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의 수요일 경매는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시작됐다.
루멘 대홀의 긴 유리창을 통해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붉은 천을 덮은 객석은 삼분의 이만 채워졌고, 무대 양옆에는 새로운 공적 경고문이 걸렸다. ‘위탁자의 신원과 권리 증빙을 확인하지 않은 물품은 낙찰이 보류될 수 있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루멘의 인기 상품은 오랜 던전에서 건져 올린 검과 마정석이었다. 이제 상인들은 그런 물건보다 서류 한 장을 더 꼼꼼하게 보게 됐다.
세리아는 무대 뒤에서 진혁의 넥타이를 고쳐 주며 말했다. “오늘은 특별 감정사 자격으로 공개 의견을 말할 거야. 내 부하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감정인으로.”
“그게 급여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대외 책임을 분리한다는 뜻이지.”
“역시 저한테 불리한 말만 골라 하시는군요.”
세리아가 진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대신 오늘 네가 제대로 입찰을 지키면 루멘의 신뢰가 올라갈 거야.”
“그 신뢰를 월급으로 환산할 수 있습니까?”
“서진혁.”
“알겠습니다. 오늘은 일하겠습니다.”
무대 앞에서는 새로 채용된 경매 진행 보조가 입찰용 나무패를 나눠 주고 있었다. 푸른 패는 일반 입찰자, 금빛 패는 사전 보증금을 맡긴 고액 고객, 흰 패는 감정 의견만 제출하는 사람에게 주어졌다. 예전에는 금빛 패를 든 사람들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지만, 오늘은 흰 패를 가진 감정인들의 자리가 객석 앞줄로 옮겨졌다. 검은 경매 사건 이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바뀐 규칙이었다.
진혁은 입찰 진행 방식도 다시 확인했다. 경매장은 물품의 위탁자가 정한 최저가 이하로 팔 수 없지만, 물품 설명이 달라지면 입찰 전에 정정 공고를 내야 한다. 구매자는 낙찰이 선언된 뒤에야 소유권 이전 절차를 시작한다. 그 전까지는 경매장의 보관 책임이 유지된다. 이런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경매봉을 한 번 내려치면 물건이 곧장 손에 들어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거래는 그 뒤에도 수많은 서류와 검증을 거친다.
“오늘은 감정 사고 없게 합시다.” 진행 보조가 말했다.
“우리 일은 사고를 안 내는 게 아니라 사고가 나기 전에 발견하는 거예요.” 진혁이 답했다.
“그게 더 어려운 말인데요.”
진혁은 보조의 손에 있는 번호패를 돌려 봤다. 모서리가 날카롭게 깎여 있었다. 많은 손님이 하루 종일 만지는 물건이라 손이 베일 수도 있었다. 그는 모서리를 조금 갈아 달라고 부탁했다. 거대한 마법 장치의 비밀을 알고 나서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은 여전히 작은 나뭇조각일 수 있었다.
첫 입찰 전에 세리아는 대홀 전체에 짧게 안내했다. “경매장은 가격을 높이기 위해 존재하지만, 가격을 속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물품은 보류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거래가 늦어지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일부 상인은 불만스러워했지만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사건 때문에 루멘에서 거래하기를 주저하던 손님들도 오늘만큼은 그 말을 확인하려는 듯 보였다.
첫 번째 물품은 북부 방벽 공사에 사용할 마정석 여섯 개였다. 입찰자들은 성능 측정표와 반품 규정을 확인한 뒤 경쟁적으로 손을 들었다. 두 번째는 파손된 성채에서 가져온 청동 방패였다. 세리아는 감정사가 고대 왕국의 문장을 확대해 보여 주도록 했고, 청중은 그 희미한 무늬를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경매가 조금씩 예전 분위기를 되찾고 있었다.
세 번째 물품을 보자 진혁은 표정을 바꿨다.
낡은 해도가 둥근 나무 틀에 끼워져 나왔다. 종이 가장자리는 누렇게 변했고, 바닷물이 닿았던 부분은 검게 얼룩져 있었다. 바다와 해안선을 그린 작은 선 사이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상품 안내에는 ‘유리섬 외곽 유적 항로도. 개봉가 금화 오십 닢’이라고 적혀 있었다.
라일은 무대 뒤에서 그 지도를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본 물건인데요.”
“유물 도둑한테 낯익은 물건이 없는 날도 있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아뇨. 하지만 저 지도는 유난히 비싸게 팔릴 물건입니다. 며칠 전에 암시장 구매자가 같은 무늬를 찾고 있었거든요.”
“누가요?”
“얼굴을 가린 사람. 돈을 셀 때 손가락이 하나 더 필요할 만큼 많아 보이더군요.”
그는 지도에 붙은 낡은 실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종이의 섬유가 엉켜 있어 조금만 힘을 주면 가장자리가 떨어질 것 같았다. 보관 담당자는 지도 안쪽에 젖은 흔적이 있어 더 이상 펼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빛의 각도만 조절했다. 투명한 진열대 아래에서 불빛이 올라오자 지도의 잘린 부분에 남은 작은 톱니 모양의 흔적이 드러났다.
“여기 원래 다른 종이가 이어져 있었군요.”
카렌이 몸을 숙였다. “이건 찢어진 게 아니라 도구로 잘랐어요. 같은 간격으로 자국이 남아 있죠.”
“그리고 잘라낸 뒤에 낡아 보이도록 물을 묻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도 가장자리의 염분을 조금 채취해 표본 통에 넣었다. 바닷물에 오래 잠긴 종이와 사람이 일부러 소금물을 발라 말린 종이는 결정의 분포가 달랐다. 이번 표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었지만 이후 전문가 감정에 제출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미술품 위조도 되겠네요.” 라일이 말했다.
“위조하려는 건 지도 모양일 수 있어도 목적은 항로겠죠.” 진혁은 도면의 회색 선을 가리켰다. “여기에 빠진 구간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면, 구매자는 완성된 길을 산 줄 알고 함정으로 가게 됩니다.”
라일은 지도 위의 짙은 곡선을 오래 바라봤다. “여기 물길이 이렇게 꺾이면 배가 벽에 부딪힙니다. 제가 염문에서 타 본 기록 운송선도 이런 방향으로는 못 돌았어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지도의 기능 자체를 검증하지 않고 입찰에 부칠 순 없어요.”
진혁은 감정 기록의 첫 줄에 ‘항로의 실재 여부 검증 전’이라고 적었다. 아직 누가 왜 잘랐는지 모른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남겼다. 확신하는 척하면 잠깐은 똑똑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기록을 믿고 바다로 나갈 사람이 생긴다면, 실수의 값은 금화 몇 닢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진혁은 등록 서류를 받았다. 위탁자는 남부 골동품 상회라고 적혀 있었고, 소유권 증빙은 두 차례의 매매계약서로 되어 있었다. 첫 번째 계약서에는 지도 제작자의 서명이 없었다. 두 번째에는 ‘전 소유자 불명’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이 정도면 출처가 불명확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고지해야 했다.
“잠깐, 이 지도에 그려진 유리섬 항로가 왜 여기에 있죠?”
카렌이 물었다. “유리섬은 일반 배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진혁은 지도 구석의 깊이 표시를 가리켰다. “해도가 사실이라면 얕은 길이 있어요. 하지만 왜 이 길만 조류 표시가 반대로 되어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공개 감정대에 지도를 올렸다. 손을 대자 눈앞에 불완전한 기억들이 스쳤다. 어린 사서가 돌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모습, 오래된 나침반 바늘, 유리창처럼 빛나는 거대한 바위. 마지막 장면에는 누군가 종이의 일부를 칼로 잘라 내는 손이 보였다.
[유리섬 지하 수로의 항로 일부.]
[현재 위탁품: 원본의 3분의 2.]
[숨겨진 기능: 소유권 기록 운송로의 방향 표기.]
[위험: 결손 부분을 추정 항로로 대체할 경우 좌초 가능.]
그는 능력을 멈췄다. 머리 뒤쪽이 찌릿했다. 지도가 실제로 안내하는 것은 배 한 척이 다닐 바다가 아니라 기록이 이동하는 길일 수 있었다. 그러나 관객 앞에서 보이지 않는 문장을 그대로 진술해서는 공적 감정이 될 수 없었다.
“이건 완성된 항로도로 팔면 안 됩니다.”
진혁의 말에 대홀이 술렁였다.
진행자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이유로?”
“원본 일부가 잘렸습니다. 일반 해도와 다른 항로 표기를 사용하고요. 안전한 통항을 보증하는 물건으로 소개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앞줄의 대머리 상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한테 중요한가? 나는 그림으로 장식하려고 하는데.”
“장식용으로는 파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능을 다르게 적어야죠.”
상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는 위탁자의 대리인을 불러 상품 설명을 고치자고 했다. 대리인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지도에는 귀한 유적 위치가 표시돼 있습니다. 손실은 구매자가 감수하는 것으로 계약서를 쓰면 되지 않습니까?”
“손실을 감수하는 것과 위험한 사실을 숨기는 건 다릅니다.” 진혁이 답했다. “계약서에 적을 수 없는 내용은 경매장에서도 인정할 수 없어요.”
잠시 뒤 개봉가는 금화 오십 닢에서 열 닢으로 내려갔다. 입찰자는 더 줄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진혁은 속으로 계산했다. 지금 자신이 낙찰받는다면 조사에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무상 감정인이 감정 대상에 직접 입찰하면 공정성 시비가 생긴다.
그는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규칙을 기억했다.
“루멘이 증거 보전을 신청하겠습니다.”
세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그럼 경매 수익이 줄어들어.”
“이 물건은 위험한 항로도로 등록된 것부터 잘못됐어요. 소유권이 분명해질 때까지 판매를 보류하는 편이 낫습니다.”
세리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진행자에게 손짓했다. “제3호 물품, 입찰 보류. 위탁자에게 적법한 소명 기회를 제공합니다.”
객석에서 몇 사람이 박수를 쳤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다음 물건을 기다렸다. 경매장에게는 낙찰되지 않는 물건도 중요했다. 어떤 물건은 팔지 않는 판단 덕분에 오히려 신뢰를 얻는다.
물건이 무대 뒤로 내려오자 두 명의 보관 담당자가 보류 도장을 찍고, 상자의 뚜껑에 손대지 않았다는 확인서에 서명했다. 대홀 바깥에서는 입찰 결과를 기다리던 상인들이 불평했지만 진행 보조는 다음 경매 물품을 준비했다. 바쁜 경매장의 하루는 한 건의 거래가 멈췄다고 정지하지 않았다.
진혁은 감정 실무자가 된 초기, 상품 설명의 잘못을 발견하고도 말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그는 직장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적은 한 줄이 누군가의 배를 침몰시키거나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 생기는 책임도 있다는 것을 배운 뒤로, 서명을 쉽게 하지 못했다.
그는 보류 도장을 확인하며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오늘 얻은 이익은 금화가 아니었다. 항로도 때문에 잘못된 바다로 떠나는 사람이 적어도 하루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날 저녁, 세리아는 감정실에서 진혁에게 낡은 장부를 보여 줬다. 지도와 함께 제출된 매매계약서 맨 아래에는 필체가 다른 서명이 적혀 있었다.
‘레온 하르트.’
카렌은 서명을 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아버지 이름이에요.”
“진짜입니까?” 진혁이 물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글씨와 비슷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지도 상인이 아니었어요.”
카렌은 글자 하나를 손끝으로 따라갔다. “아버지는 ‘하르트’의 마지막 획을 늘 짧게 끝냈어요. 여기에는 다른 사람처럼 길게 쓰여 있어요.”
진혁은 서명 밑에 있는 수수료 항목을 읽었다. 계약서는 레온이 숨진 뒤의 날짜로 작성돼 있었다. 누군가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려 지도를 판 것이다.
그는 종이에 날짜와 증인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제대로 된 물증을 모으면 위조가 드러날 수 있었다. 과거의 사건을 감정 능력 하나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됐다.
카렌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부친의 죽음이 다시 현실의 물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픈 듯했다. 진혁은 그녀가 정리할 시간을 주려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요.”
그녀가 불렀다. “아버지는 항상 말했어요. 누가 잘못했는지보다 누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지 보면 진실이 보인다고.”
“좋은 말씀이네요.”
“그래서 아버지가 죽은 이유도 그렇게 찾을 생각이에요.”
진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라일이 어딘가에서 훔친 것 같은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안 훔쳤습니다. 진짜로요.”
봉투 안에는 오늘 경매의 유일한 비낙찰 물품을 보겠다는 요청서가 있었다. 신청자는 ‘제0호 감정사’. 함께 적힌 방문 시각은 내일 오전 아홉 시였다.
진혁이 웃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마침내 저 사람도 경매장으로 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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