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브가 눈을 뜬 것은 구조된 지 나흘째 되는 오후였다.
루멘 경매장 서쪽 별관에는 작은 의무실이 있었다. 창가에는 약초 화분이 놓여 있었고, 낮은 침대 여섯 개 사이로 흰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원래는 긴 경매에 참가하다 과로로 쓰러진 상인들을 치료하는 곳이었지만, 최근에는 검은 경매에서 구출된 직원들을 위해 문을 닫고 사용 중이었다. 문 앞에는 헥터가 파견한 두 명의 경비병이 교대로 섰다.
데브는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팔에 힘이 없었고, 말을 하려면 목부터 긁히는 듯 아팠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담쟁이 잎과 먼 부두의 돛대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 풍경이 낯설게 비쳤다. 깊은 잠을 자다 깬 사람의 혼란과 달랐다. 자기 이름을 들어도 그 이름이 누구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데브.”
라일이 침대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늘 경박하게 웃던 젊은 도둑은 그날 유난히 손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그는 들어올 때 산 과일을 들고 있었지만 껍질을 깎는 칼이 눈에 띄자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데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
라일의 표정이 흔들렸다. “나예요. 기억 안 나요? 지하 보관실에서 금고를 열다 들켰던 놈.”
데브는 눈을 깜빡였다. “도둑.”
“맞아요. 그때는 그랬죠. 지금은… 공식 협력인입니다.”
데브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러다 다시 사라졌다.
“네 이름이….”
“라일이요.”
“그게 아니었는데.”
침대 곁에 서 있던 진혁이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다른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데브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시트 위에 선을 그었다. 세로줄 둘, 가로줄 하나. 글자를 쓰려는 듯했지만 마지막에 손이 멈췄다. 눈동자가 갑자기 흔들렸다. 몸 안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듯한 고통이 얼굴에 스쳤다.
“무리하지 마세요.”
진혁은 의료인에게 손짓했다. 치료사는 맥박을 확인하고 목 뒤쪽에 따뜻한 찜질 천을 얹었다. 기억을 강제로 되살리는 주문은 피해야 한다고 했다. 기억 표지가 한동안 원부에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회복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의 기억이 섞일 수 있었다.
라일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때 제가 금고에 손만 대지 않았으면….”
데브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문을 열어 줬지.”
“왜요?”
“네가 안에서 울고 있었거든.”
라일은 입술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혁은 그 말에 뜻밖의 장면을 그렸다. 지금의 라일은 웃으며 도망치고, 금고를 따며, 아무에게나 반말과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누군가를 처음 만났던 날에는 좁고 어두운 저장실에서 울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기억을 지우는 대신 농담으로 덮기도 했다.
“데브 씨, 오늘은 사건 얘기를 그만하죠.” 진혁이 말했다.
“아니.” 데브가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말해야 해. 배가 떠나기 전에.”
“배는 어젯밤 출항 정지됐습니다.”
데브가 안도하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곧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배 말고. 종이에 적힌 배 말고… 기록이 움직이는 배.”
진혁과 라일은 서로를 바라봤다.
데브는 손등의 작은 흉터를 보여 줬다. 검은 상회가 기억을 빼앗을 때 남긴 자국이었다. “저 사람들이 이름을 훔치는 건 아니야. 이름을 대신 적어. 그래서 다른 사람의 빚이 그 사람에게 옮겨 가게 만들어. 종이가 바뀌는 순간….”
말이 끊겼다. 그는 숨을 고르느라 한참 천장을 바라봤다.
진혁은 메모에 ‘대체 기입’이라고 적었다. “그럼 998번 원부에 새로 들어간 사람도 실제 과거의 증인이 아닐 수 있겠군요.”
“맞아. 어제 만든 빚을 삼백 년 된 사람에게 갚으라고 할 수 없잖아. 그러니 살아 있는 사람 이름을 가져다 놓는 거지.”
“왜 꼭 삼백 년 된 장부여야 합니까?”
데브의 눈이 어두워졌다. “거기는 문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염문 아래. 처음 계약이 쓰였던 곳. 거기서 서명하면 오늘 쓰는 잉크도 옛날 종이에 닿아.”
진혁은 실물을 떠올렸다. 원부는 루멘의 보호 계약을 담아 만든 기록 체계였다.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여러 장소의 권리와 기억을 이어 붙이는 매체였다. 누군가 그 연결을 이용해 원부의 처음 부분에 현재의 이름을 얹는다면, 나중에 본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그 이름이 있었던 듯 오해할 수 있었다.
“서른한 명.”
데브가 중얼거렸다.
“제31후보를 아십니까?”
“앞에 서른. 다 죽은 거 아니야. 몇은 도망쳤어. 몇은 아직 자기 이름이 팔렸다는 것도 몰라.”
침대 곁의 물컵이 흔들렸다. 데브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치료사가 더는 말을 시키지 말라고 눈짓했다. 진혁은 메모를 덮었다.
라일은 데브의 손가락을 잠시 잡았다. “괜찮아요. 나머지는 우리가 할게요.”
데브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도망을 안 가고?”
“가끔은 안 가요.”
“그럼 빵 좀 사 와. 배가 고프다.”
라일은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의무실을 나설 때 그의 눈은 붉어져 있었다.
별관 복도에서는 다른 두 환자 벨트와 로아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진혁은 두 사람 침대에 붙은 신원표를 확인했다. 생년과 근무 경력, 마지막 근무일이 적혀 있었지만 인적 사항의 빈칸이 많았다. 누군가 이름을 뺏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 몇 개를 지우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아온 기록,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길까지 흐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카렌은 치료실 밖에서 따뜻한 수프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이 전날 만들어 준 것이라며, 맛이 없다면 동생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녀의 손등에는 금고를 붙잡다 생긴 상처가 아직 덜 아물어 있었다.
“데브는 뭐래요?”
“제 이름이 최근에 덧씌워진 거라고요. 염문 아래에서요.”
“그곳까지 가야겠네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냥 가면 안 됩니다. 기록을 움직이는 배가 뭔지 먼저 확인해야 해요. 화물선은 잡았지만 다른 통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카렌은 수프 그릇을 내밀었다. “그럼 일단 먹어요. 세상 모든 계약을 따지는 사람이 자기 밥 먹을 시간은 계산하지 않나 봐요.”
“식비도 경비 처리됩니까?”
“정말 목숨 걸고 하는 농담이네요.”
진혁은 웃으며 숟가락을 받았다. 뜨거운 수프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야 전날 밤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혁은 보호 명단을 작성하기 전에 의무실의 치료사에게 물었다. “이름과 기억이 분리되면 본인은 어떤 느낌입니까?”
치료사는 찻잔에 따뜻한 물을 따르며 천천히 설명했다. “환자마다 달라요. 자기가 먹던 음식을 기억하지만 그 음식을 누구와 먹었는지는 모를 수 있어요. 어릴 때 살던 거리의 냄새를 알아도 집 위치를 못 찾는 경우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낯선 사람 같다고 말하죠.”
“그럼 기억을 모두 보여 주면 돌아오나요?”
“아니요. 기억은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억지로 많은 장면을 밀어 넣으면 무엇이 자기 경험인지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몸과 마음이 안전할 때 되찾아야 합니다.”
그 말에 진혁은 장부를 곧장 파기하지 않은 판단이 옳았다고 느꼈다. 동시에 그것만으로 사람을 보호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장부에서 실을 떼는 것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는 별관의 작은 명패 제작실에 들렀다. 직원의 이름을 적은 새 표찰을 만들려던 참이었다. 데브와 벨트, 로아의 명패는 모두 예전에 쓰던 것과 같은 크기로 맞췄다. 다만 침대에 있는 당사자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할 때까지 출입문에는 달지 않기로 했다.
라일이 그 명패를 보고 물었다. “그냥 저기 꽂아 주면 되는 것 아니에요?”
“자기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지 먼저 물어야죠.”
라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라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날을 기억하려 했지만, 어느 밤의 뒷골목과 쫓기는 발소리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름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기에 당장 붙일 이름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그 이름을 정말 마음에 들어 했던가.
“나는 나중에 내 이름이 돌아와도 라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왜 안 되겠어요? 다만 원래 이름을 되찾은 뒤에 스스로 정하면 되죠.”
라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명패를 다시 보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항구의 정오 종이 울리고 있었다.
그날 오후 이사벨은 긴급 보호 대상자 명단을 만들었다. 031번 외에 확인된 이름은 다섯 명이었다. 이들 모두 최근 원부 또는 하위 계약에 신원이 연결된 사람이었다. 공적 통지문을 보내되 불필요하게 ‘이름을 도둑맞았다’고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실제 피해 여부를 확인하기 전에 공포를 퍼뜨리면, 시중의 사기꾼들이 ‘신원 회복 부적’을 팔아 돈을 뜯어낼 것이 뻔했다.
그러나 시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한 직후, 루멘 정문 앞에서 그런 부적을 파는 좌판이 등장했다. 종이에 금가루를 뿌리고 ‘원래 이름 복원’이라고 적은 작은 종이가 동화 다섯 닢이었다. 진혁은 그 앞에서 가격표를 오래 바라봤다.
“저런 것도 팔립니까?” 그가 물었다.
헥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서운 사람은 사지.”
진혁이 손바닥을 뻗자 문구가 떠올랐다.
[일반 종이.]
[복원 기능: 없음.]
[제작자의 의도: 불안한 손님에게 비싸게 판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모두에게 알려야 합니다.”
헥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게시판에 정식 주의문을 붙였다. 허위 효능을 신고하는 창구와 무료 신원 기록 확인 절차가 적힌 안내였다. 좌판 주인은 도망쳤지만 사람들의 불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카렌은 시의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안이 쓴 짧은 편지를 받았다. 동생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낯선 사람의 발소리에 놀라며 잠을 설친다고 했다. 대신 오늘은 집 앞 빵집에서 혼자 빵을 살 수 있었고, 돈을 내는 순간 누구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고 적었다.
카렌은 편지를 두 번 읽고 조용히 접었다. 진혁은 그녀가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다무는 것을 보고 일부러 창밖을 바라봤다.
“집에 가 보는 게 좋겠어요.” 그가 말했다.
“조사가 있는데요.”
“제가 임시 감정사 대행이고, 라일 씨가 협력인이고, 헥터 대장님도 계십니다. 한 사람쯤은 가족에게 가도 경매장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경매장이 정말 살아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말도 완전히 믿기는 어렵네요.”
진혁이 웃었다. “그럼 모라한테 오늘 밤은 얌전히 있으라고 부탁해 두겠습니다.”
카렌은 감사하다는 말 대신 그의 외투 깃을 바로 세워 주었다. 바람이 드는 복도였지만 잠깐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진혁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오래 연락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제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 그 이름을 부를 때 더 분명해진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해 질 무렵 데브가 보낸 쪽지가 도착했다. 비뚤비뚤한 글씨로 짧게 적혀 있었다.
‘검은 상회의 명부에는 이름 대신 손가락 지문이 찍혔다. 제31후보 왼손에 문장이 있다면 그건 표식이 아니라 열쇠다.’
진혁은 자신의 왼손을 펼쳤다. 손바닥에는 ‘본질을 본다’라는 문양이 있었다. 능력을 얻은 지 일주일이 넘은 뒤부터 그 문양을 가진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문장이 그에게 생긴 이유를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창틀로 들어온 햇빛에 문양이 잠깐 짙어졌다.
[제31후보 적합성 검사: 완료.]
[열쇠 상태: 활성.]
진혁은 손을 움켜쥐었다.
누군가 그를 선택하기 전에 이미 시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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