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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26화
PAYLUA ORIGINAL · 제26화

26화. 이름을 실어 나르는 배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959자

오프라인 책장
배는 물결을 거스르지 않았다. 진혁은 처음에 좁은 수로 안쪽으로 물이 밀려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은 평저선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물살과 방향이 어긋나는 것이 보였다. 푸른 안개 속에서는 뱃전 아래의 물이 흐르지 않고, 바닥에 새겨진 가느다란 글자가 앞으로 움직였다. 사람 눈에는 배가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간의 기록이 한 장씩 넘겨지는 것에 가까웠다. “대체 이런 운송로를 누가 만들었죠?” 카렌이 물었다. 진혁은 양옆을 살폈다. 좁은 수로 벽에는 작은 손바닥 무늬가 이어져 있었다. 아이의 것처럼 작은 것도 있었고, 오래 일한 장인의 손처럼 굵은 것도 있었다. 제각각 다른 손들이 같은 높이에서 물길을 향해 뻗어 있었다. 여기서 물건을 나르던 사람들은 한 손에 짐을 들고 다른 손으로 자기 이름을 확인했던 것일까. “루멘보다 먼저 살던 사람들 아닐까요.” 공증인 아벨은 출발 전에 육지로 되돌아갔다. 조사 허가를 가진 그가 바깥에서 공식 상황을 기록해야 증거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평저선에는 진혁, 카렌, 라일 세 사람만 올라탔다. 염문 쪽에는 봉인과 관측용 구리 기둥을 설치했다. 급한 상황에는 배가 사라진 지점과 시각을 알릴 수 있도록 했다. “이상한데요.” 라일이 배 밑을 두드렸다. “노도 없고 키도 없는데 배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죠?” 배의 앞쪽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렸다. “받을 사람이 정해 주지.” 세 사람은 동시에 돌아봤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선두에 묶인 작은 황동 종이 흔들리고 있었다. 종에는 입이 없었지만 울릴 때마다 말소리가 났다. “물건의 주인과 받는 사람을 확인해 줘.” 진혁은 종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이 배의 이름은 뭡니까?” “이름 없는 배. 이름이 있으면 팔리니까.” 라일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 마음에 드는 철학인데.” “당신은 물건을 자주 팔잖아요.” 카렌이 말했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한 거죠.” 진혁은 나무 상자의 봉인을 확인했다.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상자에 든 이름을 억지로 열지 않으려 했더니 종이 다시 울렸다. “누가 가져가려 하느냐?” “받는 사람의 동의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 중입니다.” 진혁이 답했다. “상자 안의 권리를 사고 싶어서 온 게 아닙니다.” 종이 잠시 잠잠해졌다. “그 말은 오래간만이구나.” 푸른 안개가 걷히며 주변에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천장에는 세월에 닳은 종유석이 매달려 있었고, 그 끝에는 짠물이 맺혀 있었다. 동굴 벽에는 선박의 그림이 수백 개 그려져 있었다. 어떤 배에는 금화 자루가 실려 있었고, 어떤 배에는 검, 지도, 빛나는 병이 쌓여 있었다. 마지막 그림은 달랐다. 작은 배에 사람이 앉아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다. 진혁은 마지막 그림 앞에서 손바닥에 문양이 아프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오래된 운송로.] [원래 수송 대상: 위탁된 물품의 소유권 기록.] [변조된 수송 대상: 위탁되지 않은 사람의 신원.] [변조 주체: 확인 불가.] 그는 손을 감췄다. 기록에 남은 자국만으로 범인을 알 수는 없었다. 대신 왜 이곳이 필요했는지는 조금 이해됐다. 누가 무엇을 맡겼는지 적던 길을 통해,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몰래 실어 나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길 중간에서 배가 잠시 멈추자 세 사람은 양옆 벽에 남은 그림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수레로 옮겨지는 무거운 검을 그린 벽화 아래에는 그것을 맡긴 사람의 초상과 받는 사람의 초상이 따로 있었다. 금화가 그려진 그림 옆에는 누가 빚을 졌는지 적은 작은 장부가 붙어 있었다. 가장 오래된 그림에서는 그림 속 사람들이 같은 높이에 서 있었지만 최근에 그려진 것들은 달랐다.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고, 기록을 받는 사람은 점점 크게 묘사됐다. “역사책을 그림으로 만든 것 같네요.” 카렌이 말했다. “거래의 역사지요.” 진혁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물건을 함께 확인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맡기는 사람을 보지 않게 된 거예요.” 라일은 마지막 그림 앞에서 멈췄다. 좁은 배에 어린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목에는 작은 원형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표정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지워져 있었다. 그림 아래 작은 문자들이 물에 씻긴 듯 흘렀다. 그 가운데 라일은 한 글자를 알아봤다. “이 글자… 제 이름인가요?” “모르겠습니다. 이건 고대 글자라 함부로 읽으면 안 돼요.” 진혁이 대답했다. 그는 몸을 낮춰 표면을 살폈다. 물이 닿지 않은 벽 윗부분에는 같은 글자가 여러 차례 반복돼 있었다. 개인 이름이라기보다 ‘돌아갈 사람’이라는 뜻의 표식처럼 보였다. 그는 섣불리 라일이 그 아이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절실하게 찾는 기억일수록 근거 없는 확신은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었다. “어쩌면 예전에 당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던 사람일 거예요.” 진혁이 말했다. 라일은 벽화를 오래 바라보다 돌아섰다. “그래도 저 목걸이 모양은 기억해 둘게요.” 세 사람은 그 그림을 복사판에 옮겼다. 물이 벽에 닿기 시작하자 낡은 색소가 잠깐 환하게 살아났다. 벽화 속 어린아이는 이상하게도 등 뒤에 두 명의 어른을 그려 두고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제복을 입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라일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동굴 끝에서는 작은 수문이 내려와 있었다. 진혁이 접근하자 수문에는 숫자 ‘031’이 불타듯 나타났다. 이어 네모난 문양이 열렸다. ‘수취인 확인. 손을 대시오.’ 라일이 진혁을 막아섰다. “이거 누르면 이름이 넘어가죠?” “아마도요.” “그럼 누르지 마요.” 진혁은 땅에 내려앉은 오래된 선적 기록을 살폈다. 수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라 수취인과 운송품을 대조하는 검사 장치였다. 이를 무시하면 배가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취 확인과 소유권 양도는 별개의 절차여야 했다. 그 차이를 찾아야 했다. 카렌은 배가 흔들릴 때마다 두 발을 벌려 균형을 잡았다. 바닥에는 미세한 물기가 올라왔고, 높은 수문 아래로 물방울이 튀었다. 수문이 떨어지면 머리 위의 공간이 반으로 줄어들 것 같았다. 라일은 본능적으로 도주할 틈을 찾았지만 뒤쪽 안개는 같은 곳을 빙빙 도는 모양이었다.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앞에서 보던 바위가 다시 나타났다. “평소에 도망갈 길이 세 개는 보였는데, 오늘은 하나도 안 보입니다.” 진혁은 속으로 손바닥 문양을 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무언가를 깨닫고 싶은 순간마다 능력을 쓰다 보면, 능력 자체에 판단을 맡기게 된다. 그는 대신 낡은 홈의 가장자리에 남은 글자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오래된 문장일수록 누군가 고치기 전에 쓰였던 의미가 남아 있었다. 그는 문 아래의 작은 홈을 발견했다. 먼지에 가려 있었지만 원래 명판을 떼어 낸 자리가 분명했다. 라일이 얇은 도구로 이끼를 걷어 내자 글자가 드러났다. ‘수취 거부권. 미승인 물품은 원위치 보관.’ “있네요.” 진혁이 말했다. 카렌이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수취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운송이 멈춰야 하죠.” 진혁은 소리 높여 선언했다. “제31후보 서진혁은 내 이름이 포함된 이 운송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도 대리 수취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수문이 한 번 떨렸다. 짙은 먹빛 글자들이 손잡이 위를 기어 다녔다. [수취인 반대 접수.] [제31후보 이전 중지.] [잔여 물품 다섯 건: 원권리자 확인 필요.] 문이 열리기는커녕 아래로 더욱 내려왔다. 큰 쇳소리가 동굴 전체에 퍼졌다. 배 뒤편의 푸른 안개가 급격히 좁아졌다. 누군가 이 배의 이동을 눈치챘는지 뒤쪽 기록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다. “돌아갈 길이 막히는데요?” 라일이 말했다. 카렌은 검을 꺼냈다. “수문을 부수면요?” “다른 사람의 기록도 함께 망가질 수 있어요.” 진혁이 답했다. 그는 종을 향해 말했다. “이 배에 실린 것의 원래 목적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황동 종이 한 차례 울렸다. “짐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그렇다면 저희를 되돌려 보내 주세요. 증거 사본을 가져가야 주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돌아갈 수는 있다. 다만 누가 손을 잡고 이끌겠느냐?” 종의 말이 끝나자 바닥에 놓인 조각판 가운데 하나가 빛났다. 그것은 출발할 때 본 손바닥 무늬와 같았다. 진혁은 선뜻 손을 대지 않았다. 또 다른 계약일 수 있었다. 그는 카렌과 라일에게 직접 판의 문구를 읽게 했다. ‘운반 보조. 소유권 변동 없음. 운송 종료 후 효력 소멸.’ “이번에는 문구가 분명하네요.” 카렌이 말했다. 라일이 웃었다. “한 번쯤 배를 저어 보는 것도 재밌겠는데요.” 셋은 각자 동의한 뒤 손을 판에 올렸다. 배가 작게 흔들리더니 왔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뱃전의 나무 상자들은 여전히 봉인돼 있었다. 그러나 첫 상자의 등록패에 있던 ‘수취 완료 예정’이라는 문구는 사라져 있었다. “이름 하나는 지켰네요.” 진혁이 말했다. “더 정확히는 잃기 전에 막았죠.” 카렌이 대답했다. 라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물결 속에서 떠오른 자신의 그림자를 오래 바라봤다. 그림자의 목에는 그가 평소 가지고 있지 않은 작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실제 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 그림자….” 진혁이 물었다. “왜요?” “예전에 저런 목걸이를 걸었어요. 원래 이름을 빼앗기기 전.” 진혁은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물을 바라봤다. 이 운송로는 이름을 지우는 곳이면서, 지운 흔적이 잠깐 드러나는 곳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동안 배는 처음과 달리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황동 종도 침묵했다. 카렌이 배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푸른 글자들이 천천히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진혁은 글자들을 읽지 않았다. 이 통로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 이름을 되찾기 전에 한 번에 다 알아내겠다는 욕심을 부리면, 기록에 붙잡힌 사람들의 삶을 또 다른 실험 재료로 삼는 꼴이 될 것이다. 라일은 배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거두었다. “저 물 속에 제 이름이 있다면 당장 건지고 싶었거든요.” “그 마음은 이해해요.” 진혁이 말했다. “그런데 저기 빠지면 제가 건지는 게 이름일지, 이름이 저를 끌어들이는 건지 모르겠네요.” 카렌이 라일을 바라봤다. “오늘은 참기로 잘했어요.” “칭찬입니까?” “한 번뿐이에요.” 라일은 웃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기 이름에 관한 진짜 질문을 던졌다. “만약 원래 이름을 찾았는데 그 이름으로 살던 내가 싫었다면 어떻게 하죠?” 진혁은 오래 생각한 뒤 말했다. “되찾는 건 과거를 아는 일이고, 앞으로 그 이름을 쓰는 건 당신이 정할 일이죠. 다른 사람이 다시 지정해서는 안 되잖아요.” 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염문 계단의 하얀 돌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빠지는 동안 세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진혁은 출입 구간별로 수첩에 표시했다. 염문에서 첫 굴절 지점까지 열한 번 종소리가 울렸고, 손바닥 벽화를 지나 수문에 도착하기까지 다시 일곱 번 울렸다. 수문 앞에서 배를 멈췄을 때는 종이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이 숫자가 길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아와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장소를 설명할 때 필요할 수 있었다. 그는 기억이 불확실한 부분에는 물음표를 그려 넣었다. 누군가 다음번에 이 길을 찾는다면, 자신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했다. 밖으로 나오자 만조가 물러가고 있었다. 아벨은 비탈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육지에서 흐른 시간은 세 시간뿐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수첩에는 동굴에서 보고 들은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때 아벨이 낯선 봉투를 건넸다. 염문 출입 명령을 확인하는 사이 우편 전달인이 남기고 갔다고 했다. 봉투에는 수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다. 안쪽에는 빳빳한 흰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이름을 지키는 일은 훌륭하다. 그러나 그 이름을 지키느라 도시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겠다면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 그리고 아래쪽에 붉은 인장 하나가 찍혀 있었다. ‘제0호 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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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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