른 송곳, 물에 닿아도 번지지 않는 기록용 연필이 정돈돼 있었다. 진혁은 던전에서 나온 신비한 기구보다 그 평범한 도구들이 더 안심된다고 느꼈다. 아무 물건이나 감정하면 진실이 보일 거라고 착각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의 손으로 고칠 수 있는 장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장치는 꼭 도면부터 찾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그렇죠. 다들 천재 기술자는 손만 대면 기계를 고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은 금방 사고를 냅니다.”
“감정사도 마찬가지겠군요.”
미란이 웃었다. “직업이 달라도 무리하지 않는 건 비슷한가 봐요.”
카렌은 미란의 손등에 난 굳은살을 보았다. 그 손은 법의 조문이나 마법의 비밀을 잘 모르더라도, 누군가의 생계를 지탱하는 장치를 계속 고쳐 왔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손에 들린 낡은 명패가 갑자기 더 중요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진혁은 작업 상자의 봉인과 서류를 대조했다. 도장에는 진짜 루멘 문양이 있었지만 날짜 부분이 기묘하게 번져 있었다. 본질 감정은 짧게 사용했다.
[위조 수리 발주서.]
[서명 이미지: 과거 보관 자료에서 복사.]
[발송 의도: 봉인관에 접근하는 사람의 반응 관찰.]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누군가 협박장을 보낸 것이 아니라 반응을 시험하고 있었다. 세리아가 실수를 하거나, 직원들이 공포에 빠져 봉인실을 건드리면 그 자체로 자료가 남을 것이다.
“서류는 위조됐습니다.” 진혁이 말했다. “하지만 미란 씨는 자기 이름으로 온 사람이에요. 우선 안전하게 돌려보내죠.”
미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곳에 온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그녀는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철제 명패를 꺼냈다. 부식된 명패에는 레온 하르트의 이름과 오래된 유물 조사단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카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어디서 얻었죠?”
“우리 아버지가 갖고 있었어요. 유리섬 지하에서 레온이라는 사람이 사고를 당할 때 함께 있었다고요.”
잠시 대홀에 침묵이 흘렀다. 미란은 손끝으로 명패 모서리를 문질렀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리섬의 수로 보수공이었고, 수년 전 기록 운송로에서 큰 붕괴 사고를 겪었다고 했다. 그때 레온은 조사단을 이끌고 불법 위임 기록을 찾으러 왔다. 사고가 나자 레온은 보수공들을 먼저 내보내고 수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레온 님이 죽는 걸 보지 못했어요. 출구가 닫히는 걸 봤을 뿐이라고 했죠.”
카렌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의회 보고서에는 수문에 깔려 숨졌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 보고서가 사실인지 저는 몰라요. 다만 아버지는 문이 닫히기 전에 레온 님이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어요.”
“무슨 소리요?”
미란은 책상 위에서 손가락으로 박자를 두드렸다. 짧게 세 번, 길게 두 번, 다시 짧게 한 번.
진혁은 그 리듬을 듣고 염문 수로 벽에 있던 손바닥 무늬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황동 종이 울릴 때도 비슷한 간격으로 울렸던 것이다. 수문을 여는 기술 신호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아버지가 스스로 문을 닫았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카렌이 물었다.
미란은 고개를 숙였다. “그 뒤는 아무도 모릅니다.”
카렌은 무너지는 표정을 감추려 턱을 굳게 다물었다. 진혁은 그녀에게 거짓 희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었다고 말할 증거는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죽음의 과정이 다를 수는 있었다.
“유리섬에 가면 당시 수리 일지를 볼 수 있을까요?” 진혁이 물었다.
“원본은 지하 보존실에 있어요. 상회가 접근권을 사들인 뒤에는 우리 같은 수리공도 못 들어가지만요.”
“접근권을 사들였다니요?”
“섬에서 일하는 모든 보수공이 허가증을 받아야 해요. 검은 인장 상회가 통행을 관리한대요.”
진혁은 라일을 바라봤다. 그가 며칠 전 도둑의 감각으로 찾아낸 항로가 여기와 연결됐다. 법적으로 접근권을 빌미로 유적을 독점한다면 조사단의 활동도 막을 수 있었다.
세리아는 곧장 회계실 직원에게 유리섬의 소유권 등기를 가져오게 했다. 유리섬 일부는 오래전에 항만 공공 부지로 지정돼 있었지만, 지하 관리 통로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계약이 바뀌었다. 최근 최종 관리자에는 ‘제0호 감정사 보증 관리회사’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실제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게 회사를 여러 겹 세운 모양이군.” 이사벨이 말했다.
“그런데 회사는 사람이 운영하죠.” 진혁이 답했다. “도장을 찍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벨은 서류를 넘겼다.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뀐 임원 명부 사이에 검은 경매에서 입찰하던 검은 외투 남자의 특징과 일치하는 증인 정보가 있었다. 아직 신원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접점은 발견된 셈이었다.
그때 경비병이 무대 뒤편에서 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봉투는 아홉 시 정각부터 그곳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문으로 들어올 누군가만 기다리느라 정작 작은 우편함을 보지 못한 것이다.
진혁은 봉투를 열었다.
‘나는 방문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지도와 함께 잊힌 이름을 찾으라고 했을 뿐이다. 그 이름이 누구 것이었는지 알면 값도 알게 되겠지.’
하단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
‘레온 하르트는 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카렌은 편지를 빼앗듯 잡았다.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잔인했다. 누군가의 상실을 비틀어 또 다른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저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카렌이 말했다.
“찾을 겁니다. 하지만 저 문장을 사실로 믿지는 마세요.”
진혁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우리는 증거를 찾으러 가는 거예요. 누가 던져 준 수수께끼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카렌은 눈을 감았다 뜬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멘을 나서기 전 미란은 세리아에게 고장 난 인장 장치의 간단한 구조도를 그려 줬다. 그녀가 소금에 거칠어진 손가락으로 선을 긋는 동안, 진혁은 작업소 생활을 물었다. 미란은 유리섬 마을 사람들이 수로를 고치며 살아간다고 했다. 광석을 캐서 팔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수입은 항로 유지와 기록 운반 설비 보수에서 나온다. 검은 인장 상회가 관리권을 가져간 뒤에는 수리비 지급이 늦어져 마을의 공동 창고가 비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럼 그 사람들한테도 이 사건이 생계 문제군요.” 진혁이 말했다.
“맞아요. 여기서는 큰 계약 하나가 끊기면 여름 내내 모은 돈이 날아가요.”
세리아는 구조도를 받아 들고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현장에 가서 서류만 확보하고 돌아오는 것이 목표가 아니겠네. 이미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해야겠어.”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마 전 항만 방벽을 지키려고 모라의 힘을 전부 쓸 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다급한 위기에서는 가까이에 있는 힘을 빌리는 게 쉬웠다. 하지만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동의했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검은 상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란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 “처음에는 루멘 사람들은 전부 금화만 세는 줄 알았어요.”
“그런 사람도 많죠.” 진혁이 답했다. “저부터 그렇고요.”
“그런데 돈을 좋아하면서 돈으로 못 살 것을 구하려 한다니 신기해요.”
진혁은 멋쩍게 목을 긁었다. “원래 살 수 없는 걸 팔려고 하는 사람이 문제니까요.”
미란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돌아선 뒤에도 진혁은 오래 작업대에 남았다. 장치의 구조도에는 작고 평범한 나사와 기어들이 그려져 있었다. 거대한 마법 장치도 결국 누군가 손으로 고치고 돌보는 시설이었다.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야 어떤 비밀도 안전하게 밝혀질 수 있었다.
그날 오후 루멘은 유리섬 현장 조사에 필요한 공적 접근 요청서를 제출했다. 이사벨은 무권한 계약으로 공공 수로를 독점한 사실이 확인되면 강제 열람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세리아는 입찰 보류된 해도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한 독립 감정도 의뢰했다.
절차를 거치면 시간이 든다. 그러나 오래된 비밀을 가진 상대가 바로 그 조급함을 노린다면, 느리게 확인하는 것이 때로 가장 빠른 길일 수 있었다.
진혁은 사무실로 돌아와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문양은 어제보다 선명했다.
[제31후보.]
[원권리자 접촉 예상 지역: 유리섬.]
[제0호 감정사 경고: 해석 불가.]
그는 손을 접었다. 상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따라갈 장소만큼은 미리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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